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임팩트 맨 -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남기 1년 프로젝트
콜린 베번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하우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지구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 종(種)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종을 파괴하고 상생의 원리를 배반하는 문명의 이기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자연을 생각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 지금껏 물질의 풍요를 독점하고 소비를 최고의 미덕으로 하는 시스템 속에 살면서 주변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편리, 안전, 풍요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덕분에 놀랄만한 수준의 문명을 단기간에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 높다란 빌딩과 첨단의 기계와 장비들이 문명을 밝히고 있다면 파괴되는 산림, 녹아내리는 빙하, 대양의 가운데에 섬처럼 떠있는 쓰레기 더미, 속살이 드러난 산과 땅, 산성비로 죽어가는 물고기와 곤충들, 먹이가 없어 굶어죽는 북극곰, 사냥감을 잃고 부랑인으로 전락해버린 토착주민들도 있는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문명이고 발전이 있으면 생기는 작은 부작용이며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풍요의 반작용이다. 도롱뇽을 생각하고 단양쑥부쟁이를 보호하고 강에 사는 물고기의 목숨을 걱정한다는 의견은 개발이 펼쳐놓은 화려함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기껏 그 까짓것들 때문에 우리가 이 좋은 것(토목개발)을 포기해야 합니까” 라는 정치인은 분명 환경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지만 대중의 심성은 잘 파악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같이 사는’ 지구의 재앙을 막아야 한다. 급속한 지구 온난화는 내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도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이미 조짐이 시작됐다)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기후변화 협약도 시급한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 같이 노력해서 지구가 재앙의 화신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살기 위해 필수적인 행동이라는 이야기다.




행동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국가의 정책으로 지원하고 시민들의 의식이 뒤따라서 생활로 실천하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 인식의 차이, 우선과제 설정의 문제들로 환경은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다.




‘노임팩트 맨(No Impact Man)’은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실천역량을 보여준다. 한 가정이 과연 어디까지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는지(No Impact)를 실험한다. 1년간의 ‘노임팩트’ 프로젝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친환경적으로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기업의 광고는 넘쳐서 친환경이라고 붙이면 소비자인 내가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일회 용기를 쓰지 않는 것과 세제와 물을 써서 사기그릇을 닦아 내는 것과 어떤 행위가 더 ‘비환경적’인지를 알기 힘들고 고연비의 자동차를 타는 것과 전기자동차를 타는 것과 원료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 비용,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되어있지않다.(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도시 중의 도시 뉴욕에서 사는 한 가족의 환경을 위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가 문제다. 당장 일어나서 코를 풀려고 키친타올을 쓰는 것부터, 아기의 종이 기저귀를 사용하는 문제가 환경을 생각하는 저자의 가슴을 억누른다. 매년 두 번씩 방문하는 친가, 외가 방문의 기회도 한번으로 줄이게 되고 가족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숭고한 실천’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테이크 아웃’에 가서도 1회용 용기를 쓸 수 없으니 직접 가져간 유리병이나 그릇에 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1년 동안 단골가계에서는 익숙해지지만 처음당하는 점원은 자신을 더 귀찮게 만드는 손님에게 적의를 드러낼지 모른다.




두꺼비집의 스위치를 내린다. 집안은 암흑과 고요 속에 휩싸인다.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잠깐이다. 밤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씻지도 일하지도 못하고 티브이와 컴퓨터도 그냥 장식품이거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음식은 쉽게 썩어서 버리기 일쑤고 빨래는 100% 손과 재생비누로 이루어진다. 데우기와 굽기, 데치기 등은 모두 가스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소똥을 이용한 메탄가스로. 태양광을 이용하면 좋지만 아파트에서는 제약이 많다.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자전거를 프로선수처럼 타야 웬만큼 쓸 수 있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티브이를 보지 않으니 아이와 같이 노는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났고 부부간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서 해가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능력(?)이 생긴다.




공기오염의 주범인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걸으면 된다. 걷는 것의 좋은 점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귀찮고 힘들어서 실행을 안 할 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기. 걷기 힘든 거리는 자전거를 탄다. 차로만 갈수 있는 먼 곳은 과감하게 포기한다. 모임을 줄이고 집에서 가족과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노임팩트맨은 인간이 문명 안에서 문명을 이용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자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살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을 직접요리해서 먹으며 환경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관심과 작은 노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새것을 사지 않고 쓰다가 버려지는 수많은 것에 대한 애정이 지구를 쓰레기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다. 없어서 물려받는 것이 궁상이 아니라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고귀한 행위인 것이다.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면 행동은 어렵다.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지속가능한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먼 미래에 닥친 재앙에 대비하는 ‘생존기술’이 될지도 모른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갈 방법이 있음을 보여줄 선지자가 될 거 같다.




실천을 위한 상세한 정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1년간 실천해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당장 하나씩 실천하리라 마음먹는다. “새 물건 사지 않기” 이것부터다. 내년엔 티브이를 떼어내고, 동네에서는 자전거로 이동하고, 3년 뒤엔 전기스위치를 내리는 날을 기대해 보겠다. 앗, 어떡하지. 마나님께 허락도 안받고 이런 공약을 하다니. 우선 설득과 토론이 일차과제다. 혼자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당장 시행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합의하에 천천히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만은 가득해도 그것을 일시에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 끼리끼리 모여서 정책이 어떠니 학교의 선생님이 어떠니 해본다. 결국은 어느 학원이 좋으니 강사가 어느 대학 출신에 경력이 어떻다니 하는데로 흐르기 마련이다. 사실 학교 다닐 때 일찍부터 경쟁에 우위에 서면 좋은 대학을 갈 여건은 되는 셈이다. 대학입학을 위해.




현실은 대학이 제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대학을 가게 되면 더 크고 웅장한 질주의 ‘트랙’이 기다린다. 옆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채찍질 한다. 더 이상 학교 내에서 경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의 경쟁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다. 학점, 토익점수, 봉사활동, 영어연수 등의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자리싸움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믿는것만이 그들의 최선이다.




돌아보지 말고 질주하라. 최후엔? 장렬히 전사하라.




청년실업 43 만 명. 취업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고 대부분이 백수가 되는 요즈음. 몸부림은 더욱 심해지고 대학은 자못 심각한척 할뿐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결국 유치원때 배우는 영어조차 취업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벗어날 수 없다. “전국 900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88만원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 결국 혜택 받는 몇 천 명만이 취업이라는 시대의 특권을 누릴 기회를 가진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사회로부터의 차가운 시선 속에 놓이게 된다.




김예슬은 ‘경쟁의 탑’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이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영혼이라도 내어줄것이다. 그 탐나는 ‘계급장’을 선선히 떼어버리겠다고 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곧 그녀의 진의가 널리 퍼졌고 어른들과 일부의 학생들은 이 땅의 교육시스템을 다시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작은 균열이 불러올 파급효과를 기대하며 ‘자격증 장사 브로커’로 전락한 대학에 몸담는 일은 자신의 인생에 더 이상 의미로 남기 힘들다고 했다. ‘상품으로 선택당하지’ 않고 ‘인간의 길’을 걷기 위해서라고 했다.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저항하는 것이 젊음’이라고 하지만 홀로 감당해야 할 고통과 관계를 맺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번뇌가 얼마나 클 것인가. 나는 그 때 그렇게 깨달음을 가지는 것조차 버거웠겠지만 설사 그런 깨달음이 가슴에서 울려온다고 해도 현실의 두려움을 약삭빠르게 계산하는 머리에서 막았을 것이다. 위대한 성의 쪽문으로 소리 없이 떠나는 것과 감히 굳건하고 공고한 벽을 향해 짱돌을 날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는 기억되어야 한다. 사회전체가 ‘내 자식만이라도’ 라는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과 더럽고 추한 시스템인줄 알고 비판은 하면서도 그 테두리를 정작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움’을 원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요즈음의 교육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바뀌게 될 것이다. 이미 “균열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사회적시각과 진보라 자칭하는 모둠들의 래디컬(Radical-책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자세로 쓰임)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관점을 보고 ‘낭만주의’라 비난하는 일부 진보세력도 있긴 하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맨몸으로 누구도 해내지 못한 실천을 통해 이 사회전체를 단 일분이라도 환기시킬 수 있었다면 그 ‘운동’은 계속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이 소리 없는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이고 마침내 작은 짱돌들이 모여 굳고 단단한 성벽을 허무는 날도 올 것이라 기대한다.




나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자라날 후배들을 위한 ‘좋은 대학’을 꿈꾼다. 입학시험도 없고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는, 세계 곳곳의 마을과 삶의 현장이 캠퍼스인, 야생자연을 탐험하고 자신의 몸에 귀기울이고 우정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호미와 삽을 들고 생명농사를 짓고 도구를 스스로 만드는 대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주주의(democracy)는 민중(demos)과 통치(kratos)의 합성어이다. 주민이 주인이 된 자치. 지금 민주주의는 대의제로 운영되어 정착되었다. 선거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지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다. 그럼 그가 여러 사람을 대신해 입안하고 행정한다. 잘 되고 있는가.




지금 민주주의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냥 ‘좋은 의미’에 취해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투표한번 하고 그것으로 민주국가에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못하다면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시스템에 있는 것인가. 올바른 민주주의로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민중이 주도적으로 개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사실 일반인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정치가들의 몫, 행정가들의 몫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십만, 수천만 명을 대변하는 일인을 주기적으로 재선출하거나 재신임하는 행위가 이 땅의 민주주의의 정착과 발전에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을까.




   
  “훌륭한 통치는 통치하길 욕망하지 않는 평등한 자들의 통치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통치하기 위한 사회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통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통치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통치는 결국 자신이 이 통치 불가능한 것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다니엘 벤사이드의 글 중  
   

 




과연 통치하길 욕망하지 않는 자들이 통치하는 시대가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불가능위에 놓인 민주주의’가 아닐까.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별로 실현 가능한 대안이 나오기는 힘들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민중은 개혁을 주도해왔고 그럴 때마다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설사 그것이 1000년의 역사 속에서도 어떤 일정 부분의 관계나, 계급, 의식을 바꾸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민중의 삶과 저변에 깔린 밑바탕을 서서히 높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민주주의)은 인민의 통치가 실행되기 위해서 어떤 권력을 나눠야 하는지, 이 통치가 어떻게 조직 되어야 하는지, 어떤 제도나 보충조건에 의해 그것이 수립되고 확보되어야 하는지 상술하지 않는다. -중략-

첫째, 기업권력이 인민의 정치적 지배라는 약속과 실천을 침식시켰으며, 이 과정은 이제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가령 학교, 군대, 감옥에 이르기까지 국가기능이 광범위하게 아웃소싱 되고, 투자은행가와 CEO가 장관이나 각종 정부위원회의 수장이 되며, 국가가 금융자본의 상당지분을 은밀하게 소유하고 있다.

둘째, 민주주의의 (피상적이긴 해도) 가장 중요한 아이콘인 ‘자유’선거는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스펙터클에서부터 표적 유권자 ‘동원’에 이르기까지 마케팅과 경영의 서커스가 되고 있다.

셋째, 신자유주의는 입헌주의, 법 앞의 평등, 정치적·시민적 자유, 정치적 자율성과 보편주의적 포함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비용/수익 비율, 능률, 수익성, 효율성 같은 시장의 기준으로 대체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 웬디 브라운의 글 중

 
   




정치도 마케팅화되고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정치인들의 언행에 심드렁한 대중들이 대부분이다. 사글세에 끼니는 거르는 ‘천민’의 의식까지 침투한 신자유주의가 기업이 국가를 경영에 간섭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선거는 신성한(?) 민주시민의 축제가 아니라 야합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진흙탕 싸움처럼 되어 버렸다.




   
  데모스의 권력은 주민 전체의 권력도, 다수의 권력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나의 권력이다. 아무나는 지배받는 자의 명칭이자 지배하는 자의 명칭이다.―크리스틴 로스의 글 중

 
   




글을 읽고 민주적 삶을 포기하는 것은 이르다. 지나친 번역 투의 문장과 학술적 전문어들이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은 도발적 제목에 맞는 각 석학들의 의견들을 요약하여 충실하게 담고 있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경제선진국들에서만 ‘유행’할 수 있는지 지적한 바 있다. 만일 개발도상국이 “성급하게 민주화된다”면 그 결과는 경제적 파국과 정치적 전제로 귀결되는 포퓰리즘이 될 것이고, 그러니 오늘날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제3세계 국가들(대만, 한국, 칠레)이 권위주의 지배 이후에야 완전한 민주주의를 채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슬라예보 지젝의 글 중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박이 쉽지는 않지만 꼭 민주주의와 경제번영이 비례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경제지표수준은 낮더라도 훨씬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민주주의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의심하라. 진보는 의심하고 사유하는 자들이 손잡고 이루는 것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아는 것은 메인스트림의 가공한 삶이다. 잡지, 티브이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인들의 삶은 동경 혹은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인기를 먹고 사는 동물인지라 쉬이 자신의 속은 내비치지 않는다. 그들이 겪는 실재와 현실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인간들뿐이다.

우린 그들의 단면만 보고 평가한다. 이름만 등장하면 터져나오는 단어들은 정작 그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우리가 접해온 지식들의 단면이 너무 조각이 나 있기 때문이다.




내 남편, 처의 속도 모르는데 수천리 떨어져 사는 이들의 삶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삶은 누구나의 것이라서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는것이다.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기 위한 장치가 남의 삶을 엿보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것에 충실한 역할을 수행한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 젊고 싱싱한 육신을 가진 아직 살날이 창창한 인간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들은 때로 사진사이고 패션디자이너이며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이다. 어때, 뽀대나지? 이런 직업들은 아직 푸릇푸릇한 영혼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자 미래의 자신의 아바타로 손색이 없다.




현실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돈이 중심 현세에서는 직업이 가진 ‘뽀대’와 자신의 ‘가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저 밥벌어 먹고 살만큼이면 된다는 거.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행복해보인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후회는 별로 없고 자신감은 충만해있으며 미래에 대해 ‘투자’의 개념보다는 꿈을 꾸는 인간으로서 자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인테리어 잡지 에디터, 웹툰 그림쟁이, 뮤지션, 여행작가,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시인 까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전문가들의 삶을 인터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맛깔나게 색을 칠하는 글쟁이. 또 하나의 삶. 지은이의 능력이 드러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보고 나쁜 놈들이래!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1
작은책 편집부 엮음 / 작은책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당신은 노동자 입니까. 
 

 


노동자가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일을 하는 사람은 노동자입니다. 근로기준법에 근로자의 정의는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로 되어 있습니다.

월급을 받는 사장도 은행에 다니고 있어도,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도, 대기업에 다니는 사무원도,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이거나 비행기를 운전하는 기장도 신문사의 기자도 방송사의 피디도 모두 ‘노동자’입니다.




다 같은 노동자의 처지이니(재벌 총수님들을 제외하고) ‘우리’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이 한마디와 손끝으로 회사를 움직이고, 일과 사랑을 담뿍 담은 일상을 보내는 것이 진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남들을 위한답시고 자신의 공명을 위해 불법과 탈세를 일삼는 자들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남을 감찰해야 할 직업임에도 유흥과 향락을 특정인에게 정기적으로 제공받는 자들도 포함시키지 말까요.




여기 이 책에 조선소용접공, 택배기사, 농부, 자동차 브레이크 ‘라인’, 배송기사, 핸드폰 조립라인, 미싱사, 일용잡부, 목수, 중공업생산직, 의류회사 직원, 구두수선공, 은행원 등과 그의 아내들이 쓴 글들이 모였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오던 작은책(에서 모은 글들 중(1995~1999) 좋은 글들을 모아 한권에 담았다고 합니다.




무슨 노동자가 글을 쓰냐고 할 겁니다. 기계다루고 연장만지고 물건 들어 나르는 것이 일인 사람들이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고 빠듯해서 무슨 글을 쓰느냐고 할 겁니다. 그럴 겁니다.  이거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할 때 쓰는 것’이 글이랍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이야기, 동생, 이웃,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내가 당했던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일을 직접 당하게 되면 당황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재해를 당하거나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답니다.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허리가 삐끗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느닷없이 백혈병에 걸려서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아야 하기도 합니다. 우린 이런 사실들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서로 같은 경험을 하거나, 혹은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도 내가 언젠가 당할 수도 있음에 대한 본보기로 삼고 싶습니다. 여전히 사회는 개인의 어려움은 돌보아주지 않을 자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복불복’인가요.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는 제도. 그래서 이렇게 책으로 남기고 널리 읽히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왜 쓰는가? 한마디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그 소중한 삶의 세계, 마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 삶을 지키고, ‘말’을 지키고, 겨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글도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방안에 앉아 밤낮 글만 쓰고 있는 삶이 쓴 글이 무엇을 얘기하고 무엇을 보여주겠는가? -이오덕 아동문학가, 1995년 5월 중

 
   

 




조금 과격하게(?) 쓰신 것 같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무경험의 글은 껍질이 가볍습니다. 살짝 들어내도 알맹이가 없는 속이 없는 글로 사람들의 진심을 열게 만들기는 불가능합니다. 다소 서투르고 형식이 어긋나고 철자가 틀리더라도 진심을 순수하게 담은 글이라면 여럿을 울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옆에 있는 이들, 가족들이 쓴 글은 가슴을 짠하게 만듭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것이 죄는 아닐 것인데. 가장의 어깨는 더 무겁습니다. 손을 뻗고 몸부림을 쳐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원망합니다.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돈을 벌고 남보다 월등하게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을 개인의 역량으로 치부해버리면 나머지들은 아무것도 되질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전체의 능력이 조금씩 나아질 수는 있지만 경쟁의 방식과 그 결과가 가져올 여럿의 삶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픕니다. 이 글들은 우리가 백년 넘게 아니, 수천 년을 이어온 역사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한 치도 나아지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여전히 고통 받고 상처받고 괄시받는, 과거 천민으로 여기는 지금의 노동자의 지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뀔 수 있습니다. 모두가 힘을 다해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내가 그 위치에 서서 바라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마치 내가 당한 것처럼 아파할줄 알면 됩니다. 아니, 그렇게 아프지는 않더라도 아플 거라고 이해해 줄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떤 것이 다수의 행복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아닌 척 하지 않고 나의 동지라 생각할 수 있으면 바뀝니다.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같아 질 겁니다.




주변을 잘 돌아보세요. 시위가 있습니다. 회사를 살리고 죽이는 한사람의 손에서 수천 명의 생계를 좌우합니다. 회사가 어렵다고 수백 명이 이루 말로 못하는 고통 속에 살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같은 노동자로서) 살기위해 굶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셨습니까. 당장 내가 내일 해고 통지를 받는다면 (그럴 리 없다고 자위하지 말고)내 심정이 내 가족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라도 해 보셨나요.




여기 절절한 심정으로 끓어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쓴 글들이 있습니다. ‘일 다녀온 홀어머니의 새카맣게 탄 얼굴을 보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10대와 ‘그저 더러운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쓴 소주잔으로 아픔을 달래는 게 고작’인 듯 한 직장인과

소장님의 더러운 심부름들에 치를 떠는 연구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노조원의 솔직한 심정 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보고 나쁜 놈들이래.

배고파 밥 달라고 하는 우리들한테

회사를 말아먹을 나쁜 놈들이래.

우리가 일해 놓으면

알맹이는 깡그리 챙겨가고

우리에게는 빈껍데기만 남겨주면서

주는 대로 받고 고분고분 일하지 않는다고

우리보고 나쁜 놈들이래.




언제는 한 가족 한 가족 하면서

일만 곱빼기로 부려먹고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보장해달라면

우리들은 모두 나쁜 놈이래.

회사 망쳐놓을 빨갱이 세력들이래.

텔레비전에서도 신문에서도

우리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래.

뼈 빠지게 일해서 우리들은 먹지 말고

저들에게 갈퀴로 걷어가는 이익을 주는

충실한 종이 아니라고

우리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래.

우리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래.




개자석들…




-대우기전노조 조합원, 1996년 3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