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멘 호수.백마의 기사.프시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4
테오도어 슈토름 지음, 배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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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슈토름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독일 문학은 지루하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이 책도 언젠가는 읽어보겠다고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다. 도서관 신간 도서 코너에서 깨끗하고 산뜻한 모양새로 나를 반기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빨리 읽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을 빌릴 때 모두 다섯 권을 대출했는데, 이 작품을 가장 나중에 읽었다. 도서 반납 기간이 다 되어가서 읽을까 말까? 그냥 가져다줄까? 고민하다가 부랴부랴 읽었는데, 웬걸. 이번에 빌려온 다섯 권 가운데 가장 좋았다.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프시케' 세 작품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작품인 '임멘 호수'를 몇 장 읽지 않고도,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이미 ‘아, 이 책을 그냥 반납해했다면 정말 아까울 뻔 했구나.’ 생각했다. 어느 노인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 때문에 실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는 낭만적이고도 한없이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마치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동화는 시작부터 조금은 쓸쓸하다.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 든다.

소꿉친구인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 어린 라인하르트에게 세계는 온통 엘리자베트이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보호해야 할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피어나는 그의 인생에서 모든 사랑스러움과 경이로움을 의미했다’('임멘 호수', 22쪽). 라인하르트는 직접 쓴 동화나 시를 엘리자베트에게 들려주며 언젠가는 그녀와 함께 인생을 꿈꾼다. 그렇지만 그 어린 아이 눈에도 어쩐지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만 같다. 산딸기를 찾아 숲속을 온통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듯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 조금씩 성장하고 공부 때문에 고향을 떠나게 된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트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으며 남다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변하고 만다. 라인하르트가 선물했던 홍방울새가 죽고 그 자리를 에리히가 선물한 카나리아가 차지하고 있듯이.


“집에 오래된 노트가 있어. 거기에 온갖 노래와 시를 써넣곤 했지. 하지만 그만둔 지 오래야. 책갈피에 에리카 꽃 하나가 꽂혀 있어. 하지만 시든 거지. 그걸 누가 나한테 줬는지 알아?”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풀잎만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임멘 호수', 52쪽)


시든 에리카 꽃. 붙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위의 수련. 세월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듯 온갖 자연 속 사물로 상징되면서 안타깝고도 애상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엘리자베트, 저 푸른 산 뒤에 우리의 청춘이 있었어. 그 청춘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라인하르트의 이 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순수했던 시절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거의 예외 없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임멘 호수'는 순진무구한 첫사랑이 이런저런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도 읽는 내내 그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남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백마의 기사'는 슈토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어디선가 백마를 탄 하우케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듯하다. 이 작품 또한 액자 구성으로 이루어지기에 백마를 탄 기사가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다. ‘백마의 기사’는 제방을 지키는 유령 기사의 이야기다. 안개 자욱한 바닷가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백마를 탄 기사 이미지 때문에 작품 초반 분위기는 몽환적이면서도 조금 으스스하다. 그런데 이윽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조금 뜻밖이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 제방에만 온통 관심을 쏟은 하우케 하이엔- 그는 집이 가난하여 제방감독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본인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 뜻하지 않은 기회 등으로 그 자리에 오르고 만다.

그러나 미신과 전통을 굳게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우케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태도는 반감을 불러오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하우케는 이성과 기술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며 주위 사람들의 반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간 데는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컸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 오만하며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는 태도는 그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며 그 불신에 기묘한 소문이 덧붙여지면서 그와 그의 가족은 더욱 고립되고 만다. 스산한 분위기 때문에 하우케에게 불행이 덮칠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 말 때는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연민이 솟구친다.

'임멘 호수'가 서정적 낭만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면 '백마의 기사'는 전설과 미신이 많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과 이성과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인 하우케의 대립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담담한 어조로 전한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인 하우케를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성적이고 계몽적이기에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존재, 이제까지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존재, 그래서 낯선 존재를 향해 사람들은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조금씩 믿어간다. ‘난폭한 사람이나 악독하고 고집불통인 성직자를 성인으로 만들거나, 단지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사람을 유령이나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백마의 기사', 212쪽) 했는데, 바로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슈토름은 어릴 때부터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동화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전설이나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여느 전설이나 동화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서정미가 넘친다. 자연을 무척 사랑했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는 슈토름의 빼어난 솜씨에서 한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테오도어 슈토름- 이제야 처음 만났지만 다른 작품도 더 궁금해지는 그런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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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제가 잠자냥 님의 꽁무니를 촐래촐레 쫓아다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거기에 매력이 가득하다면 기꺼이~...늘 땡큐요^^

잠자냥 2019-01-12 17:11   좋아요 1 | URL
ㅎㅎ 좋은 책은 많은 사람이 읽으면 더 좋은 거니까요. 모쪼록 즐거운 독서되시길~!
 

무더운 여름날엔 오싹오싹 공포물도 좋지만, 나처럼 공포물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추리물이 어떨까? 태풍이 지나간 뒤 이제는 장마처럼 비가 내려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7~8월 여름에는 추리 소설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추리’라는 장르 문학은 어릴 때나 좀 환장했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아주 가끔 읽는 정도랄까.

꽤 오래(?) 전에 열린책들에서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가  나오면서 다시 추리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시리즈가 맨 처음 내세웠던 야심찬 계획과는 달리 중간에 엎어지는 바람에 추리 소설에 다시 싹텄던 애정도 시들해져버리고 말았다. 매그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면 야금야금 한 권씩 모아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다. 최근 다시 나오기 시작한 버전은 왠지 예전 디자인이나 판형에 비해 소장욕구가 떨어진다(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음).

올해, 내 인생 최고의 폭염을 만나, 책읽기도 시들해질 무렵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다가 손을 대기 시작한 게 M.C.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이다. 사실 이 시리즈는 알라딘 굿즈 변색 맥주컵 받을 욕심에 장르 소설 검색하다가 흥미가 생긴 책이었다. 시리즈 11권 째인 <잔소리꾼의 죽음>이 이벤트 대상도서였다. 이걸 사볼까 하다가, 시리즈라면 처음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이 시리즈 1, 2권에  해당하는 <험담꾼의 죽음>과 <무뢰한의 죽음>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오호라, 재미있는데? 이 시리즈 하나씩 다 사서 봐야겠다. 일단 이벤트 대상 도서 <잔소리꾼의 죽음>부터 사보자 했는데, 그 사이 왕자의 게임과 어슐러 르 귄 맥주컵은 품절되고 말았다. 흐흐흑...... -_-;  그럼에도 굿즈 덕택에 이 시리즈를 발견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읽다 보니 문득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가 떠올랐다. 두 시리즈 모두 소장욕을 불러일으키는 일관된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물론 매그레 반장은 이제 바뀌었다. 옛날 디자인 돌려다오!), 무엇보다 표지 디자인과 작고 부담 없는 사이즈가 마음에 든다. 둘 다 가벼운 크기라 갖고 다니기에 좋다. 여행 떠날 때 한 두 권 챙겨가서 읽기 좋다고나 할까? 실제로 예전에 나는 터키로 한 달 가까이 여행을 떠났을 때 매그레 반장 시리즈를 여러 권 챙겨서 갖고 갔는데,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고 틈틈이 읽기에 좋았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챙겨갔던 책은 다 읽고 왔다. 해미시 시리즈도 매그레 시리즈처럼 딱 그런 크기다.

‘해미시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물론 아직 난 이 시리즈 가운데 달랑 두 권 읽은 게 전부라 이런 말하는 게 좀 웃기기도 하지만), 모든 시리즈가 <~~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통일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읽은 첫 권 <험담꾼의 죽음>과 두 번째 권<무뢰한의 죽음>을 보자. 제목에서 이미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험담꾼이든, 무뢰한이든 죽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작품 초반에 아, 이 사람이 죽겠구나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험담꾼의 죽음>은 스코틀랜드 북부 작은 마을 ‘로흐두’의 여름 낚시 교실에 여덟 명의 참가자가 모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가운데 지독한 험담꾼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곧 죽을 운명임을 독자는 제목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권인 <무뢰한의 죽음>은 <험담꾼의 죽음> 이후 약 1년이 흐른 뒤, 같은 로흐두 마을이 배경이다. 여기에서도 진짜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의 무뢰한이 등장하고 그가 곧 죽을 것임을 독자라면 다 알게 된다. 그런데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1, 2권 모두 읽어보니 ‘로흐두 마을’에는 어떤 일을 계기로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이 모이고, 이윽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죽는다. 물론 살인이다. 살해당한 사람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알고 보면 하나 같이  죽일 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일견 무능력해 보이는 순경 ‘해미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사람들을 관찰하고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해미시’나 심농의 ‘매그레 반장’이나 둘 다 심드렁하게 사건 현장을 어슬렁거리다가 (과학적 수사, 치밀 수사와는 약간 거리가 먼 ㅋㅋㅋㅋ) 직감수사로 사건을 해결하는 유형이랄까. 때문에 추리 장르에 밝은, 정교한 두뇌 게임을 펼치는 묵직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해미시 시리즈’나 ‘매그레 시리즈’ 모두 무척 싱거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싱거움, 바로 그 헐거움에 매력을 느낀다.

맥베스 순경도 매그레 반장처럼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영 미덥지 못한, 과연 실력이 있기는 있나 싶을 정도의 분위기를 풍긴다. 나이는 맥베스 순경이 매그레 반장보다 한참 어린 축으로 30대 중반이며, 직업은 경찰인데 부업으로 때때로 밀렵도 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시골에 있는 집에 몽땅 보낸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커피며 음식이며 얻어먹고 다니는(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싫어하기도 한다) 식충이 이미지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완전 무사태평주의자랄까.

그런데 바로 그 완벽하지 않은 듯한 모습 때문에 이 시리즈 주인공인 맥베스 순경에게 호감이 간다. 매그레 반장이 그랬듯이 말이다. 매그레 반장은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고, 그저 덩치 큰 중년 유부남으로 특출하고 비범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저 인간적이고 수더분한 사람이랄까. 맥베스는 매그레보다는 그런 점이 좀 덜한데. 그 또한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둘 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고독하기 짝이 없는 마초남 ‘필립 말로’나 대실 해밋 작품 속 탐정들과는 꽤 거리가 먼 이미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간다.

매그레 시리즈는 매그레 반장의 범죄자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배경에 주목한다. 물론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 또는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배경을 눈여겨보기는 한다. 그런데 그 시각은 매그레 시리즈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매그레 시리즈가 보통 인간의 불쌍한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해미시 시리즈는 인간의 속물스러움에 주목한다. 살해당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결국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범죄에 얽히고 만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캐릭터들의 개성 넘치는 면면을 살펴보는 재미는 해미시 시리즈가 좀 더 앞선다.

무엇보다 해미시 시리즈를 자꾸 더 읽고 싶게 만드는 요인은 로맨스! 1권인 <험담꾼의 죽음>에서는 그 로맨스가 로맨스로 발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2권 <무뢰한의 죽음>에서 본격적으로 로맨스 분위기를 탔네 탔어! ‘닳아빠진 경찰 제복만 벗으면 근사한 미남자’인 맥베스 순경과 로흐두 마을 지주의 딸 프리실라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정말 궁금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계속 정주행할 것 같다. 매그레 반장님에게는 로맨스가 없었기에 중간에 빼먹은 작품도 몇몇 있다. 하하하. 

1985년 첫 선을 보인 ‘해미시 순경 시리즈’는 지금까지 본편 33 권과 두 편의 외전까지 합해서 모두 35권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는데, 이제 거기에 나도 동참. 매그레 시리즈처럼 이 시리즈는 중간에 엎어지는 일 없이 끝까지 다 번역되어 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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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미시 시리즈 순서 대로 읽어야 하나요?

아직 시작은 하지 않았는데 궁금해서요 ^^

잠자냥 2018-08-27 19:17   좋아요 1 | URL
네 이 시리즈는 매 권 사건은 서로 연관이 없는데 시리즈마다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서로 좀 스토리가 얽혀있어서 처음부터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ㅎㅎ
 
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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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노동에,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 자기만의 이렇다 할 공간 없이 여기저기서 글을 쓴 작가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심지어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협박) 아래 작품을 대신 써주기까지! -_-;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줄곧 써 내려간 대단한 그녀들. 다만 이 책 자체는 거의 인상 비평에 그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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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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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조선에 살던, 퀴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온갖 변태들의 초상. 그 모습이 생생히 펼쳐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상과 비정상’ ‘규범과 변태’를 정의하는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이다. ‘성적, 인종적, 계급적 위계들을 오락으로 만듦으로써 지배질서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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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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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이다. <설국>의 내용은 가물가물해졌어도, 이 첫 문장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아름답다. 어떻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지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설국>은 읽는 내내 그 담백한 아름다움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나 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곤 했다.

<산소리>또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설국>만큼 아름다운 작품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소리>도 <설국> 못지않게 아름답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잊기 힘든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된다.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있지도 않다. 62세 노인이 주인공으로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 사그라지는 것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잔잔한 ‘소멸’ 이야기에 왜 그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는 신고의 나이에 이를 것이며, 그때가 되면 나 또한 그처럼 사그라지는 생을 쓸쓸히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고는 올해 나이 예순둘.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흰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유 없이 피를 토할 때도 있다. 게다가 어느 날은 40년 내내 손에 익었던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루하루 이렇게 쇠락해 가는 그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들린다는 ‘산소리’까지 들려온다. 신고는 불안하기만 하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일이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 나이가 되도록 삶은 신고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아들 슈이치는 자신이 꾸린 가정은 뒷전이고 외도를 일삼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 후사코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내려온다. 알고 보니 사위는 술과 마약에 절어 자살 소동까지 벌인 판이다.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좋은가 하면, 애초부터 신고는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사랑했던,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대상은 아내의 언니- 그러니까 처형이었다. 처형 대신 아내를 선택한 그였으니, 결혼 생활이 애틋할 리 없다. 게다가 이제는 신고도 아내 야스코도 모두 예순을 넘긴 나이라, 부부 사이에 육체 접촉이라고는 그저 코를 골며 잠든 아내 코를 잡고 뒤흔들 때뿐이다.

자식들도 불행해 보이고,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니 그다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신고에게 그나마 유일한 위로가 되는 사람은 며느리 기쿠코뿐이다. 신고는 또 한 번 금기의 대상을 향한,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을 넘나든다. 오래 전에 처형을 연모했듯이 다 늙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며느리에 대한 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신고는 다정다감하기 짝이 없는 시아버지로 딸 후사코조차 아버지는 못생긴 자신보다 기쿠코를 아낀다고 불평을 토로할 정도이다.

아내 야스코 또한 신고의 며느리 사랑이 남다르다고 누누이 말할 정도이다. 다만 둔감한 탓인지 신고 마음속 깊이 감춰진 욕망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아들, 그러니까 기쿠코의 남편인 슈이치는 모르는 척 눈 감았을 뿐이지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내만을 아껴주지 못하고 외도를 일삼는지도 모르겠는 그. 그런 아들 때문에 남몰래 속앓이하는 며느리가 가엾기만 한 신고는 아들의 외도 상대를 떼어놓기 위해 홀로 애쓴다. 


자식의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감각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신고에게도 조금 이상했지만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야스코의 언니를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고 나서 한 살 연상인 야스코와 결혼한 신고였다. 그런 자신의 이상(異常)이 생애의 저변을 흐르고 있어서 기쿠코를 위해 분개하는 것일까? (165쪽)


며느리를 욕망하는 시아버지라니?! 소름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을 읽노라면 솔직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고가 금기의 대상에게 느끼는 욕망은 곧잘 꿈속에서 형상화되곤 하는데, 꿈속에서도 신고가 욕망하는 바로 그 대상이 아닌 그 사람을 상징하는 다른 인물로 대치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꿈과 현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신고만이 기쿠코에게 묘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기쿠코도 시아버지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하지만 신고도 기쿠코도 금기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위하고 챙겨줄 뿐이다. 이 알 듯 모를 듯한 관계,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이 조금만 넘어서도 ‘막장’이 될 수 있는 관계가 사뭇 쓸쓸하고도 애처롭게 보이고, 그런 일가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한없이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리라.

신고의 기쿠코를 향한 욕망은 잃어버린 젊은 날에 대한 욕망으로 읽히기도 한다. 기쿠코가 유부녀임에도 어린아이 같은, 덜 성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기 때문이다. 기쿠코는 젊은 날의 처형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이토록 늙어버린 신고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대상. 젊은 시절의 자기와도 같다. <산소리>는 이처럼 덧없이 사라져간 청춘, 늙어간다는 것의 고독과 상실감, 쓸쓸함, 그러면서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욕망을 섬세하게 그린다.

슈이치와 기쿠코는 어떻게 될지, 큰딸 후사코는 영영 이대로 신고의 집에 눌러살지, 신고와 기쿠코의 관계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이 작품은 선뜻 이렇다 할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코 밝지만은 않은 그들의 앞날이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 채, 평범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듯, 매우 일상적인 모습으로 잔잔히 끝맺는다. 다만, 그러는 사이에도 신고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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