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인생 - 개정판
성석제 지음 / 강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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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소설의 형식이라거나 생김새에 관해 가타부타 이야기할 생각을 없었다. 다만 소설이 관용의 폭이 아주 넓은 장르라는 것,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그 안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는 것은 말해두고 싶다“- 서문중  
   


성석제에 대한 첫 경험이다. 다른 소설을 읽지 못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해 가볍게(?) 시작해 볼 요량으로 선택한 책이다. 재미나는 인생. 뭔가 재미를 줄 것 같지 않은가? 누군가 ‘요즘 사는 재미가 뭐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웃지요’ 라고 할 것이다. 관조하는 인생이 나타난다고? 아니다 반쯤 포기한 삶이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다.


엊그제 고대학생 하나가 대자보를 쓰고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대자보를 읽어보니 마치 커다란 감옥에서 출소하는 사람의 느낌이다. 기대에 부푼 것이 아니라 매우 익숙하기만 했던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도 자신을 위해, 희망을 찾아서 떠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글이었다. (예슬양의 기사를 검색해보라)

글을 읽으면서 매우 우울해졌다. 마치 10여 년 전 10년을 넘게 죽을똥살똥 하며 들어갔던 대학을 나서면서 들었던 막막한 기분에 온몸을 흠뻑 담갔다가 꺼낸 듯 한 맛이 느껴졌다. 그땐 국가부도사태라는, 아이엠에프로 더 유명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사는 게 재미있는가. 재미나는 인생은 낙서 같은 인생을 나열한다. 손바닥 하나에 들어올 만한 짧은 글들을 모아 나간다. 연속성도 없고 개연성도 없다. 반짝 반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인생으로 유려한 문체로 펼쳐진다.


킥킥대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외국인이 아닌 국내작가의 글을 보면서 킥킥대면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아 시원하다’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왠지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즐거운 인생인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


다른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누구 추천 좀 해주오. 이 책도 다른 책도 다 읽은 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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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진안이라는 촌(村)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무엇’에 대한 거부감때문이었다. 회색 풍경의 답답함은 작은 것이고, 끝없는 경쟁에서 이기기가 싫고, 돈을 벌기위해서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나 내 물건을 과장해서 알리는 것도 극복하기 힘들었다. 거부감 해소를 위해 도시로부터 도망쳤다.




곧, 이곳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밥 먹고 외부와 소통하고 옷 입고 집짓기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어야 한다. 산으로 그득한 이곳에서 농업은(채취, 사냥을 포함) 판로의 한정성 때문에 경쟁을 낳는다. 그 판에 끼어들어 토박이와 경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 좀 치사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잘난체하듯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인가.


뭔가 다르리라고 기대하고 왔던 지금이 결국 도시에서 삶의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면 문제다. 중심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다. 혼자면 상관없다. 스스로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책임만 지면된다. 가족의 가장이 되면 달라진다. 특히 아이가 있다는 것은 본인밖에 모르던 인간의 삶에 변화를 요구한다. 사는 곳과 생각하는 것은 달라도 지금 사회의 분위기로는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다는 점에서는 같다.


몇 년이 지나면 아이가 학교에 가야하는데 그게 제일 걱정이다. 공교육중에서도 가장 뒤처진 곳으로 자타(?)에 인정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시골의 초중등학교다. 학부모들은 학교와 소통하길 부담스러워한다. 선생들은 인사고과를 위해 한번 들러서 지나가는 곳 정도로 인지하고 지금 교육과정을 개혁할 의지가 없다. 당연히 학부모들은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보낸다. 두셋만 남게 되고 선생도 학생도 힘이 나지 않는다.


학생없는 학교엔 지원도 되지 않아서 학교 운영은 더욱 힘들다. 게다가 등하교 거리는 너무 멀다. 매일 버스타고 삼십리거리를 통학해야 한다. 앞으로 잘못되어(인원이 더 줄면) 폐교와 통합으로 학교가 더 멀어질 수도 있다. 학원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곳엔 없다. 다니려면 30킬로 길을 차로 왕복해야 한다. 지금 이곳의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기껏 방학 때 친척집에 보내서 그곳에서 ‘수학’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그것도 여유 있는 집이나 가능한 일이다.


아이는 어리지만 고민이 갈등을 낳는다. 나 좋고 가족 좋자고 사는 촌에서 장점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자연과 더불어서 흙을 밟고 뛰어노는 아이. 다 좋다. 아토피 없고 스트레스 덜 받는 아이. 그래. 그런데 부모로서 나는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하지?


이곳에서 감히 경쟁도 되지 않는 도시의 문화와 교육시스템을 좆는다면 아이만 열패감에 잠기게 되는 것 아닐까. 집에서 기를까? 어차피 공교육은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처는 집에서 아이를 마냥 놀리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사회성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고 부모밑에서 아이를 외롭게 만들 가능성도 크다는 판단이다. 그럼 방법은 별로 없다. 얼마 되지 않지만 동네의 또래 아이들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동네 안에 있는 폐교가 너무 아쉬웠다.


고민과 갈등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해답으로 향한 길은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얼마 전 직업 교육으로 숲해설가 소양교육과정에서 듣게 된 ‘숲유치원’이나를 흔들었다. 독일과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시작하여 미국과 일본으로 퍼진 취학 전 아동 교육시스템(좀 거창하게 말하면)의 하나이다.


한국은 초기단계이고 경기도, 인천, 강원도 일대 몇 곳에서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산림청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시의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와서 숲속에서 어울려 놀게 하는 것이다. 숲에서 아이를 놀리는 것. 독일과 스위스를 견학하고 돌아온 강사의 자료를 통해서 사진과 영상을 접했지만 그저 아이들을 모아서 ‘놀리는 것’외에 특별한 것을 볼 수 없었다.(물론 정교사와 보조교사가 옆에서 진행을 돕고 관찰한다.) 인터뷰하는 부모들은 모두 만족스러워 했고 아이들의 낙엽과 흙투성이가 된 옷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그곳 아이들은 자연과 어울려 놀면서 배운다. 나무를 오르고 내리면서 인간이 쓸 수 있는 근육과 균형감각을 배우고, 흙에서 뒹굴면서 흙에 사는 곤충과 나뭇잎, 풀들과 만난다. 쓰러진 나무줄기를 평균대삼아서 줄지어 걷는 모습이나 나무위에서 가지사이에 엉덩이를 끼고 앉아서 친구들을 향해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한국의 아이들이 불쌍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맞벌이 가족의 경우 놀이방에 보내는데 그곳에서도 자유롭게 노는 것이 아니라 언어, 수학, 외국어 교육을 받는 것이 일과에 있다. 4세부터 시작되는 선행학습은 6세가 되면 악기와 태권도, 스포츠로 확대되며 그 즈음엔 거의 어른과 거의 같은 시간의 일과를 소화해야 한다.(아동학대가 다른게 아니다) 결국 이런 흐름의 교육을 통해서 주어지는 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를 이끄는 이들이 모인 곳(국회, 행정부, 대통령 등을 상상하면 된다)과 그리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우리 미래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암울하기 짝이 없다.


얼마전 서울의 친구들과 모임에서 숲유치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서울에 사는, 영유아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은 관심을 보였다. 서울 근교라면 얼마든지 보낼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을 와 본적이 있던 한 친구는 주말을 이용한다면 지금 내가 사는 곳까지도 데려오겠다고 했다. 나는 올해 잘 궁리해서 모둠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내 자식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좀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숲유치원’은 자연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다는 믿음이 기본이다. 영어, 수학을 미리 배우는 것 보다 놀이를 통해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신체적, 정신적 수양을 하게 하려는 것이 우선한다. 오히려 공부를 시킨 아이들보다 학업성취도도 높다는 국내외 학계의 연구결과도 있다. 무엇보다도 애들은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른들의 간섭 없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것이 아이를 가진 부모의 소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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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거절할 수 없다 - 직장인을 위한 책장의 철학
츠지야 켄지 지음, 이성현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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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가 넘치는 사람을 보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똑같은 현상을 관찰하더라도 그이의 묘사와 서사는 뭔가 몸속 깊은 곳에서 베어 나오는 듯한 인상을 줄만큼, ‘푸핫‘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얼마 전 고인이 된 배삼룡씨는 어눌한 말투와 행동이 그리는, 독특하면서도 명료함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몇 년 전에 폐암으로 죽은 이주일 씨의 경우는 그가 몸을 흔들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비록 그를 생전 처음 본 사람이라도 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살아서 영화 만드는 데에 정신을 쏟고 있는 심형래씨는 과거 십여년이상을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존재했고 존경하는 사람에도 당당히 1위에 오르곤 했던 ‘웃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며 눈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근육의 실룩임을 보고 있노라면, 뭘 먹고 있거나 싸고 있는 경우엔 하여튼 조심해야 한다. 그만큼 웃기는 사람이다.


웃음은 무미건조하고 팍팍한 세상살이의 목마름을 지워줄 물과 같다. 풍자와 해학은 고래로 있어왔던 ‘놀이’이고 이에 재주가 있는 이들이 두드러져 인기가 많았다. 말이나 행동으로 보이지 못해도 글로서 웃음을 주는 이들도 꽤 있다. 글쟁이들은 등장인물을 통하거나 비현실적 배경을 보여주거나 또는 노골적으로 세태를 비틀어 꼬집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 신문의 총수나 기자, 독자들도 글쓰기 영역에서 많은이들을 웃기는데에 동참하고 있다.


책한권을 읽으면서 이렇게 비식비식 웃기는 처음이다. 이건 머릿속에 형체나 인물을 그리거나 상황의 모호함등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웃음이 아니다. 그저 읽으면서 문장이 주는 우스움, 경험해 보지 못한 엉뚱함이 주는 비식거림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인류가 태초부터 가방을 만들었다는 것과 최초로 만든 가방이 여자의 핸드백이었음은 분명하다. 중략. 다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자의 지갑이었다. 왜냐하면 핸드백안에 넣을 물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핸드백 안에 무엇을 넣는지도 남자에게는 수수께끼이지만, 화장품과 지갑이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에 화장품은 석회, 오징어먹물, 우동가루 등으로 괜찮았어도 지갑만큼은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략. 다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행가방이다. 이것은 이동할 때 일상용품이나 기저귀 등을 넣어서 남자가 운반하는 가방으로, 인류 최초의 실용적인 가방이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이런 식이다. 국립대 철학과 교수라는 사람이 가볍기 그지 없는, 마치 농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듯한 인물을 등장시켜서(분신) 한없이 주변을 희화하하고 상황의 엉뚱함을 창조해낸다. 대부분 글의 소재는 그가 생활하는 학교나 집주변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주 등장하는 그의 조교와 부인은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에피소드에 녹아들면 영낙없이 특별한 캐릭터로 재탄생 하는 것이다.


비실비실 웃다보면 책장이 다 넘어가 있다는. 이 책의 서문은 무척 참신하고 획기적이어서 아마 읽다가 책을 집어던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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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훈 선생의 꿈꾸는 국어 수업 - 고딩들의 저자 인터뷰 도전기
송승훈 엮고 씀 / 양철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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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즐겨 읽는다. 책읽기는 외로움을 덜어주며 나를 몰두하게 만들어서 다른 온갖 잡념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책읽기의 장점은 경험해본 이들만 공유할 수 있다. 그 행복한 경험을 누구에게나 아무런 사심 없이(?) 추천하고 싶어진다.  

 

성격, 품성 등의 선천적인 면이 글 읽기를 가로막는 경우에도 우연한 후천적인 경험으로도 독서에 푹 빠지는 일은 흔하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길고긴 학생시절, 교과서와 참고서만으로도 지긋지긋했다. 당장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드는 경우를 제외하고 책을 깊이 있게 읽는 일은 드물었다. 세상에 나가 인생의 고난과 방황, 역경의 시기에서 만난 몇 권의 책이 나에게 보이지 않던 길을 보여주어 인도하는 역할을 했고 나는 기꺼이 그 길로 따르리라고 마음먹었다. 읽으면서 자주 만나는 저자의 삶이 궁금했고 그의 지식세계에 감탄하고 때론 질투가 났다.




욕심을 가지면 책의 저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 일년에 책 한권보지 않는 이들이라도 유명한 책의 저자를 만나는 일은 설렌다. 티브이를 통해서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을 만나는 일처럼. “나 누구 만났어.”라고 시작해서 듣는 이의 궁금함을 한방에 사그라지게 만드는“그냥 만났다구”로 끝나더라도 본인은 그 만남 자체에 깊은 감흥을 간직하게 된다. 어른보다는 어린이가, 어린이 보다는 청소년 시기의 학생들이 더 깊은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명인에 그렇게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인생을 던지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죽었다. 뉴스와 인터넷을 누비는 옷 벗은 중학생, 케첩과 달걀범벅의 찢어진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담긴 동영상은 거꾸로 그들이 속한 학교와 그들의 존재가 단지 ‘억압’속에 있었다는 증거다. 선생과 제자는 악수하거나 포옹하고 부모는 눈물 흘리는 졸업식을 볼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학교가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돈이라는 신이 지배하는 망가진 세상, 그 안에서 특히 약자인 학생이라는 신분은 정신을 놓지 않으면(군대든 학교든 정신 줄을 놓으면 무척 편해진다) 견디기 힘든 경쟁의 큰 틀 속에 자신의 위치가 성인이 되기도 정해지는 계급사회의 표본이다. 학교에서 소모되고 꿈 없이(좋은 대학 가는 것은 꿈이 될 수 없다) 학원에서 써버리고 남는 것 없는 껍데기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희망은 있을까.




아직, 교육은 살아있다. 일부지역의 교육감, 몇 학교의 교장과 선생, 학부모들이 손을 잡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흔히 ‘대안’이라고 불리는 교육의 틀 속에서 아이들은 감성을 회복하고 자아, 자존감을 쌓는다. 책의 저자인 송승훈 선생도 그 중 하나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미래를 꿈꿀까. 자신을 찾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될까 하는 고민에 충실한 선생 본연의 자세를 위해 본인을 가다듬는다.




애들아, 독서와 서평쓰기는 시작이다. 이제 저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다. 두 달간의 프로젝트는 5명의 모둠이 한 책을 선정하고 그 책의 서평을 쓰고 저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리고 그 모든 내용들을 정리해서 글로 남기는 것이다.  

 

기본은 이렇다.  

책을 선정하고 (서평이 쉬울 것 같은 책에 몰리므로 각 모둠의 대표가 나와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지는 쪽이 책을 고른다)그 책을 조원이 모두 읽고 서평을 각자 쓴다. 서평을 모아서 저자에게 전달하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날짜와 시간이 정해지면 모두 모여서 약속장소로 이동하고 만나는 분께 고마움을 표시할 만한 선물을 준비한다. 이야기 꺼리는 미리 준비하고 부담이 될만한 내용은 피한다. 대화의 과정과 진행과정을 사진 촬영한다. 만나고 돌아와서 보고서를 쓴다.

각 역할은 분담하는데 모둠의 모두의 고른 참여를 위한 것이다. 기획, 외교, 사진, 질문, 보고서의 각 역할을 한명씩 맡아서 진행한다.




이 책을 읽으며 행복해진다. 아이들의 보고서는 서투르다. 선택하기에 길들어진,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툰 시골(?) 고등학교 학생들의 글이다. 반면, 그 간 읽어온 딱딱하고 잘 짜여진 문장들을 보다가 조금 엉성하고 순박하게 느껴지는 학생들의 솔직한 글을 읽으니 익숙하게 짜여진 구조와 단어를 조합해서 글을 쓰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솔직함보다 겉멋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반성의 시간이었다. 깊지 않은 반성이 좋은 글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행평가’만 아니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도전(대부분의 아이들이 보고서 서두에 밝히고 있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은 아이들이 기꺼이 해내었다. 만화가 박재동, 건축가, 이일훈, 여성학자 이총각, 페미니스트 정희진, 역사학자 최상천 등의 저자와 만나고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거나 먼 거리여서 학생들이 만나기 힘들 경우엔 관련운동단체, NGO등을 연락해서 가능한 ‘선배’를 만나는 데에 성공했다.  

 

기껏 한번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통방법(메일 쓰기, 전화통화 하기)의 경험을 쌓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홍보도 하게 된다. 질문지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책의 내용을 곱씹게 되며 삶과 지식의 연관성에 대한 경험은 그 나이 입시생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일이 될 것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인간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색다른 경험인가. ‘저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구나. 그래 내가 풀지 못한 해답이 저것이겠구나. 역시 책을 많이 읽어야 해. 나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저렇게 사람을 크게 만드는 구나.’ 등의 감상이 주어진 ‘문제풀이’에만 몰두하는 대학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는 인생을 좌우하게 될 자산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 교육에 관한 고민을 안고 사는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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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지능 - 미래 경제를 지배할 녹색 마인드
대니얼 골먼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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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과 ‘생태’가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강조하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물건도 마찬가지다.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생태와 녹색으로 가득찬 회색하늘 아래 본연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저 ‘상술’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어 봐야 소용없다. 그들은 단어의 본래 의미와 가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빌어서 큰 효과를 바랄 뿐이다.




‘생태’(혹은 녹색)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인 녹색사업이 ‘4대강’인 것을 보면 과연 한 단어가 가진 뜻의 넓이는 얼마일까 한탄하게 된다. 팔당의 대규모 친환경 유기농단지를 밀어서 아스콘포장의 자전거도로를 만든다는 발상은 그들과 소통하기위해 어휘 이해의 수준을 따지기보다 정신병자나 미숙아와 대화 및 설득하는 법을 연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하긴 제정신이 아닌 권력을 낳게 도운 것은 돈 좀 더 벌게 해달라는 얄팍한 기대로 투표했던 ‘우리’아니던가.




지구가 인간을 버릴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종교이야기가 아니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회의를 가지는 것도 ‘환경’이 가진 의미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산화탄소를 줄이고 오염물질 배출을 낮추고 에너지사용을 줄이며 재생이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고 지역의 먹거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의 일들이 모두 인간이 대대손손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위에서 언급한 생태적 행위들은 지구가 ‘나쁘게 변하는’ 속도를 늦춰줄 뿐이며 다시 옛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하면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부의 생각이다. 다른 이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물론 인간의 어떠한 개입도 없는 자연 상태여야 함)이 회복과 치유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 가치를 가지고 접근할 여유가 별로 없단다. 어떻게 해야 인간들이 움직일까. ‘에코지능’은 경제적 동물인 인간에게 어떻게 해야 생태를 불어 넣을까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생태를 철학적, 현학적 관점에서 일반에 접근하는 이들에게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고 외친다. 녹색 마인드가 미래경제를 지배한다. 문제는 어떻게? 기업도 생태적인 직관력이 있어야 경영에 성공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웹, 스마트 폰을 통해서 소통하는 현대시민들은 변화를 빠르게 시장을 주도한다.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하는 데에는 변수가 많다. 일단 상품의 질과 가격이 중요하다. 같은 제품의 성능이 같거나 비슷하다면 가격이 싼 제품으로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변수는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N상표의 운동화를 이웃의 딸같은 6살짜리 아이가 환기도 안 되는 열악한 작업장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바느질해서 만든 것이라면?  

 

온 식구가 즐겨먹는 M햄의 포장재질이 일정성분이 햄의 표면에 녹아서 스며드는데 그것이 축적된다면 심각한 신경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서가 발표된다면? 여성의 피부에 더없이 좋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파는 B화장품의 몇몇 성분들은 전혀 검증을 거치지 않은 독극물이라는 실험결과가 나온다면? 매일 마시는 유기농커피의 원산지가 포장지에 나와 있는 컬럼비아산이 아니라 중국의 한 공장이 확인 가능한 중계지여서 정확한 원산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현재의 공산품들은 대부분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는 충분히 개선될 수 있음에도 나아지지 못한다. 이유는 관심의 부족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정보를 찾는다면 정보를 충족해줄만한 기관이나 사이트가 생길 것이고 이를 통해서 정보가 공개되면 자연스러운 소비자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기업을 변화시킬 것이고 기업이 변화되면 국가기관도 변화를 피하기 힘들다.

의심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먹는 것마다 신경을 써야 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입으로 가져가는 아기를 위해서 장난감도 꼼꼼하게 성분을 살펴야 하고, 바르는 화장품과 샴푸는 장기적으로 내 피부에, 몸속에 어떻게 축적되어 공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모르고 당하지 않겠다는 일부와 어차피 살다죽는 인생 편안하게 살겠다는 집단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알 수 없게 만든 현재의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재무정보가 공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품의 생산과정과 원료의 생산지, 가공방법과 성분이 가지고 있는 화학적 생물학적 물성이 모두 깨끗하게 공개가 된다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현명한 소비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갈지 충분히 기대해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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