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서상국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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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가 출간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얼마 뒤 도서관에서는 이메일로 답신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귀하께서 신청하신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는 2012년에 출간된 책으로 출판연도가 오래되어(5년 이상) 희망도서 신청대상에서 어긋납니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판단하여 비치하도록 결정했습니다.’ 나는 메일을 한참 들여다봤다. 내가 바란 대로 이 책을 구입한다고 하니 기뻤는데,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부분에서 이 메일을 쓰거나 또는 그렇게 결정하기로 한 사서의 생각이 궁금해진 것이다.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판단했을까?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나는 그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2010년인가 도블라토프의 <여행 가방>을 읽고 나서 그 뒤로 그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나오길 바랐다. 신간알림 신청을 해 둘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가끔 도블라토프 이름으로 검색해보곤 했는데, 딱히 신간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럴 것 같은 기미도 안 보였고. 그래서 더 이상 검색해 보기를 그만뒀던 것 같다. 그렇게 내 관심이 시들해졌을 즈음인 2012년에 <외국 여자>가 조용히 출간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만지’ 시리즈로 나왔던 터라 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이 책을 이 땅에 출간된 지 6년 만에 읽게 된 셈이다.

도블라토프의 유머를 좋아한다. 과장 없이 심드렁하게, 무미건조하게 힘을 쫙 뺀 그 유머러스함. <외국 여자>에서도 특유의 그 유머는 첫 장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의 첫 장인 ‘108번가’에는 미국으로 이민 온 러시아 이민자들 여럿이 소개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루샤 타타로비치’도 있지만, 첫 장에서는 108번가의 이민자들을 스케치 하듯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런데 그 면면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워서 낄낄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그 이민자들의 삶은 하나 같이 ‘추락’이다. 그들 대부분이 소련에서는 잘 나가던 학자이거나 화가, 사회평론가, 인권 운동가, 예술가 등이었지만 이제 그들이 미국에서 하는 일은 자기의 예전 직업과는 상관없는, 허드렛일이 전부이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국가에서 평생 살아온 이들이 자본주의 최정점의 사회인 미국에서 느끼는 당혹감 또는 이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책의 판매는 시들했다. 조국 소련에서는 자유가 없었으나 대신 독자들이 있었다. 이곳 미국에서는 자유가 충분했으나 독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13쪽)

미국은 카라바예프를 실망시켰다. 이곳에서는 소련의 정권도 없고 마르크스주의도 없고 그를 처벌할 징벌 기관도 없었다. 카라바예프는 투쟁할 그 어떤 대상도 없었다. (19쪽)


108번가에 사는 사람들이 짧게 소개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리야 타타로비치(마루샤)’가 소개된다. 마루샤는 소련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계 생산 콤비나트의 총지배인이며 어머니는 시내에서 가장 큰 드레스 제조 공장을 경영한다. 마루샤의 부모는 출세지향 주의자들이 아니었음에도 운이 따라서 줄곧 승승장구한다. 러시아인이며, 당원이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술에 취해 있지 않아야만 ‘노멘클라투라 상위층’에 오를 수 있는데, 마루샤의 부모는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덕분에 실제로 노멘클라투라의 상위층에 오르게 된다. 그 부와 지위의 수혜자는 물론 딸 마루샤이다. 마루샤는 이렇게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정의 한 일원으로 부족함 없이 자란다. 그러나 계속해서 마루샤가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이야깃거리라곤 없을 것이다.



누구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 대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자주 생각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더 자주 자기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37쪽)


마루샤는 바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 바로 사랑. 마루샤는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유태인 ‘체흐노비체르’가 그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와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어 도피 행각을 벌이다가 이민을 가게 되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딱히 아니다. 아무튼 이 사랑을 시작으로 해서 마루샤의 기구한 인생은 시작된다. 서른 살이 되기까지 마루샤의 인생은 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나머지 모두는 불쾌함이었다. 그녀에게 만족이라는 것은 꽃이요, 레스토랑이요, 사랑이요, 수입할 물건이었으며, 음악이었다. 불쾌한 것은 돈이 없는 것, 비난하는 소리, 질병 그리고 죄책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불쾌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이 실패로 끝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실패의 조짐이 보이자, 마루샤는 인기 가수인 바람둥이 남편 라주달로프에게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그 심각한 때 도블라토프의 유머는 또 한 번 터진다.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아내를 주제삼아 라주달로프는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강으로
빠져 죽으러 갈 것이면,
내게 안녕을 고하러 와 주오.
내가 그대와 함께 강으로 가서
가장 깊은 곳을 가르쳐 주리다.  (56쪽)


몇 번의 결혼 실패 끝에 소련에서의 삶이 지난해진 마루샤는 결국 다른 곳, 다른 삶을 꿈꾸며 그즈음 소련 사회에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이민’이라는 것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자본주의 최정점 세계인 미국에 안착하게 된다. 그런데 그 미국은 낯설기 짝이 없다. 때로는 넘치는 자유가 공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적 삶에 적응해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바라는 진짜 인생은 더 멀어지기만 한다. 마루샤는 마치 ‘친척의 별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르건 늦건 간에 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녀는 잘 먹었고 건강했다. 옷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것은 진짜 삶이 아니라 당원들을 위한 휴양지에서의 삶’과 같았다. 이런 삶 같지 않은 삶을 위해 그렇게 멀리 왔어야만 했는지 그녀에게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스스로 주위를 둘러봐. 나는 우리 이민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들 모두는 비즈니스 출장 온 사람들 같아. 모두의 손에 2루블 40코페이카가 들려 있지.” (121쪽)

“미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방인이에요. 우리의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이방인이란 말입니다.” (161쪽)


아무리 손에 많은 돈을 쥐고 있어도 마치 2루블 40코페이카만 갖고 비즈니스 출장을 온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민자들.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언제나 ‘이방인’으로 머무르고 마는 이민자들. 그들의 삶이 마루샤라는 한 여인을 통해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루샤는 어쩐지 부모님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또한 쉽지 않다. 미국에서 그녀는 영원히 ‘이방인’이지만,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소련 정부 관련자들은 그녀를 마찬가지로 ‘외국 여자’ 취급하면서 배신자 운운한다. 어떤 사람은 마루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신은 전형적으로 서구화되어 버린 이민 여성이에요.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루샤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볼셰비키에게 강간을 당한 러시아 그 자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서구화 되어 버린 이민 여성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는 누구일까? (95쪽)


마루샤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녀는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온갖 남자들의 구애를 받고 한바탕 소동을 치르는 마루샤. 어떤 의미로든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해피엔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실제로 그리 암울한 결말은 아니다. 게다가 이 책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미국에 사는 외로운 러시아 여인들에게- 사랑, 슬픔 그리고 희망을 담아 바칩니다.’라고. 때문에 이 작품의 말미는 ‘희망’에 방점을 두고 있다. 도블라토프의 <여행 가방>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또한 이민자들의 영원히 이방인 같은 삶을 그리지만 그 끝이 결코 암울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마루샤를 비롯해 108번가에 사는 이민자들 모두가 앞으로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갈까 하는….

마루샤가 보석 디자인 수업을 받으려고 간 곳에서 그곳을 운영하는 ‘힉비’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10년 넘게 화가가 되려고 공부했어요. 그런데 불행한 보석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이것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나요?”(74쪽). 마루샤의 삶도, 다른 모든 이민자들의 삶도 생각해보면 모두 그러하다. 소련에서는 자기만의 직업과 꿈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떤 사태를 만나거나 또는 상황의 여의치 않아 미국으로 쫓기듯 달아나 이민자,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외국 여자>를 읽다 보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그 어떤 체제에서도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의 서글픈 삶이 그려진 듯해 웃다가도 슬퍼진다. 도블라토프 문학의 장점은 이렇게 소시민들의 삶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애잔하게 담아내지만 결코 암담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낄낄 웃다가도 어쩐지 쓸쓸해지는 그런 작품. 도블라토프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꼭 한 번은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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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1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사서가 대단한 결정을 하셨네요. 아마도 그 사서는 편견 없이 책의 문학적 가치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펴봤을 것입니다. ^^

잠자냥 2018-06-18 17:46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그래서 그 사서와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더라고요. 하하하하.

Falstaff 2018-06-1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글을 읽으니 갑자기 호기심이 팍팍, 페널티킥을 앞에 둔 골키퍼처럼 아드레날린이 마구 뿜어져나오네요. ㅋㅋㅋ
메모해놓았습니다.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잠자냥 2018-06-19 17:32   좋아요 1 | URL
네! <여행 가방>도 함께 추천합니다. ㅎㅎ

케이 2018-06-1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잘 계시지요? 여전히 올려주시는 리뷰 잘 보고 있는 케이입니다. 이 책 리뷰 보니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지금 읽는거 다읽으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8-06-19 17:36   좋아요 0 | URL
네 케이 님도 잘 지내시지요? ㅎㅎ 이 책 읽어 보신 뒤에 마음에 드신다면... <여행 가방>도 추천해 드릴게요.ㅎㅎ
 
톨레도의 유대여인 - 5막의 역사 비극
프란츠 그릴파르처 지음, 이관우 옮김 / 써네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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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비극을 읽는 느낌. 그런데 비극적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국왕의 태도가 막판에 너무 허무하다. 독일어권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받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기대보다는 싱거웠다. 국내 초역작을 읽은 것에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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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서상국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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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 온 러시아 이민자들의 삶이 웃기면서도 쓸쓸하게, 애잔하게 그려진다. 마루샤는 미국에서도 ‘외국 여자‘이고 조국 소련에게도 ‘외국 여자‘가 된다. 마루샤의 운명처럼 어쩌면 인간은 사회주의에서도 자본주의에서도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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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교회 대한민국 권력 비판 3부작
김진호 외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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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흥미진진하게(그러나 열 받아가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태극기집회에 십자가와 성조기가 등장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한국 개신교는 어쩌다가 이땅의 민주주의가 퇴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적폐 세력이 되었는지도. 1장(강남순)과 3장(한홍구)이 특히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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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글은 아프다. 서걱서걱 부서질 듯 건조하기만 한데 당신의 글은 왜 그다지도 아픈가? 당신의 글은 투박하고 거칠다. 때로는 초등학생이 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당신의 글은 한없이 아프고 참혹하리만치 어두운데도 계속 찾아 읽게 된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어제> <아무튼>과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들던 생각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 작품에 왜 그렇게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는지도 이해할 만했다. 그 책을 읽은 뒤로 나 또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가장 긴 편으로 나머지는 대부분 단편 모음집이거나, 장편이라고 해도 그 분량이 매우 짧다. 그의 글을 마음껏 읽고 싶다는,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던 참에 <문맹>을 읽게 되었다. <문맹> 또한 매우 짧다. 때문에 읽고 난 뒤에도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빚어낸 문장 속에서 한없이 헤엄치고 싶은, 문장 위를 계속 떠다니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삶과 아픔, 그 안에서 비롯된 쓰기와 읽기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의 글이 왜 그토록 아픈지, 그리고 때로는 초등학생이 쓴 듯한 문장임에도 왜 그토록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지.



나는 읽는다. 그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 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전쟁이 막 시작됐다. (9쪽)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 병 아닌 병에 걸린다. 독서라는 불치의 병. ‘아주 어린 나이에, 알아챌 새도 없이,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아고타 크리스토프 또한 그 병으로 인해 비난이나 경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의 독서 병은 대개의 경우 비난이나 경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매일 읽기만 해.”
 “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저건 소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야.”
 “저건 게으른 거지.”
그리고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을 하는 대신에 읽기만 해.” (13쪽)


독서라는 이 불치의 병에 걸린 이들은 또한 거의가 무언가를 끼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병 까지 더불어 얻게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예외는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이때부터 서서히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안식이자 위로가 된다.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린 동생을 놀리는 거짓말을 지어내서는 동생을 울리곤 한다. 열네 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더욱 내밀해지고, 고통을 어루만지는 이 세상의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34쪽).



침묵이 강요된 이 시간 동안, 나는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을 쓰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아무도 읽지 못하게끔 비밀 문자를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일기에 나의 불행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를 밤마다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적는다. 나는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이제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의 집을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 무엇보다 나는 자유를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 (32쪽)


조국인 헝가리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의 글은 어떤 색채를 지니게 되었을까? 헝가리에서 살아갔더라도 아마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으리라. 그런데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게 되면서 그의 글은 분명 한없이 어두워진다. 헝가리에서 모국어로 글을 썼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82쪽)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자신이 확신하듯이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그는 글을 썼으리라.

조국을 떠난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에 비밀 작문 노트뿐만 아니라 처음 쓴 시들도 놓고 왔으며 그곳에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잘 있으라거나 또 보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1956년 11월 말의 어느 날,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그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89~90쪽)


그 뒤로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는 삶,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그런 삶이 스위스에서 시작된다. 너무 안전해서 오히려 서글픈 삶. 그런 삶 속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시계 공장에 나가 일하면서 시를 쓴다. 그런 생활에서 나오는 글들이라면 무미건조하고 거칠며 투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그 글에는 뭔가를 간절히 그리는, 노스탤지어가 한없이 묻어나오는 애잔한 슬픔이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실과 어머니의 부엌에서 느꼈던 그 냄새들이 한없이 그리워는 그런 글.



아버지의 교실에서는 분필, 잉크, 종이, 고요함, 침묵, 눈(雪)의 냄새가, 여름에도 풍긴다. 어머니의 넓은 부엌에서는 도살된 짐승, 삶은 고기, 우유, 잼, 빵, 젖은 빨래, 아기의 오줌, 부산함, 시끄러움, 여름 열기의 냄새가, 겨울에도 난다. (19쪽)


뜻하지 않게 조국을 떠나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나라의 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살아간 사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53쪽)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가 그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97쪽)

망명자로서의 경험과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날카로운 펜으로 건조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그 자신이 당한 시련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어제>처럼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절망적이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이 그러했기에 그 세계관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됐으리라. 그런데도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있다. 그가 쓴 글들이 한없이 매력적인 까닭은 바로 그 단순하고 명징한 언어로 삶의 고통을, 그 진실을 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문맹>에는 그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읽기와 쓰기, 망명자로서의 삶의 기록이 또 한 번 진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글은 또 한 번 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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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0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0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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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1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잠자냥님 굿뜨!!!!

잠자냥 2018-10-11 10:59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제 서재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관련 글을 읽으셨나 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