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코너’라는 교도소에 갇힌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페러것’- 교도소에 감금된 남자의 이야기라? 어쩐지 뻔해 보인다. 물론 책을 읽는 사람은 분위기나 작품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죄를 짓게 된 동기, 감옥 안에서의 생활, 교도소에 있는 또 다른 죄수들과의 관계나 그들의 사연 등등. <팔코너>에는 이런 모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무대로 한 여느 작품들과 조금은 다르다. 무엇보다 <팔코너>를 매혹적인 작품으로 만든 데에는 존 치버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이 작품은 ‘페러것’이 ‘팔코너’에 수감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형을 살인한 죄로 구속됐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직업은 ‘교수’였고 심한 마약중독자이다. F동 독방에 수감되는 페러것. 교도관의 말에 따르면 F동의 ‘F는 성교(fuck), 마약중독자(freak), 멍청이(fools), 동성애자(fruits), 초범(first-timers), 뚱뚱한 놈(fat asses), 망상(phantom), 뻔뻔함(funnies), 미친놈(fanatics), 저능아(feebies), 장물아비(fences), 등신(farts)의 머리글자’라고 한다. 이 분류대로라면 페러것은 아마도 마약중독자이자, 초범에 속할지 모르겠다.
심한 마약중독자인 페러것에게는 감옥 안에서도 하루 한 알의 메타돈이 허락된다. 메타돈을 복용하며 페러것은 환상을 만나기도 하고, 환각 상태 속에서 감옥에 들어오기 전 생활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속속 페러것이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 형을 살해하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면회를 온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드러나는 ‘바깥 세계에서의 삶’을 보자면 딱히 감옥 안의 삶보다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자유가 허락된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랄까.
오히려 감옥 안의 삶이 덜 외로워 보일 정도로 ‘팔코너’에 들어오기 전 페러것의 삶은 고독 그 자체다. 결혼으로 그가 직접 꾸린 가정 생활도 위태위태하고, 그가 태어나 자란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고독하고 외로운 그를 보고 있노라면 F동 독방에 수감되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로지 마약을 통해서 그 안의 또 다른 그를 만날 때만 페러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때문에 어디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토록 마약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이 좀 더 흥미로웠던 이유는 페러것에게서 존 치버의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고, 심한 알콜 중독자였으며,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평생 동성애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동성 연인이 있었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페러것’에게서 드러난다. 때문에 ‘페러것’은 ‘존 치버’의 분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존 치버는 ‘페러것’을 통해 어쩌면 사변적인 소설로 그쳤을 수도 있을 이야기를 붕괴되어 가는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가 떠올랐다. 윌리엄 버로스의 자전적 이야기였던 <퀴어> 역시 마약과 동성애가 주된 소재다. 그런데 그 책은 읽는 내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다지 긴 분량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웠다. 마약, 동성애,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등등 사람들이 듣고 싶지도,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소재로 이토록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팔코너>는 그래서 돋보이고 또 돋보인다. 책을 놓고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