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힘
존 포데스타 지음, 김현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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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를 둘러싼 조건이 우리의 단결을 가장 잘 정당화한다. 우리는 도덕적, 정치적, 물질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한복판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신문사는 광범위하게 매수되거나 탄압받고 , 공공의 견해는 침묵하고, 기업은 활력을 잃고, 가계는 빚에 시달리고, 노동계급은 가난에 허덕이고, 토지는 자본가에게 집중되고 있다. 도시 노동자는 자기방어를 위한 조직 결성의 권리를 빼앗기고, 외국에서 수입된 저임 노동자들이 임금수준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수백만 명이 노력해 얻은 결실을 몇몇 소수가 독차지한다. 우리는 정부의 불공정이라는 자궁에서 창녀와 백만장자라는 2개의 계급을 낳는다.-1892년 미국 인민당 발족, 오마하 강령중 (by Ignatius Donnelly)




백년도 넘은 때의 상황을 끄집어 오늘과 비교하는 일이란 구차함뿐이다. 지금의 우리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미 겪어본, 아는 사실들을 구지 반복해서 여러사람들을 아프게 해야 하나. 그런 지도자라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반성을 하지 않는 자라면 바꿔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일이다. 둘로 갈라 싸우는 것이 소모적이고 낭비라고 이야기 한다. 좀 더 나은 사회,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기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대한민국 진보의 입장에서 보는 미국은 모방, 배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미화된 강력한 힘의 상징일 뿐이었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횡의 주범, 경찰국을 자처하는 깡패처럼 그려지고 있다. 약한 나라와 자유무역개방은 확실히 힘 있고 큰 나라의 이익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양보하는 미덕 없이 조약을 체결해온 관례도 그러하다.




그런 그들이 가진 진보의 역사와 조지 W부시로 인해 퇴행을 겪게 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미국 진보의 역사를 알려주고 클린턴과 부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오바마로 대표되는 미래(이 책이 쓰인 시기는 막 오바마가 대선후보로 결정 났을 때이다)에 대한 기대를 담는다.




우린 미국을 배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미 유학생들을 배출하는 나라이고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를 수입하여 그들의 방위시스템을 모방한다. 그들의 교육시스템을 어설프게(?) 차용하고 그들의 도로체계를 모방한다. 파탄에 가까운 의료체계를 따라가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을 정도다.




좋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과거의 과오를 답습하는 일은 과감히 거부할줄 아는 게 ‘지능을 가진 동물’로서 당연한 일이다.




   
 

1908년 최초의 주지사 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환경보호는 국가 의무’라는 연설을 통해 행정부의 공공자원 이용 규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정책은 토양, 숲, 수력자원을 우리 자식과 그 다음 세대를 위한 유산으로 잘 보전할 것입니다. 공유지든, 사유지든 숲을 이용할 때는 개인과 공공의 복리를 동시에 증진할 수 있도록 입법이 이뤄져야 합니다. 홍수 방지와 수력 개발, 토양 보호, 하천 운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취지의 법이 만들어질 것입니다.―본문 중

 
   

 




4대강에 초단기 수중보공사를 강행하고 있는 지금의 정부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백 년 전의 미국보다 ‘뒤로’ 가고 있어야 되겠는가. 대답도 없고 변명에 급급한 이들을 보면 과연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나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미국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꾸준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투쟁의 긴 터널을 뚫고 온 희생자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역사가 있었다.







   
  킹 목사 같은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적이 아무리 강하게 대응해오더라도 우리는 신념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을 인종, 남성·여성, 성적취향에 따라 나누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의 기반을 구축하고, 모든 사람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단합된 투쟁에 나서야 한다.―본문 중  
   

 




진보의 힘은 단결에 있다. 지금 보수가 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그네들의 단결력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단합된 투쟁’ 만이 흐름을 단숨에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사회를 한걸음씩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87년 6월이 그랬고,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0년간의 진보의 역사는 보수의 결집을 낳았고 결국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2007년 미국경제는 꾸준히 성장했지만, 번영의 과실은 상위층에 집중됐다. 중산층 가정의 수입은 떨어졌고, 빈곤층과 의료보험 미 가입자가 증가했다. 소비자 물가가 폭등하고, 주택 시장은 휘청거렸으며, 가계 부채는 역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반면 기업이익은 사상 최고치를 달성했고,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1928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으로 벌어졌다. 연고자본주의가 판을 쳐 정상적인 비즈니스를 대신해버렸다.―본문 중  
   

 




2010년 한국의 경제 지표는 꾸준히 나아지고 있지만, 번영의 과실은 1%에 집중되고 있다. 중산층 가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빈곤층의 생계는 위협받고 있다. 소비자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으며 주택시장은 흔들거리며 가계 부채는 역사상 최고 수준을 갱신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들의 이익은 사상최고치를 달성했고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근대국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벌어졌다. 떡값과 봉투가 판치는 세상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되어 버렸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불확실한 유언비어로 국민을 위협에 몰아넣고 있는 지도자들이 신임을 얻고 있다. 책임자의 무책임한 발언에 대한 비판도 묵살당하는 시대다. 위협과 공포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상.



미국도 마찬가지 였다.



   
  지난 태풍 카트리나로 인한 재난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뉴올리언스 시 전역이 60센티미터의 악취나는 물에 잠기고 나서야 부시는 비행기로 둘러보곤 동행한 국토안전부 장관에게 “연방정부의 각 부서와 관련 기관들이 끔찍한 비극에 잘 대응해줘서 무척이나 만족스럽다”고 치하했다.―본문 중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의 말년이 되어버린 시절에 고민했던 진보의 가치는 무엇이었던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 없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꿈이 아니었던가. 먹고 살기 힘든 지금엔 시민의 의미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부조리와 비리에 대한 고발의 의무감도 당장 가족을 돌봐야 하는 가장으로서 선택이 어렵게 되어버린다.




   
 

진보는 재산형성 과정의 경제적 안정을 목표로 한다. 매달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하고, 인종차별과 고금리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조건으로 주택구입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또한 내 집 마련이 좀 더 쉬워지고 양호한 조건의 퇴직연금을 보장받는 것도 포함된다.

 

공정하면서도 단순하고, 성장 지향적이면서도 노동 중심적인 세제 개혁이 지금으로서는 최우선 과제다. 지금의 세금 구조는 행위와 성과에 대한 동기 부여가 왜곡돼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직원들보다 세금을 더 적게 내는 일이 계속돼서는 곤란하다. 또한 환경오염 유발 기업이나 석유 및 가스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한편, 탄소 배출권으로 조성한 재원을 저탄소 경제로 전환하는 데 재투자해야 할 것이다.―본문 편집

 
   

 



진보가 힘 있는 사회가 바로 서민이 꿈꾸는 사회다. 나와 내 이웃이 편안하고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회. 그래하여 불공정과 누군가를 억누르는 폭압이 부정임을 누구라도 손들고 나서서 지적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는 지도자가 만들 수 없다. 나와 네가 손잡고 마음과 뜻을 모아 하나의 힘이 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우리’가 만드는 곳이다.



   
 

텍사스의 뉴딜주의자인 모리 매버릭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와 먹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이 거칠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 이상으로 진보 정치를 잘 표현한 말을 나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 없다.―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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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가르쳐 준 것
기무라 아키노리 지음, 최성현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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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농사 자알 지었네.”

“웬만하면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주변 밭도 생각해 주어야지.”




나는 시골에 살고는 있지만 농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농사를 업으로 하지 않을 뿐더러 땅을 거의 놀리고 있으니 말이다. 매년 풀이 키 높이까지 자라는 밭을 보면 주변 밭에 미안한 마음이다. 몇 번 예취기를 가지고 돌려보지만 비가 오거나 하고 나면 훌쩍 커버리는 풀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없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땅. 황무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밭의 주인은 게으름뱅이다.




사실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공을 들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라는 믿음은 있다. 그래서 주변의 욕을 먹더라도 농약을 뿌리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한때 주변의 시달림 때문에 처가 “차라리 농약이라도 뿌리자”라고 한 적도 있다.  

 

다투기는 했지만 내가 살고 아이가 뛰어다니는 곳에 독약을 뿌리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는 쌓인다. 올해 다른 풀이 자라고 있다. 작년 키가 큰 벼과의 풀들이 점령하던 땅에 무수한  납작한 풀들이 자라고 있다.(한 여름에 어떻게 바뀌는지 두고 봐야 하겠다) 땅위의 환경이 스스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집 앞의 밭은 거의 놀리는 실정이다. 작년 가을 즈음에 느티나무 몇 그루와 소나무를 올 봄에 심고 아직 봄맞이 파종도 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풀을 키우고 주변 이웃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다.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나 텃밭을 재배하는 취미로 하는 이들이나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는 김매기(제초)이다. 작물이 땅위로 올라오는 줄기의 하단부를 제외하고는 흙으로만 보이게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풀 뽑는 일을 직접 하는 집은 거의 없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도 검은 비닐(지온을 상승시켜 작물이 자라는데 영향을 준다는 단점이 있다)에 구멍을 뚫어서 구멍 외에는 풀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 장치라도 설정한다. 당연히 대부분의 농가들은 농약(제초제)을 뿌리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채소나 과일 재배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방제다. 곤충의 유충이 채소나 과실을 갉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 살충제를 뿌린다. 우리가 매일 먹는 김치. 원료인 배추농사를 지을 때도 살충제는 필수불가결하다. 초반에 방지하지 않으면 구멍 숭숭 뚫린 누더기 배추를 얻거나 아예 잎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의한 병을 막기 위한 약제 살포도 하게 된다. 열매가 맺히는 대부분의 작물에서 행하여지는데 적정시기와 적정한 양을 맞추는 것은 ‘관행’에 의해 농사짓는 대부분의 농민들에게는 어렵다고 보면 된다. ‘적으면 안하는 만 못하다’는 생각에 충분한 양의 몇 배가 넘는 양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무라아키노리의 이론과 경험은 위와 같은 상식을 완전히, 처절하게(?) 뒤엎는다. 자연농법의 개론서격인 후쿠오카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 논농사에 관한 자연농법의 내용을 담았다면 이 책은 사과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경험을 언론인이 편집한 <기적의 사과>에 이은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사과는 특히 농약이 많이 필요하다. 사과 뿐 아니라 모든 과수농사가 마찬가지다. 약이 없으면 병에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체질의 나무를 돌보는 일이 바로 ‘과일농사‘다. 언제 어느 때에 얼마만큼의 투약으로 성공적인 맛좋은 과일을 생산하느냐가 바로 ’기술‘로 인정받는다. 책은 농약과 비료를 완전히 제거한 사과농사에 기초한 자연을 ‘관찰’한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실패한 10년간의 연구결과를 집약한다. 직관과 엉성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보통의 농법안내서와는 다르게 처절하게 관찰하고 경험하고 시행 착오한 내용을 담았다.




어려서 회계와 기계를 다루는 재능이 풍부했던 그가 고향으로 귀농하면서 겪게 되는 경험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농사에 별 흥미가 없었던 저자는 대규모 영농을 위해 당시 보편화되지 않았던 대용량의 트랙터를 사서 옥수수 밭을 가꾸는 일을 시작한다.  

 

주요수입은 사과재배였으므로 사과농사에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농약으로 인한 건강의 위협을 느끼고 무농약에 도전한다. 매년 투약 량을 줄이다가 1회, 그리고 무농약에 도전한다. 하지만 사과는 받아주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사과를 두고 눈물의 투쟁이 시작된다. 매일 벌레를 잡는 일에 전력을 다해도 나아지지 않는 사과를 어루만지며 말을 건다.  

 

‘밥보’, ‘파산자’소리를 듣고 주변 농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수입이 없는 가족의 자산은 탕진하고 그 좋아하던 트랙터도 넘기고 빛에 몰리면서 야간에는 파친코, 유흥주점일까지 하게 된다. 말이 쉽지 2~3년이면 대부분의 의지가 강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집이 센 것인지 신념이 강한 것인지 6년까지 버티다가 결국 가족에게 사죄하는 길로 죽음을 택하고 산에 오른다.  

 

어둠을 가르고 오른 산 중턱에서 줄을 매려고 다가간 나무에 사과가 풍성하게 열린 것을 본다. 사실은 도토리나무였다. 실하게 열린 도토리와 주변 나무들의 싱싱한 열매들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죽음까지 몰리는 고집을 넘어서게 된 계기는 흙이었다. 산이, 자연에 가까이 하고자 했던 저자에게 내려준 계시다. 주저앉아 흙을 만지고 무릎까지 주변을 덮은 풀들을 눈물로 바라본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다. 자연이 주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연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의 신념은 확신에 이른다.




당장 시작한 것은 풀을 키우는 것이었다. 나무 주변에 콩을 심어서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그 주위로 무릎까지 자라는 풀은 내버려 두었다. 그러기를 3년 만에 열매가 맺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온통 만발한 사과꽃 아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사과나무에게 고마워했다.

그는 지금 세계적으로 지명도를 얻은 강사다. 아프리카 오지까지 연 100회에 이르는 강의를 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 청소년농업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관행농이라면 비전없다 할 젊은이들이 그를 본받고 농업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성공하게 된 비결은 끈기였다. 꾸준히 주변의 질타와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가 믿는 길을 가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좆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결실이다. 3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사과. ‘기적의 사과’라 불리는 그의 사과는 예약판매를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동이나 버린다. 한국에서 그를 배우기 위해 몇 백 명의 농부들이 방문하고 그의 과수원은 연간 3만 명의 발자국으로 채워진다.




국내에도 그를 따라서 무농약에 도전하는 사과농가들이 생겨났다. 일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실정이라 하지만 머지않아 ‘기적의 사과’를 생산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농사가 방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되긴 되지만 힘들어서 못한다는 결론이 대다수의 생각이다. 적게 투입하고 적게 거두는 일이 아직까지 생산량위주의 정책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 같다.

도처에 인삼밭으로 들어찬 논밭에는 매월 약냄새로 진동을 한다. 어찌나 많이 뿌려대는지 농민들조차 농약 범벅인 인삼을 먹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인삼을 재배한 곳에서는 몇 년은 휴경해야 작물재배가 가능하다고 한다. 삼이 지력을 소진시킨다는 이론이다.  산삼이 나는 주변반경에는 어떤 풀들도 자라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장뇌삼이나 산양삼을 재배하는 현장을 보아도 풀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자라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원인은 농약이다. 농약에 완전히 절어있는 땅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인삼밭에서는 어떤 작물도 자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안전한 먹을거리를 먹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화학물질의 반응에 대해서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선택적 제초나 한 가지 해충에 대한 방제효과를 보이는 물질의 이면에는 수만 가지의 반응이 도사리고 있으며 자연 생태계에 어떤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뻔한 일을 눈감고 자연을 다스리려 하는 인간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이해하고 그 흐름에 순응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위적인 ‘투입’과 ‘개발’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저자의 10년간의 ‘눈물’로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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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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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흘러가는 구름이 아름다워 붙잡기라도 하듯 손을 내밀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곧게 서서 허공에 몸을 던진 지 1년이 되어 간다. 우린 그가 외롭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일에 말할 수 없이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고 왜 다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지금 진보일 ‘좌파’가 불온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받는 시대에서 ‘시대의 올바름’에 관한 논의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과거 우리가 놓쳤던 것들, 그가 진보적이었는가 아닌가 보다 한때 최고의 권력이었던 그가 가진 생각이 낳아 아직까지 남아 전해지는 것들. 가치와 이념이 향하고 있는 방향, 희망의 에너지가 떨어져 가는 시대에 자신을 태워 불씨를 살리려했던 한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감정이 앞서게 되면 중심잡고 바로 서있기 힘들다. 표지의 그분 손 흔드는 모습에 벌써 가슴이 요동치고 눈앞이 흐려진다. 책을 읽으면서 울컥하게 하는 무언가가 오늘의 우리 앞에 놓인 ‘함께 해야 할 일’을 비추는 촛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위’에 오르지 못한 대통령




그가 믿고 실천했던 가치가 소수를 따르게 했고, 그것이 시대의 소명이라 생각한 다수가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에 휩쓸렸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고 시민이 일어나 다시 되돌려 놓았다. 얕게 아는 사람은 쉽게 흔들린다. 언론들의 음해와 그에 맞서서 끝임 없이 악다구니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천하게 느껴졌다. 말도 촌스럽게 하고, 행동도 정제되지 못한 대통령이 국가의 품격을 낮추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세속적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고 싶었다. 마음을 닦아 죽음과도 같은 이 고통을 극복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배우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실패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다른 누구의 실패도 아니다.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패는 뼈아픈 고통을 준다.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나는 이 고통이 다른 누구에겐가 약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쓴다. -프롤로그 중  
   

 




책의 프롤로그,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은 자신의 실패가 남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하며 끝까지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의 성공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말 것을 바라고 있다. 자신을 지우고 부정하면서라도 가치와 이념을 남기려는 노력이 바로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될까.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면서 매번 싸우는 가치들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와 함께 사는 사람과도 다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좋고 이것은 나쁘다는 판단보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보편적 가치가 좀더 많은 이들을 아우르고 강자와 약자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 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으로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쉼없이 달렸던 그. 그 이후에 대해서,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직대통령의 인기가 부담스러웠던지 털어 별로 나올 것도 없는 뒤조사에 그의 주변이 힘들어하자 자신을 버리라고 글로 말하더니 육신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행복이라는 것이 별것인가. 내가 살만하고 내 가족이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고 더불어 사는 이웃이 탈 없이 기쁨을 나눌 정도가 되면 행복의 사회가 아닌가. 그가 처음 등원해서 말하던 사람사는 세상의 가치는 3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바라는 것’으로만 남아 있다. 그도 갈등하고 번민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길을 돌아보며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 약해지기도 하는 아버지였다.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 청년과 같은 길을 가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모른 채 하면서 어떻게든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살라고 할 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쉬웠지만, 내 아들한테 고난의 삶을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받을지 모르는 고통을 예방하는 길이었다. 아들한테 권하기보다는 아버지인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정의를 선택했고 가족은 어렵고 괴로웠다. 수많은 동지를 얻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굽힘이 없었고, 굴종과 아부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계보도 없는 곳에서 순전히 ‘팬’들의 힘으로 후보가 되었고, 단일화에 성공했고 대통령이 되었다. 탄핵을 겪고 복귀되어 임기를 마칠 때까지 그의 부러지지 않는 소신은 대다수의와 벽을 쌓고 말았다. 참 외로웠을 것이다. 그런 정치인을 가장으로 둔 가족은 또 어땠을꼬.




   
  변호가 개업 초기 몇 년을 제외하면 제대로 생활비를 준 적이 없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할 때 매월 봉급이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온다면서 아내가 함박웃음을 짓던 일이 떠오른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아내는 경제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두가 내 책임이다.-본문 중
 
   

 




면목 없는 일




검찰의 압박이 심해지고 자식과 아내의 출두에 이어 좁혀온 수사망이 자신에 이르렀을 때, 결심을 굳히게 되었을 것이다. ‘면목 없는 일’을 견뎌하지 못했을까.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눌려서 누울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미 그 정도면 산목숨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관대할줄 모르는 그래서 항상 자신만만했던 그였기에 작은 허물이라도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 미안함과 고마움을 안고 살았던 인간 노무현은 결국 모두에게 미안함을, 자신을 믿지 못했던 국민들로부터 죽음으로서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를 살려냈다.




정치적으로 모두가 예 할 때 당당하게 아니오를 외쳤던 그다. 누구나가 가슴속으로 믿고 있던 정의를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표출하는 데에 익숙했다. 행여 정의롭지 못하고 비상식적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실현의 정치’를 하고자 더 힘 있는 자리로 올라섰다. 변호사에서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그가 시류에 따르고 유연함을 중요시 하는 ‘정치인’이었다면 결코 극적인 당선은 역사에 없었을 것이다.




당선될 곳을 놔두고 떨어질 곳이 뻔한 부산으로 가서 연거푸 떨어지는 선거전을 치르겠다고 결정한 것도 그가 진짜 ‘바보’라서가 아니다. 불의와 비겁함을 부끄러워할줄 아는 상식을 가진 사람. 그것이 그를 오늘날도 기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호남을 고립시켜 놓은 지역구도 정치지형에서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열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쪽에 간다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본문 중  
   

 




대통령이 되려는 기회의 순간에도 그는 신의를 지켰다. 후보시절 당시의 현실이나 대통령이 된 이후의 국정운영에도 도움이 될지 모를 미국방문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보수세력속에 분열한 진보




그는 진보였다. 스스로가 항상 진보에 대해 고민했다. 역사속에서 그의 존재가 그립고 돋보이는 이유는 그것이다. 솔직히 권위를 벗어 던지고 서민과 국민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대통령. ‘민주주의’의 참뜻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사지로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고 가꾸어가던 그는 이 땅의 성숙하지 못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보수세력은 조직이 매우 크고 강하다. 이념적으로 튼튼하게 결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의 결속력도 매우 강하다. 공동의 이익에 근거를 둔 네트워크를 감성적 네트워크로 재조직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큰 신문사, 긑 기업의 소유자, 큰 연구소를 모두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법원, 검찰, 국정원 등 국가기관은 그 본질적 속성상 보수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라이온스클럽, 로터리클럽,JC(청년회의소) 등 경제적 여유가 잇는 민간 자생 단체와 지역사회의 소위 관변 단체들도 모두 보수가 우세하다. 학술원과 각종 학회, 지식인 사회도 보수가 압도적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보수의 나라인 것이다.

반면 진보 세력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고 이념으로 분화되어 있다. 돈있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단체가 별로 없다. 진보적 시민단체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언론이 외면하면 힘을 쓰지 못하다.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두차례 대선 승리와 10년의 집권도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격차는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규모 차이만큼이나 크다. 진보적인 대통령이라도 보수의 네트워크에 포위되어 고립당하면 힘을 쓰기 어렵다. 변명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는 그런 조건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은것도 같은 원인 때문이다.-본문 중

 
   

 




진보가 한 발짝 내딛기는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후퇴하기는 요즘같이 쉬워도 말이다. 요즘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는 검찰개혁에 대한 생각도 드러냈다.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도 부당한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 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 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제도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본문 중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좀더 앞으로 나아가 있을까. 혹시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진보를 행하기엔 덜 익은 것이 아닐까. ‘원망하지 마라’는 말에 ‘복수합시다’를 외치는 것은 스스로나 그를 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 뭔가 모자라서 억울한 느낌이다. 정의가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 앞으로 나아지지 못함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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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도시 사라진 아이들 - 1995년 뉴베리 아너 선정도서
낸시 파머 지음, 김경숙 옮김 / 살림Friends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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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트헤이븐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는 않지만 하라레에서 멀지 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비밀스럽고 평화로운 옛마을이다. 이곳은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꿈꾸던 어느 성직자 덕분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분은 레스트헤이븐을 발견한 다음날, 땅이 필요한 사람과 만나는 꿈을 꾸었다는 한 백만장자와 운명적으로 맞닥트렸다. 백만장자는 그 성직자에게 레스트헤이븐 골짜기를 주기로 했다. 수년 동안 사람들은 그곳에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공동소유인 집을 지었다.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의 공짜로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일 것이다.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미국식 유모어가 곳곳에 넘치는 아프리카의 이야기? 작가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니면서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일은 제3자에게 오해를 불러 올수 있다. 마치 월트디즈니가 만든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이아기, 고대 마야인들의 이야기, 중국소녀의 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은 관점이 아닐까.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일단 작가의 순수한 창작품으로 봐주는 것이 좋겠다. 꽤 실력이 좋아서 깜빡 넘어갈 뻔 했다.




아프리카의 문학이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비록 몇 년이지만 아프리카문명을 경험했고 그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을 작가로부터 그들의 문화와 영성을 간접경험 하는 일은 신비롭다. 먼 미래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고래로 내려오는 아프리칸 영적 문화에 대한 탐구심을 충분히 드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물론, 전체적인 구성과 짜임은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가득차있다. 아이들이 모험을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시작되는 위기와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과정. 아이들의 부모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3인조 탐정단에게 실종된 아이들을 찾으라고 명하면서 사건에 투입되는 이들의 모험. 두 가지의 이야기가 병행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의 고유명사들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꽤 두꺼운 분량의 책인데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만만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작가를 만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도 괜찮을 듯 하다.




취향이 아닌 책을 읽는 일은 꽤 괴로운 일이다. 서평마감만 아니면 꾸준히...천천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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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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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흘리개 어린시절, 그곳에 가면 노래 부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꾀어 처음 간 교회. 누군가를 경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짧은 생이지만 처음이었던 나로서는 생경함과 어색함으로 목재의자위에서 몸을 꼬고 있었다. 나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일가를 통틀어 다닌 적 없는 교회를 나만 다니는 일은 유일하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 집에 돌아와서도 무척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좋은데 왜 안다니지‘로 정리될 수 있는 일이라면 떳떳했겠다. 문제는 어정쩡한 마음이었다. 주중에 난삽하기 짝이 없는 방탕함으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학교친구가 청년부 대표로 기도하는 자리에서 단 몇 분 동안의 울음으로 그동안의 죄를 사함을 받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에 경악했다. 정말 용서하셨을까? 매번? 그런 하나님이라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예수님을 존경하고 하늘에 계실 ‘아버지’를 경외한다. 세상엔 분명히 나약한 인간이 ‘머리’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겠는 것은 한국의 교회다. 그리고 그곳을 운영하는 이들. 교회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좀더 자신의 입지와 자본의 획득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 교회를 선택한다. 번쩍거리는 세단에서 내려 명품 핸드백을 들고 귀금속을 걸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보면서 나는 일찌감치 저런 곳이 예배당이라면 내가 속해있을 곳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기도하는가. 그들이 마음에 새기는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예수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이었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힘을 부리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인간’이었다. 우리가 그를 닮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병든자들의 병을 낫게 하고 수천 명의 굶는 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없다.




   
  우리들이 그를 직접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우리들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바로, 그가 엄격히 금지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들에게 맨 앞에 나서는 대신 맨 뒤에 머물고, 가장 뛰어난 자가 아닌 가장 겸손한 자로 행동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상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기독교인들은 절대 ‘예수와 같아’ 질 수 없다. -본문 중  
   

 




예수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역사책, 성경을 보아야 한다. 같은 성경도 어떤 시각을 가진 사람이 어떤 부분을 중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만명이 동시에 듣는 교회의 설교와 기독교정신에 충실한 개척교회의 목사가 전하는 말씀은 다르다. 우리는 그대로 성경이 후대에전하고자 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




   
  그는 하층민과 계절별로 고기잡이에 의존해 살아가는 어부, 혹은 멸시받는 직업을 가진 자들(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중에서 제자들을 선택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율법학자도 없었으며 법을 연구한 자도 없었다. 게다가 예수는 집 없는 자들을 더 좋아했다. 자신도 집이 없었으며, 공적인 생애 동안 집 없이 태어나 집 없이 살았다.-본문중
 
   

 




저자는 현재 예수상은 많이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한모양이다.(책을 읽고 나니 나조차도 편견이 있었음) 제목에서 ‘예수가 뜻하는 바’를 바로 전하겠다는 의도를 표한 것도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서문으로 시작해서,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예수의 청년기, 급진주의자, 종교인이 아니었던 점, 하늘나라에 대한 의미,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본 하나님으로 나누어진 챕터를 통해서 결국 ‘사랑’으로 통하는 ‘그분의 뜻’을 잡아낸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4-45
 
   

 







그리고 현실 정치, 종교인들에게 실랄한 비판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었다. ‘벽을 보고 욕이라도 하라’는 전대통령의 말씀처럼 집도 없이 교회도 없이 말씀을 전하고 몸으로 실천하진 예수의 삶은 고스란히 성경에 드러난다.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1-7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예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진보‘ 라고 한다면 어떤 답을 할 것인가. 가진자가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병들고, 힘든 이들을 위해 가진것을 내주어야 하고 입을 것을 벗어주길 원하셨고, 많이 가진자가 ’천국‘에 가는것은 불가능하다고(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하셨다. 삶도 먹고 입고 하는 문제에 연연하기보다 하늘의 ’의의‘를 따르는 것을 종용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태 6.30-34  
   

 




현실에 이런 정치인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람 하는 사람만 사랑하며,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누가 6.27-38

 
   

 




결국,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세상을 아우르는 사랑이 모여 사는 우리를 좀더 천국과 가까운 세상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예수님의 뜻을 받들 오늘의 교회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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