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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본 서유기 1
오승은 지음 / 동반인(맑은소리) / 1993년 12월
평점 :
품절
TV 만화만 해도 [손오공], [오로라 공주와 손오공], [날아라 슈퍼보드], [드래곤볼] 등 오공의 둔갑술 못지 않게 다양한 버전이 명멸한 바 있는 [서유기]의 번역출간 상황은 [삼국지]나 [수호지]에 비해 많이 열악하다. 위의 두 작품은 여러 번역본 중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가 망설여진다면, [서유기]는 도대체 원본을 제대로 번역한 것이 있기나 한지가 난감하다. 실상을 알고 보면 여느 중국 고전들 못지 않게 방대한 분량(2000쪽 내외)을 자랑하는 본작이 한국에서 제대로 번역된 적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적어도 현재 그런 판본을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신 다행히도 연변대학의 교수진이 합동으로 번역한 판본은 나와있다.
이 판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한국문화사에서 그대로 수입한 것(전4권)이고 또하나는 동반인 출판사에서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편집과 교열을 거쳐 펴낸 것(전6권)이다. 전자의 경우는 활자나 인쇄상태 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대략 우리의 60년대 출판물을 보는 듯하다. 반면 후자는 편집도 말끔하게 다시 했고, 특히 지금 남한의 것과 적잖이 다른 맞춤법, 표기법들도 수정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를 추천한다.
연변대학 교수진의 중국 고전 번역물은 이미 정평이 나있어서 아무 걱정 없이 선택할 수 있다. 그중 [삼국지]와 [수호지]는 청년사, [서유기]는 동반인, 그리고 [홍루몽]은 예하를 통해 90년대에 각각 간행되었다. 왜 이렇게 각각의 출판사를 통하게 되었는지는 속사정을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서유기]만큼은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이므로 일반독자로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더구나 이 동반인 출판사의 판본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도 맺은 것이라니 마음이 가볍다.
작품에 대해서는 다만 주워들은 이야기 하나만을 옮기고자 한다. [서유기]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그저 재미로 가볍게 읽는 이에게도 본작은 더없이 흥미진진한 판타지물이다. 기실 [서유기]야말로 동양 판타지 소설의 최고봉이 아니겠는가.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이에게 역시 본작은 그만큼의 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근대소설의 기반을 다지고 있을 무렵, 동양의 명나라에서는 바로 이 작품이 쓰여지고 있었음을 상기해가며 읽는 재미는 또 다르다.(비슷한 시대의 작품으로는 [금병매]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용 만화 소재로 각광받는 [서유기]를 [삼국지]같이 비장한 대하극과 함께 4대기서 혹은 6재자서로 꼽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역시 활극과 둔갑술 뒤에 슬그머니 깔아놓은 도저한 깊이일 것이다. 기본틀부터가 불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며, 중국 것이니만큼 당연히 유교와 도교도 섞여있다. 한 주역 전문가 교수에 의하면 저자가 주역에 통달했음을 요괴의 이름이나 지명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며, 여타 중국 고래의 신화와 전설들도 즐비하다.(각주를 참고하지 않고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가히 동양사상과 신화, 전설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서유기]의 진면목인 것이다.
더불어 그것이 지니고 있는 풍자문학적 성격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별다른 벼슬자리 없이 일생을 딸깍발이 선비로 살았다는 오승은은 그만큼 기층민중들의 정서에 가까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더구나 시대는 명나라 말엽, 부패한 왕조가 마지막 숨을 이어갈 당시였다. 결코 선비정신이니 군자의 풍모와는 연결지어 생각할 수 없는 손오공 등의 캐릭터는 이러한 당대의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반영웅을 고대하는 민중의 염원으로부터 탄생한 것일 터이다. 이 모든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판타지 모험극이라는 외양 속에 태연하게 감추고 있는 [서유기]야말로 기서(奇書) 중의 기서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중국/도교의 신화와 전설에 관련된 용어를 정리한 참고글 : 이곳을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