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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나를 부르는 숲'이란 책의 판매 부수가 높지 않다면 그것은 모두 책 표지의 뜬금없고 허술한 디자인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책 내용을 고려할 때 필자에게 '곰'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알겠으나 그래도 이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도감도 식물도감도 아닌 듯한 어정쩡한 저 디자인이라니... 차라리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지도-책 속에 나오는 조악했던 지도라도-를 표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고심하여 책 표지를 디자인한 분께는 더없이 죄송한 말씀이긴 하나 좋게 말하면 책 내용이 정말 최고였다는 말이니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그래도 아쉬운 맘에 한 마디 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이 제목으로 얼마나 많은 판매 부수를 갱신했는지 기억한다면 이 책의 디자인이나 제목도 좀더 참신하게 바꾸어 보기를 동아일보사에 권해보는 바이다. 내가 이 책을 보며 깔깔거릴 때마다 내 주변의 지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표지는 전혀 재미없을 것 같은데?" 물론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형식까지 만난다면 더아니 좋을쏘냐!)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란 한비야식 세계일주도 나름 흥미진진해 보이긴 하지만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소재로 한 이 책은 그야말로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 장엄함과 유쾌함, 엄숙함과 경박함, 광대무변함과 변화무쌍함을 모두 뭉뚱그린 이야기를 이 책은 들려주고 있다. 일명 종합선물세트라고나 할까?
초반에 등장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서도 온갖 볼행한 상상을 하며 떨고 있는 소심한 필자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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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실 숲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방울뱀, 물뱀, 독사, 살쾡이, 곰, 코요테, 늑대, 야생 멧돼지, 거기다가 거친 곡주를 너무 많이 마셔 약간 돈 산사람과 스컹크,너구리, 다람쥐, 무자비한 불개미, 흑파리,독이끼와 독참나무, 옻나무, 불도마뱀...... 그뿐만이 아니다. 양순할 것으로 아는 사슴들도 뇌에 기생충이 파고들어 정신이 돌 경우에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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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말로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모습인 동시에 코미디 그 자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했으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모든 상황을 떠올리는 그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에 쓰는지도 모르는 채 장비만은 최고급으로 구입하곤 하는 어수룩한 그의 모습-초보들이 늘 그렇듯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은 그의 여행 동반자인 카츠의 등장에서 시작된다. 이 장면만 보더라도 당신은 '빌 브라이슨'의 여행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지 기대가 마구마구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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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카츠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몸집이 훨씬 더 불어나 있었다. 과거에도 항상 큰 몸집이었지만, 지금은 매우 불편한 밤을 보내고 난 오슨 웰스를 연상시켰다. 조금 절뚝거리는데다가 20미터를 걸어온 사람치고는 너무 심하게 숨을 내쉬었다.
"여보게, 배고파."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 뒤 나보고 자신의 가방을 들게 했다. 너무 무거워 내 팔이 바닥으로 푹 처졌다.
"여기에 뭐가 들었니?"
헐떡거리면서 내가 물었다.
"아, 테이프 몇 개 하고 등산에 필요한 것들. 이 근처에 던킨 도넛 가게 없나?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이후로 아무것도 먹질 못했어."
"보스턴? 보스턴에서 온 거로구나."
"그래, 나는 한 시간 간격으로 뭔가를 먹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뭐라 부르지, 발작을 일으켜."
"발작이라고?"
이건 내가 그려본 재회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쓰러뜨려도 금방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원기왕성하게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뛰어다닐 줄 알았다.
"10년 전쯤 좀 상한 약을 먹고 난 뒤로 그래. 도넛 몇 개, 아무튼 뭔가를 먹으면 괜찮아져."
"이봐. 우리는 사흘 안에 산으로 들어가게 돼. 거기에는 도넛 가게가 없다고."
그는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다 생각을 해놨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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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스니커즈가 잔뜩 들어있는 그의 가방을 의기양양하게 가리키던 '카츠'의 천진난폭한 모습이라니! 배낭 여행은 정다웁던 친구 사이도, 달콤하기만 하던 연인 사이도 갈라놓는다고들 한다. 여행이란 짧은 단거리 경주와 다른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저런 친구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시도하다니... 나는 결코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카츠의 등장은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웃을 일 전혀 없는 요즘의 나에게 미소도 아닌 박장대소할 만한 일들만 가득 선사했다는 말이다. 카츠는 무거운 배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정말 중요한 물품을 산 속에 버리기도 하고, 늘 숨을 헐떡대며 뒤쳐지길 밥 먹듯 하며, 불평을 늘어놓는 데에도 선수이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은 늘 그와 함께였다. 뒤쳐진 카츠를 데리러 걸어온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피곤에 지쳐 기신기신 널부러진 카츠를 위해 대신 텐트를 쳐 주기도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던 빌 브라이슨도 분명 카츠와의 여행을 즐거워했음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그가 쓴 문장의 곳곳에 카츠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들이 메인주 마운틴 캐터딘을 보지 못하고 트레일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모습은 괜시리 나의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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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5
"집으로 돌아가고 싶니?"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응,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도 그래."
그래서 우리는 트레일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우리가 산사람인 것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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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을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다 지친 카츠가 집으로 가고 싶어 할 때 말없이 그의 뜻을 따라준 빌 브라이슨. 물론 그 역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카츠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비록 마운틴 캐터딘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걸었다. 혹한 속에서도, 돌풍 속에서도,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말이다. 그곳을 걸었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가야할 곳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까지 마운틴 캐터딘이 그들을 기다려 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은가!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글 가운데 운동을 위해 차를 모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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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4
그러나 여기에, 내가 말하려는 포인트가 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거의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간에 아무데도 걸어 다니려 하지 않는다. 500미터 떨어진 직장까지 차를 몰고 가는 사람을 알고 있다. 400미터 떨어진 대학 체육관에서 러닝 머신에 올라타기 위해 차를 몰고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없다고 심각하게 열을 내는 여자를 알고 있다.(그건 나도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에게, 차라리 체육관까지 걸어가서 러닝 머신을 5분 정도 덜 타는 게 어떠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내 말에 가시가 돋쳐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나서 "러닝 머신에는 내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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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우리가 다시 살펴봐야 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를 읽는 내내 등산화조차 없는 내가 자꾸만 트레일을 종주해보고 싶다는 망상을 하게 되었다. 곰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두려워하면서도, 빌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며 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픈 마음. 이것은 이 책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책은 정말 시시때때로 폭소를 자아낼 정도로 재미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느라 얼마나 눈물을 찔끔거렸던지 모른다.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곳은 부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산 속이나 대청마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