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자기만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더욱이 그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잣대로는 ‘연인’이라고 인정받기 어려운 관계라면? 그래서 몇 십 년을 함께 살아왔음에도 그 연인의 죽음 앞에서 ‘연인’이 아닌, 마치 절친한 ‘친구’가 죽은 것처럼 슬픔 앞에서도 연기를 해야 하며, 심지어 그의 장례식장조차 혹시라도 무언가 폐가 될까봐 자연스레 참석하지 못한다면?
연인을 잃은 사람이라면 마음껏 울 수 있다. 그것이 연인 사이라는 관계의 특권이기도 하다. 단, 그 관계는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러니까 ‘이성애’이자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관계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의 사랑은 숨겨 마땅하다. 슬픔을 과도하게 드러내거나 죽은 연인을 지나치게 그리워하거나 애달파하는 것 모두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기에 정당히 슬퍼할 권리조차 없는 것이다.
여기 그런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조지. 58세의 대학 교수. 이제 얼마 뒤면 예순을 바라보는 그는 얼마 전 오랜 세월을 함께한 연인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 그런데도 그의 슬픔은, 상실감을 드러내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처럼 눈을 뜨고 출근해서 학생들 앞에 선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 뒤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겉으로는 그 어느 때와 아무것도 다를 바 없는 하루. 그런데 그의 마음속은 공허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그의 연인이었던 ‘짐’의 부재,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이 불현듯 찾아오기 때문이다. 조지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조지’와 ‘짐’ 두 ‘퀴어’는 어떤 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또 어떤 이- 그러니까 ‘관용’이라는 ‘예의범절’을 배운 교양 있는 중산층에게는 ‘관용’을 너그러이 베풀어서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 이들 앞에서 조지는 짐이 죽음으로써 영원히 자기 곁을 떠났다고, 슬픔을 드러내며 통곡할 수 없다. 그저 짐이 사정이 생겨서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났다고 말한다. ‘관용’을 베푸는 이들은 게이들의 사랑을 이렇게 보기도 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성장과정에서 뭔가 잘못되어서 정상적인 애정을 누리지 못하고 ‘대용품’을 찾는 이들이라고. 그러니까 불쌍한 존재라고.
조지는 말한다. 그러나 스트렁크 부인, 부인이 읽는 책은 틀렸어요. 그 책에는 내가 짐을 진짜 아들, 진짜 동생, 진짜 남편, 진짜 아내의 대용품을 생각한다고 적혀 있죠. 그러나 짐은 무엇의 대용품이 아닙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짐의 대용품도 없습니다. 어디에도요. (<싱글 맨>, 27~28쪽)
짐의 부재를, 조지만큼 뼈저리게 느낄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런데도 조지는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들에게 ‘짐’은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짐’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조지’가 또 그런 존재였으리라.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 맨>은 이렇게 연인의 죽음 뒤 덤덤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슬프다.
조지는 집에서 편하게, 지금 산 재료로 저녁을 만들고, 책꽂이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서서히 잠드는 밤을 상상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집에서 만족스럽게 보내는 저녁으로는 더할 수 없이 그럴싸하고 멋진 장면 같다. 그러나 금세 조지는 그 장면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허점을 발견한다. 그 그림에 빠진 것은 짐이다. 소파 맞은편에 반대로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짐. 각자 책에 몰두하고 있지만, 서로 상대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두 사람. (<싱글 맨>, 117쪽)
“그렇지만 내 친구는 애완동물을 아주 많이 키웠는데, 그 애완동물들이 우리 삶을 점령했던 것 같지는 않아.... 물론 둘이 함께일 때에는 다르지. 우리는 자주 동의하곤 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없으면 동물을 키우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싱글 맨>, 172쪽)
그 슬픔이, 때로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진실로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싱글 맨’ 조지가 이 작품을 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분신. 아니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셔우드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작품 활동을 했다. 그리고 조지처럼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동네도 이셔우드 자신이 살았던 곳과 비슷하다고 하다. 더욱이 <싱글 맨>을 쓸 무렵 이셔우드의 나이는 극중 인물인 조지와 똑같이 58세였다. 물론 이셔우드는 조지가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고, 조지 같은 인물을 정말 존경하지만 그처럼 기댈 곳이 없다면 자신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조지’와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셔우드 그 자신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싱글 맨> 말고도 일찍이 <베를린이여 안녕>,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와 같은 작품에서 사회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이방인들, 국외자들의 삶을 그린 바 있다. <베를린이여 안녕>,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이 두 작품은 ‘베를린 이야기’ 연작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차이가 있다면 <노리스 씨>는 장편이며 <베를린이여 안녕>은 중단편집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193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이셔우드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 만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 그린다.
<베를린>이나 <노리스 씨>의 화자는 틀림없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를 떠오르게 한다. 두 작품의 화자는 이셔우드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으로서 베를린에 머물면서 그곳 사람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셔우드는 동성애자임을 자각한 뒤 영국에서 중상류층이자 엘리트 계층에 속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그 무렵 ‘동성애자들의 도시’였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물론 <베를린>이나 <노리스 씨>의 화자는 작품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싱글 맨>의 조지처럼 뚜렷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독자는 화자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여성 인물들과 무척 친밀하지만 절대로 ‘로맨스’는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숨은 동성애자인 프레그니츠 남작과 야릇한 분위기를 풍긴다. 또 화자가 젊은 게이 커플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베를린 밤 문화를 즐기는 모습 등에서 쉽사리 그의 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다.
<베를린> 연작을 읽노라면 1930년대 베를린이 동성애자들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히틀러와 나치가 떠오르면서 그들은 그 좋은 시절을 뒤로하고 얼마나 탄압받게 되는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동성애자이자 외국인이라는 ‘영원한 이방인’의 눈으로 그와 닮은 또 다른 이방인의 삶을 따스하고 연민어린 시선으로 담아낸다. <노리스 씨 >에서 화자인 ‘윌리엄 브래드쇼’가 모두가 사기꾼일 거라고 말하는 ‘노리스’를 끝까지 믿고 아껴준 까닭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나’가 베를린을 결국 떠날 때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든다. 어딘가에서 또 이방인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에. 그리고 그 이방인은 미국으로 옮겨와 <싱글 맨>의 조지가 된다. 눈에 두드러지는 탄압은 없지만 여전히 사회 속에서 조지는 이방인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그 이방인들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투명인간이 아님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 이방인들의 아픔, 슬픔, 고독, 때로는 기쁨도, 그러니까 그들의 삶 자체가 전혀 ‘퀴어’하지 않음을 알린다. 모두 똑같다고. 만일 그 이방인들의 삶이 퀴어하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퀴어라고. ‘정말 너무나 퀴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