이 드라마의 초반은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말도 안되는 우연의 연속,
선우환(이승기 분)의 말도 안되는 쓰레기 짓,
백성희(김미숙 분)의 말도 안되는 악한 계모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 끝난 것을 통탄하며, 어쩌다 이런 드라마가 후속작인가,
내 주말 밤의 낙은 이제 없나..생각했다.
그런데 좀 지난 뒤, 정말 볼 게 없어서 우연히 다시 틀어 보게 된 <찬란한 유산>은
생각보다 '정상'을 찾아 있었다.
<1박2일>을 통해 다져진 '건전한 청년' 이미지의 이승기나
<봄의 왈츠>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가진 외양때문에 늘 '기대주'가 되어왔던 한효주도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의 캐릭터는 닳고 닳은, 드라마에서 써먹을 만큼 써먹은
그런 캐릭터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우는' 고은성(한효주 분)이나
인간 말종에서 차츰 인간다움을 회복해 가는 선우환, 뭐 새로운가?
나쁜 남자가 못되게 굴다가 주인공 캔디 여성에게 빠지고, 그러면서 정신 차리는.
흔하디 흔한 드라마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은
승미(문채원 분)과 선우환의 엄마 오영숙(유지인 분), 선우정(한예원 분)의 '인간다움'이다.
그들은 악역이며 은성의 '장애물'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미워하긴 힘들다.
영숙과 정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인 은성에 의해
할머니의 유산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이 은성을 미워하는 수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미움정도이다.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며느리를 다 모른척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웬 듣보잡에게 다 주겠다고 유언장을 고쳤다.
누가 그런 듣보잡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동생 은우를 잃어버렸고, 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은성의 개인사 앞에서는 "쟨 왜 인생이 저렇게 기구해?"하며
투덜거리듯 그녀를 딱해한다.
그들이 은성을 완전히 내치는 순간은
성희로부터 은성이 할머니에게 고의적으로 접근했으며
은성이란 아이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않는
무서운 아이라는 모함을 듣고 난 뒤이다.
이들은 너무도 순수해서, 성희같은 지략가의 모략 앞에서
쉽게 넘어갔을 뿐, 뼛속부터 못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은성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얘기에
소름끼쳐 할 뿐이다.
영숙의 친구인 성희의 말을 굴러들어온 돌 은성의 말보다 믿는 건 당연하니까.
한편 승미는, 은성의 안타고니스트이지만 너무나 설득력 있는 악역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딱 하나이다. 선우환.
그녀는 그를 얻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지만
그러기 위해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의 패턴들은
우리가 흔히 트렌디 드마라들에서 보아왔던 무조건 나쁘고, 유치하고, 바닥까지 드러내는
그런 악역의 행동들이 아니다.
(그녀의 비음 섞인 굵은 목소리에도 끌리고 아직 정돈되지 않은 얼굴선도 사랑스럽다.
<바람의 화원>에서 봤을 때부터, 내가 김아중 이후 남몰래 끌려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엄마 백성희의 끝간 데 모르는 돈과 영달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엄마,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어"라면서.
그런데 그럴 때 백성희의 대응은
"그래, 내가 못된 년이다. 그렇지만, 너, 환이를 생각해봐라. 내 선택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어?"
라는 것이다.
그러면 승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성희가 만들어 놓은 이 악랄한 상황을
그저 눈물흘리며 받아들인다.
죽지 않은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사망보험금을 은성 몰래 다 가로챈것,
먼 지방 땅에 은성의 동생(은우)을 버린 것, 은성에겐 단 한푼도 나눠주지 않고 자기네만을 위한 돈을 감춰뒀다가 그럴듯한 아파트를 구해 사는 것...이런 성희의 행동들에 의해
은성은 끝간데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면 승미는 엄마의 대놓고 하는 악행 덕에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환과의 관계도 원하는 대로 지속할 수 있다.
그때문에 승미는 정작 엄마의 악행 앞에서 비난과 눈물을 일삼으면서도
결국은 엄마가 만들어 놓은 '비열한' 상황 속에 함몰되고 만다.
승미는 차츰 더 악해진다.
왜냐하면 환이 은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를 비난하면서도 엄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던 승미는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와 공조하여 은성을 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과 모함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동 뒤에도 그녀는 너무나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누가 승미를 욕할 수 있을까.
그녀의 악행은,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을 위해 일어난 것들이다.
우리들 모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선
그녀 정도의 거짓말과 모함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양심때문에 생각은 해도 실행은 못할테지만.)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가진 양심 수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녀를 보며 '저런 못된 년'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 드라마를 바라보면
그녀는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마음을 주지 않는 한 남자때문에 그녀가 겪는 가슴앓이.
그래서 그녀는 악역임에도 미움을 받기보단 안쓰럽다.
이러한 면들 때문에 이 드라마는 초반의 무리수들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이 있는 드라마로 인정받는다.
성희의 돈에 대한 욕망, 승미의 환에 대한 욕망,
세상 물정 모른 채 살던 부르조아 영숙과 정의 단순성은
악역들 어느 하나 무조건 미워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그야말로 '그럴 만 하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막장드라마'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뱀발)씨X새 주말 드라마는 <가문의 영광>에 이어서
계속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그리려 한다.
'진성설농탕'으로 나오는 '신선설농탕'이
실제로 그렇게 노숙자들, 독거노인 들에게 지속적인 자원봉사를 하고
혈족계승이 아닌 기업이념과 윤리에 따라 기업을 운영할 새로운 후계자를 양성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에 우리가 속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이 그랬듯
<찬란한 유산> 역시 기업과 재벌들을 '계몽'할 수 있다면 좋은 드라마이다.
이 두 드라마에서처럼 유산은 자식, 손자라서 물려주는 것이어선 안된다.
도덕성과 윤리가 기업이윤보다 우선시되는 기업, 재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에게 환원해야 한다.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이런 기업이 좋은 기업이라는 사실, 기업이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는
이 시대의 수많은 (실제/잠재)노동자들이 이러한 드라마들을 통해 모두 알아야 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평생 '사측'이 될 가능성이 없음에도 어려서부터 '진리'로 체화해 온 우리들은
이런 드라마를 통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쌍용자동차의 직원, 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그들의 투쟁이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