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세키의 글은 담백해서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는 확! 하고 순간적으로 입맛을 잡아끄는 게 있지만 심심한 음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자극적이지 않기에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곱씹을수록 음식을 이루는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나 먹는 기쁨, 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더욱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심심하고 자극적이지 않기에 두고두고 자주 꺼내 먹어도 좋다. 몇 년, 몇 십 년
생각날 때마다 먹어도 그때그때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그의 글이 바로 그렇다. 너무나도
심심한데 요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심심한 맛에 그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게 된다. 그 심심함 때문에 시간을 두고 또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고 곱씹을수록 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맛’을 발견하게 된다. 뭐랄까, 심심해서 절대로 질리지 않는 평양물냉면
같다고나 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 국내 번역된 것들은 거의 다 읽어간다. <풀베개>와
<우미인초> 이 두 작품만 못 읽었던 셈인데 이번에 <풀베개>를 읽었다. 아, 이제 <우미인초>한
작품만 남았다.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며 또 읽을 듯하다.
‘현암사’에서 이미 출판되었고, 앞으로도 나올 예정인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한 권씩 장만하면서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풀베개>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 중 크게 관심이 가던 작품은 아니다. 몇 번 집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았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자적, 마음의 여유가 많은 시기에 읽어서 더 잘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다지
길지 않았던 창작 시기 동안 소설은 물론 한시, 하이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를 맛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한 편의 긴 ‘하이쿠’를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첫 시작부터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 문장을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적어도 5분 이상은 첫 페이지에서 멈춰있던 것 같다. “이
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
저
문장을 두고두고 또 읽어본다. 첫 페이지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군데군데 동서양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도 묻어나온다.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자연으로 떠난 ‘나’는 자연 속에서 세상과
고립된 채 작품에 몰두하고자 한다. 그 자연 속에서 여러 인물을 만나며 ‘그림’을 그리고자 하지만 쉽게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중 ‘나미’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그녀에게 서서히 옮겨가는데, ‘나’는 과연 최초의 목표였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나’가 그림을 완성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주인공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연속
여정을 담은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곳곳에 ‘아-’하는 감탄이 나오는 하이쿠가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느껴지고 그 여백 안에서 풀내음이 올라오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예술이나 인간의 삶, 근대 문명에
관한 쉽지 않은 철학적 질문을 만날 수 있다. ‘나’와 함께 산속을 거닐면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풀베개>- 이 한 편의 담박하면서도 진중한 하이쿠는 내게 오래도록 여러 번 읽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