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툰가 봐. 바보같이. 고양이를 너무 예뻐한다고 질투를 하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친 거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 44쪽)
말도 안 돼. 인간이 한낱 동물을 두고 질투를 하다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그 동물을 상대로
질투를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질투를 한다. 샘을 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아마
강아지든 고양이든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질투, 아니 샘을 내는 행동은
인간의 그것에 비해 단순하고 순수하다. 자기와 같은 종(강아지든 고양이든 때로는 그 둘을 포함하는 포유류든)을 향한 질투라면 왜
자신의 주인이(또는 집사가) 다른 녀석을 더 예뻐하는 걸까? 왜 다른 녀석의 간식이 더 맛나 보일까? 왜 나보다 다른 녀석이랑 더
잘 놀아주는 것 같을까? 등등. 만일 질투의 대상이 자신과 다른 종, 즉 인간이라면 뭐랄까 그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서
‘아앙 나도 예뻐해 줘.’ 정도에 그친다.
이에 비해 인간의 질투는 때로는 무시무시하다. 겉으로는 한낱 동물에
인간인 내가 질투를 할쏘냐? 싶지만 그 속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다른 인간도 아닌 ‘동물’이라는 미미한 존재에
질투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분노한다. 아니 내 경쟁 상대가 강아지라니!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왠지 저놈의
고양이를 더 아끼고 예뻐하고 사랑하다니!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고양이의 가느다란 눈이,
강아지의 동그란 눈이 더 얄미워 보인다. 보통, 인간은 동물보다는 머리가 좋은 까닭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이용하기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를 비롯해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의 <암고양이>에는 바로 이런 유치하지만 솔직한, ‘고양이’를 향해 질투에 불타오르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두 작품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이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암고양이>는 연인 사이에 끼어든(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남자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여자가 맞을 것 같다) 고양이라는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질투와 인간의 광기를
그린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집사의 신분으로 이 두 작품은 좀 더 흥미롭게 읽혔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 가까운 짧은 소설이다. 늘 여자의 몸에 대한 찬미와 극한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치고는 꽤 건전(?)하고 담백하며 아기자기한 편이다. 검색 사이트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진을 찾아보면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 묘사가 꽤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고양이가 어떤 자리를 좋아하고 어떤 습성을 지녔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이
사랑스러운지 참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서 아,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정말 고양이를 오래 키워봤구나 싶어진다. 아래와 같은 묘사에서는
키득키득 웃음도 나온다. 아니, 이거 완전 우리 고양이들 이야기잖아!
리리가 현관이든 방문이든 창호지문이든 미닫이문이기만 하면 사람처럼 열 줄 아는 것을 보고 쇼조는 이렇게
똑똑한 고양이는 드물다나 뭐라나 극성이었다. 그렇지만 이 한심한 짐승은 문을 열 줄만 알지 닫을 줄은 몰라서 추울 때 들락거리고
나면 일일이 닫아야 했다. (54쪽)
이 작품에서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특유의 탐미적인 시선은 엿보인다. 물론 다른 작품에 비하면 매우 담백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찬탄과 탐미의 대상은 여성인 ‘후쿠코’나 ‘시나코’가 아닌 고양이 ‘리리’이다.
짐승이 어떻게 저런 애정 어린 눈길을 할까…. 그때 쇼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두운 벽장
안에서 번쩍이는 그 눈은 이제 장난꾸러기 새끼고양이가 아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교태와 요염함과 애수를 띠고 있는 여인의
눈처럼 보였다. 쇼조는 여자가 아이 낳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그 여인이 젊고 예쁘다면 틀림없이 이처럼 원망하듯 애절한
눈빛으로 남편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68쪽)
고양이에 대한 이런 묘사로만 그친다면 어찌 다니자키 준이치로이겠는가. 그는 ‘리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두고 벌어지는
‘쇼조’와 ‘시나코’, ‘후쿠코’의 갈등을 미묘하고도 생생하게 그린다. 고양이 키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어쩐지 그 밖의 일은
젬병인 쇼조. 그는 현재 후처인 후쿠코와 함께 ‘리리’를 키우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처인 시나코가 후쿠코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키우던 고양이 ‘리리’만 보내달라는 것이다. 쇼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인 리리를 이용해 전남편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보려는 속셈이 깔려있다. 쇼조는 어쩌면 후쿠코보다 ‘리리’를 더 아끼고 사랑할지
모른다면서 은근히 후쿠코의 신경을 건드리는 시나코. 시나코의 작전은 과연 성공할지, 쇼조는 시나코와 후쿠코 또는 ‘리리’ 사이에서
어떤 존재를 최후에 선택할 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들의 이런 복잡한 감정싸움에는 아랑곳없이 유유자적 느긋하게 자기
본연의 삶을 즐기는 ‘리리’가 어쩐지 최후의 승자 같은 느낌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뜨의 <암고양이>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 비하면 더 강렬하고 파괴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섬뜩하기도
하다. 관능적인 면에서도 어쩌면 이 작품만큼은 꼴레뜨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앞선다.
“내가 당신들 둘을 봤어!”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침마다, 당신이 저쪽 작은 벤치에서 밤을 보낼
때… 해뜨기 전, 당신네 모습을 봤어, 단둘이….” 그녀는 떨리는 팔을 뻗어 테라스를 가리켰다. “둘이 함께 앉아서… 당신네들은
내가 말을 해도 듣지도 못했지! 그렇게 서로 뺨을 맞대고 앉아서…”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 <암고양이>, 147쪽)
위 인용문은 연인이 다른 사람과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한 게 아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당신네’들이란 ‘남편’과
고양이 ‘사아’이다. ‘사아’의 주인 알랭과 결혼한 까미유는 알랭을 온전히 그녀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알랭이 그토록 사랑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몹시 아름다운 암고양이 ‘사아’이다. 결혼과 함께 ‘사아’가 둘 사이에서
사라지는 듯했지만 알랭은 고양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까미유와 새로 꾸린 가정으로 ‘사아’를 데리고 오고 만다. 까미유의 불타는
질투는 거침없이 타오르고, 그 질투는 광기로 치닫는다.
“어떤 고양이라도 자기가 저놈을 사랑하는 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야.” 알랭은 계산된
솔직함을 보였다. “그 어떤 여자도.” 까미유는 흥분하여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그 어떤 여자도 저 암고양이만큼은 사랑하지 못할
거야.” “맞는 말이야.” 알랭이 대답했다. (146쪽)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까미유의 지나친 질투(그러니까 어쩌면 그저 동물일 ‘고양이’를
향한)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내 고양이들을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양이를 광적으로 질투하고 그 고양이가
사라지길 바라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을 과연 전처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알랭도 그럴 거야. 이렇게
심정적으로 알랭에게 조금 더 기울어져서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딘가 또 불편한 마음이 든다.
알랭은 정말
까미유를 사랑하는 걸까? 단지 결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때문에 질투하는 그녀를 나쁜 여자로 몰아가면서 자신이 결혼에서의
어떤 우월한 지위,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갖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알랭은 ‘사아’를 한없이 순수한, 그러므로 영혼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설정해놓고 그 대척점에 ‘까미유’를 놓았다. 때문에 그토록 순수한 존재인 고양이를 질투하는 까미유는
이상하고 괴물 같은, 나쁜 여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도 계속해서 유년의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알랭의 태도는 과연 바람직할까?
<암고양이>는 이렇듯 ‘질투’라는 큰 흐름 속에 결혼제도가 갖는 모순과 또 그 제도가 빚어내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그려냄으로써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와는 또 다른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냥이 녀석들이 자꾸만 다가와서 의자 아래서 야옹야옹 울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부비부비하면서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이
녀석들은 내가 책상에 앉아서 뭐만 하려고하면 이 모양이다. 컴퓨터에 질투를 하는 걸까? ‘집사야! 이 네모난 뜨거운 거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나랑 놀자!’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고양이 관련 사진집이나 에세이, 만화책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고양이를 소재로 삼은 문학 작품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