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 연휴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노벨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메세지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나 나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받기를 바랐고, 하루키는 절대 받지를 않길 바랐다. 그리고 둘 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고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민음사가 이번에 입 좀 찢어지겠네 하는 생각이었다. 민음사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일찍부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녹턴>을 읽었다. 두 작품 모두 괜찮았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세 번째로 읽은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 이 작품들을 읽은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그 뒤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꽤 좋지만(<나를 보내지 마>), 어떤 작품은 썩 좋지 않고(<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또 어떤 작품은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대평가 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티븐스’는 집사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귀족집안 달링턴가의 충실한 심복이자 집사이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다. 그러나 그 달링턴가도 어느덧 쇠망하고 미국인 갑부인 페러데이에게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넘겨졌다. 페러데이는 한 번도 달링턴 홀을 떠난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잠깐 동안의 여행을 권유한다. 고심 끝에 스티븐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회고 속에 1920~30년대의 유럽 사회와 달링턴 홀, 그리고 스티븐스의 과거가 잔잔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는 흐른다.
 
언젠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벤타 하인학교>를 읽으며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학교를 찾은 주인공 보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면에서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속의 인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당혹감은 더 크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계급적’ 위치 때문에 ‘집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이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그 어떤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프로페셔널’한 집사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큰 듯하지만…. 글쎄 스티븐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의 자부심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고자 아버지의 임종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놓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가! 그러면서도 ‘나는 집사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며 계속 되뇌는 모습은 끝끝내 비겁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토록 위대하게 우러러본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또 어떤 사람인가. 달링턴 경이 지시한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스티븐스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한 사람이고 등장인물에게 몰입이 돼야 하는데 스티븐스는 이런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답답한 인물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서정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스티븐스는 여행에서의 회상을 통해 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겠지만 그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얼마나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가 여전히 달링턴 홀에서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를 위해 또 다른 봉사를 열심히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스티븐스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많이 지나갔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참 짧아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번쯤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 혹은 후회. 무언가 일이 좀 잘 안 풀릴 때 인간은 특히 그렇다. 요즘의 내가 딱 그렇다. ‘잘 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자주 찾아온다. 스티븐스와는 정반대의 고민이다.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와 비교하면 적어도 나는 그처럼 ‘허망한 일’, ‘허상’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든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잘 못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드는 걸까. 내 ‘지나온 날’은 그런데 내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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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오류를 집어내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스티븐슨이 아니라 스티븐스
랍니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이 (조금)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맨부커상 수상의 광휘 때문이 아닐까요.

잠자냥 2017-10-13 11:5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줄기차게도 스티븐*슨*이라고 해놨네요. ㅎㅎ 수정해야겠습니다.
영화가 원작보더 더 유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영화덕을 톡톡히 본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고요. ㅎㅎ

공쟝쟝 2021-07-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얽ㅋㅋㅋㅋ 저만 별 세갠줄 알았는데 여기 별 세개 또 있는데 잠자냥님ㅋㅋㅋ 그쵸? 스티븐스 할ㅈㅐ여… 앞으로의 나날은 일이 전부인 삶이 아니기를..

잠자냥 2021-07-04 23:50   좋아요 1 | URL
으윽 저 이 작품 별로 안 좋아해요. 스티븐스 노예 근성 어쩔….;
 














“질툰가 봐. 바보같이. 고양이를 너무 예뻐한다고 질투를 하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친 거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 44쪽)

말도 안 돼. 인간이 한낱 동물을 두고 질투를 하다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그 동물을 상대로 질투를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질투를 한다. 샘을 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아마 강아지든 고양이든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질투, 아니 샘을 내는 행동은 인간의 그것에 비해 단순하고 순수하다. 자기와 같은 종(강아지든 고양이든 때로는 그 둘을 포함하는 포유류든)을 향한 질투라면 왜 자신의 주인이(또는 집사가) 다른 녀석을 더 예뻐하는 걸까? 왜 다른 녀석의 간식이 더 맛나 보일까? 왜 나보다 다른 녀석이랑 더 잘 놀아주는 것 같을까? 등등. 만일 질투의 대상이 자신과 다른 종, 즉 인간이라면 뭐랄까 그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서 ‘아앙 나도 예뻐해 줘.’ 정도에 그친다.

이에 비해 인간의 질투는 때로는 무시무시하다. 겉으로는 한낱 동물에 인간인 내가 질투를 할쏘냐? 싶지만 그 속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다른 인간도 아닌 ‘동물’이라는 미미한 존재에 질투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분노한다. 아니 내 경쟁 상대가 강아지라니!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왠지 저놈의 고양이를 더 아끼고 예뻐하고 사랑하다니!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고양이의 가느다란 눈이, 강아지의 동그란 눈이 더 얄미워 보인다. 보통, 인간은 동물보다는 머리가 좋은 까닭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이용하기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를 비롯해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의 <암고양이>에는 바로 이런 유치하지만 솔직한, ‘고양이’를 향해 질투에 불타오르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두 작품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이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암고양이>는 연인 사이에 끼어든(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남자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여자가 맞을 것 같다) 고양이라는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질투와 인간의 광기를 그린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집사의 신분으로 이 두 작품은 좀 더 흥미롭게 읽혔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 가까운 짧은 소설이다. 늘 여자의 몸에 대한 찬미와 극한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치고는 꽤 건전(?)하고 담백하며 아기자기한 편이다. 검색 사이트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진을 찾아보면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 묘사가 꽤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고양이가 어떤 자리를 좋아하고 어떤 습성을 지녔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이 사랑스러운지 참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서 아,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정말 고양이를 오래 키워봤구나 싶어진다. 아래와 같은 묘사에서는 키득키득 웃음도 나온다. 아니, 이거 완전 우리 고양이들 이야기잖아!

리리가 현관이든 방문이든 창호지문이든 미닫이문이기만 하면 사람처럼 열 줄 아는 것을 보고 쇼조는 이렇게 똑똑한 고양이는 드물다나 뭐라나 극성이었다. 그렇지만 이 한심한 짐승은 문을 열 줄만 알지 닫을 줄은 몰라서 추울 때 들락거리고 나면 일일이 닫아야 했다. (54쪽)


이 작품에서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특유의 탐미적인 시선은 엿보인다. 물론 다른 작품에 비하면 매우 담백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찬탄과 탐미의 대상은 여성인 ‘후쿠코’나 ‘시나코’가 아닌 고양이 ‘리리’이다.

짐승이 어떻게 저런 애정 어린 눈길을 할까…. 그때 쇼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두운 벽장 안에서 번쩍이는 그 눈은 이제 장난꾸러기 새끼고양이가 아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교태와 요염함과 애수를 띠고 있는 여인의 눈처럼 보였다. 쇼조는 여자가 아이 낳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그 여인이 젊고 예쁘다면 틀림없이 이처럼 원망하듯 애절한 눈빛으로 남편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68쪽)


고양이에 대한 이런 묘사로만 그친다면 어찌 다니자키 준이치로이겠는가. 그는 ‘리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두고 벌어지는 ‘쇼조’와 ‘시나코’, ‘후쿠코’의 갈등을 미묘하고도 생생하게 그린다. 고양이 키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어쩐지 그 밖의 일은 젬병인 쇼조. 그는 현재 후처인 후쿠코와 함께 ‘리리’를 키우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처인 시나코가 후쿠코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키우던 고양이 ‘리리’만 보내달라는 것이다. 쇼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인 리리를 이용해 전남편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보려는 속셈이 깔려있다. 쇼조는 어쩌면 후쿠코보다 ‘리리’를 더 아끼고 사랑할지 모른다면서 은근히 후쿠코의 신경을 건드리는 시나코. 시나코의 작전은 과연 성공할지, 쇼조는 시나코와 후쿠코 또는 ‘리리’ 사이에서 어떤 존재를 최후에 선택할 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들의 이런 복잡한 감정싸움에는 아랑곳없이 유유자적 느긋하게 자기 본연의 삶을 즐기는 ‘리리’가 어쩐지 최후의 승자 같은 느낌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뜨의 <암고양이>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 비하면 더 강렬하고 파괴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섬뜩하기도 하다. 관능적인 면에서도 어쩌면 이 작품만큼은 꼴레뜨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앞선다.

“내가 당신들 둘을 봤어!”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침마다, 당신이 저쪽 작은 벤치에서 밤을 보낼 때… 해뜨기 전, 당신네 모습을 봤어, 단둘이….” 그녀는 떨리는 팔을 뻗어 테라스를 가리켰다. “둘이 함께 앉아서… 당신네들은 내가 말을 해도 듣지도 못했지! 그렇게 서로 뺨을 맞대고 앉아서…”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 <암고양이>, 147쪽)


위 인용문은 연인이 다른 사람과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한 게 아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당신네’들이란 ‘남편’과 고양이 ‘사아’이다. ‘사아’의 주인 알랭과 결혼한 까미유는 알랭을 온전히 그녀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알랭이 그토록 사랑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몹시 아름다운 암고양이 ‘사아’이다. 결혼과 함께 ‘사아’가 둘 사이에서 사라지는 듯했지만 알랭은 고양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까미유와 새로 꾸린 가정으로 ‘사아’를 데리고 오고 만다. 까미유의 불타는 질투는 거침없이 타오르고, 그 질투는 광기로 치닫는다.

“어떤 고양이라도 자기가 저놈을 사랑하는 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야.” 알랭은 계산된 솔직함을 보였다. “그 어떤 여자도.” 까미유는 흥분하여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그 어떤 여자도 저 암고양이만큼은 사랑하지 못할 거야.” “맞는 말이야.” 알랭이 대답했다. (146쪽)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까미유의 지나친 질투(그러니까 어쩌면 그저 동물일 ‘고양이’를 향한)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내 고양이들을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양이를 광적으로 질투하고 그 고양이가 사라지길 바라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을 과연 전처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알랭도 그럴 거야. 이렇게 심정적으로 알랭에게 조금 더 기울어져서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딘가 또 불편한 마음이 든다.

알랭은 정말 까미유를 사랑하는 걸까? 단지 결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때문에 질투하는 그녀를 나쁜 여자로 몰아가면서 자신이 결혼에서의 어떤 우월한 지위,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갖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알랭은 ‘사아’를 한없이 순수한, 그러므로 영혼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설정해놓고 그 대척점에 ‘까미유’를 놓았다. 때문에 그토록 순수한 존재인 고양이를 질투하는 까미유는 이상하고 괴물 같은, 나쁜 여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도 계속해서 유년의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알랭의 태도는 과연 바람직할까? <암고양이>는 이렇듯 ‘질투’라는 큰 흐름 속에 결혼제도가 갖는 모순과 또 그 제도가 빚어내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그려냄으로써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와는 또 다른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냥이 녀석들이 자꾸만 다가와서 의자 아래서 야옹야옹 울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부비부비하면서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이 녀석들은 내가 책상에 앉아서 뭐만 하려고하면 이 모양이다. 컴퓨터에 질투를 하는 걸까? ‘집사야! 이 네모난 뜨거운 거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나랑 놀자!’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고양이 관련 사진집이나 에세이, 만화책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고양이를 소재로 삼은 문학 작품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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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2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졸라의 《테레즈 라캥》, 포의 《검은 고양이》에 공통으로 나오는 죄 지은 사람들은 고양이를 싫어해요. 죄책감에 시달리니까 고양이 눈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착각해요.

잠자냥 2017-10-12 14:57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고양이를 직접 키워보니 녀석들의 그 신비로운 눈이 뭐랄까 정말 인간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는 느낌이랍니다. ㅎㅎ
 
그것 세트 - 전3권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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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담꾼이자 이야기꾼이 틀림없는 스티븐 킹. 손가락에 입이 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특히 3권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빼어난 서술에서는 탄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킹 담당 편집자라면 한 400쪽은 덜어내자고 했을 듯. 물론 그점이 그의 장점이겠지만... 영화도 꽤 잘만들었음을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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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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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고 아픈 책. 여자의 몸이 단지 생산을 위한 ‘그릇’으로 쓰이는 암울하고도 끔찍한, 서늘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아니 그런데 이 디스토피아는 잘 생각해보면 그리 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여자의 몸은 출산 도구로서 국가가 임신과 낙태를 '관리'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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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민음사 세계시인선 3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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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네트 154편이 다 실린 게 아닙니다... 154편 다 읽어보고 싶으신 분은 다른 소네트 책으로 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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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9-2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 열린책들에서 나온 거 사놨는데
살펴보니 다 실려있네요.
좋은 정보 얻었어요^^

잠자냥 2017-09-29 12:55   좋아요 1 | URL
네~ 다행이네요. 전 이 책을 몇 년 전 북페스티벌에서 싸게 판매하기에 당연히 다 있을 줄 알고 덥석 집어왔다가 낭패;; 뒤늦게 알라딘 상품 정보에서 찾아봐도 발췌 수록이란 정보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습니다. ㅎㅎ

cyrus 2017-09-2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 나온 《악의 꽃》, 《말도로르의 노래》도 완역본이 아닙니다. 《말도르르의 노래》 완역본이 있긴 한데, 절판됐어요.

잠자냥 2017-09-29 14: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잘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