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를 즐기는 사람치고 책에 대한 욕심을 가져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요? 책이 좋아 책을 모으다 보니 내 책장에서 썪어가는 책이 아깝게만 느껴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과감히 책을 돌려 읽어도 보았지만 나처럼 내 책을 소중히 여겨주는 이가 별로 없더군요. 지인들이 와서 내 책장을 훑어보며 과감히 내 책을 뽑아 들 때에는 과장 조금 보태어 가슴이 섬뜩하기까지 하답니다. 소설 속의 애서가처럼 혼자만의 서재를 꾸며놓고 나의 보물을 감출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좁은 집을 탓하며 거실에 늘어져 있는 책을 안타깝게 바라만 봅니다. 거기다 호기로운 척, 내 책을 빌리고자 하는 지인에게 그러마 하고 빌려주기도 하지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책은 커피에 젖어 돌아오기도 하고, 접힌 곳이 여러 곳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흠집은 태연하게 여기기도 하고, 또는 다른 이의 손으로 간 책은 선물 준 셈 치고 포기하기도 한답니다. 행방불명 된 나의 책을 애타게 기다려 봐야 돌아오는 경우는 적더라구요.  그나마 다른 이 역시 내가 흥미로이 읽었던 책에 대해 찬사를 보낼 때면 괜히 타지에서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가운 맘이 가득이지요. 그런 마음을 얻고자 요즘에는 제 책을 나눠주는 일도 많고, 다른 이가 읽었던 책을 나눠 받기도 하지요.  

  이렇게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나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한한 생 속에서 내가 경험하기 힘든 것을 책을 통해 경험한다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지요.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랍니다. 그런 책 세계를 탐험하면서 나 역시 저런 책 한 권 정도 쓰고 싶다는 욕망, 차마 부끄러워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 욕망이 밑바탕이 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네요.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 중에 내 이름 석 자 적힌 책 한 권 꽂아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할까요. '순례자의 책'을 쓴 작가도 그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이네요. 글쓴이를 부러워하다 못해 시샘이 커져만 가네요. 하지만 그녀의 방대한 독서량은 참고문헌 뿐 아니라 그녀의 단편 곳곳에 드러나더군요. 국경을 초월한 책에 얽힌 이야기들. 지어낸 이야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현실을 잊게만 하는 그 이야기 속에 어제 종일을 허덕였네요.  

  책 표지 재료로 인피를 사용한 일, 이야기꾼을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방대한 서적을 개인 도서관으로 만든 이야기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곧 책이라는 이야기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더군요.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모자른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정작 글을 쓰라고 하면 열 장이 나오기가 힘들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책일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일이 아닐른지... 사람들의 삶에는 단순한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거기다 시작하는 이야기부터가 사람을 사로잡더군요.  

   
 

어쨌거나 저승은 그 모든 상상과는 조금치도 닮은 데가 없었다. 그건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기다란 주랑이 한없이 이어진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저승에서 할 일은 한 가지요. 책을 쓰는 거지, 자기에 대한 책, 일종의 자서전이랄까?  

 
   

  저승은 거대한 도서관이고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요. 거기다 주인공이 그곳에서 발견한 엄마의 책을 보고 느끼는 서글프고도 뭉클한 감정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도 알게 해 주는 짧은 문장들. 그래서 이 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책과 세계'라는 책에서 저자 '강유원'은 "행복한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다. 병든 자만이 책을 탐닉한다"와 비슷한 말을 한 듯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은희경의 책 제목도 있었는데... 행복한 사람은 그렇다면 무엇을 하는 걸까요?^^;)워낙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변색되고 나름 각색마저 되어 제 나름으로 변형되었을 테지만 여튼 제 기억에는 야생의 사자가 책을 읽는 것을 보았느냐면서 생활의 현장에서 부딪히고 살아가는 자는 그 자체를 즐기지만 머리만 쓰는 사람들은 책에 빠져 허우적댄다고 했던 걸로 기억이 되어 있네요. 여튼 그 비슷한 의미로 전 이해를 했지요. 상당히 짧은 책이었는데 저에겐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지요. '순례자의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그 책이 생각났습니다. 책을 비판하는 모든 자들, 책의 적으로 선정된 모든 이들 역시 책의 힘과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였다는 사실에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소설을 통해 글쓴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문을 탄압한 자도 있고, 독단적 신앙심 때문에 사상 최대의 도서관을 파괴한 자도 있습니다. 고발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죄를 물었습니다. 처음으로 나쁜 사례를 만든 죄, 책을 능멸한 죄, 가치를 알고도 부인한 죄, 타인의 정신을 짓밟은 죄.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책을 파괴했습니다. 책이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요. 당장 위협이 될 수도 있고 장차 위험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왜 책에서 위협을 느꼈을까요? 그건 이들 모두 책을 읽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책을 읽었고 책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책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책을 몰랐다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좀 어이없는 발상이긴 한데, 책이 문제의 근원 같아요. 

 
   

  역시 책을 통해 책을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결론은 책을 옹호하는 것이겠지요? 저 역시 동감입니다. 수년 전 전자책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인쇄된 책은 사라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했었죠. 컴퓨터 사용이 많아지면서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아졌구요. 그때에도 전 굳건히 인쇄물이 유지될 것이란 견해를 가졌습니다. 타당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책을 좋아하고,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는 종이로 보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지요. ^^ 인터넷을 떠돌다 보면 저같은 분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그래서 책은 꽤 오랜 역사를 가져온 만큼 앞으로도 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순례자의 책' 덕분에 책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해 보는 계기가 되어 좋았습니다. 책에 파묻힌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웃음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덕분에 정말로 오랜만에 서평이란 것도 끄적여 봅니다. 여러분도 이 책에 얼굴을 한 번 묻어보심이 어떨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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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3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인 2009-07-2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이나 문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수필가가 되어도 무방한 단아한 문체를 가지고 있군요.
오랜만에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감상했습니다. ~~

sokdagi 2009-07-23 12: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기분이 마구 좋아집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을 듯....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