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엔 오싹오싹 공포물도 좋지만, 나처럼 공포물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추리물이 어떨까? 태풍이 지나간 뒤 이제는 장마처럼 비가 내려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7~8월 여름에는 추리 소설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추리’라는 장르 문학은 어릴 때나 좀 환장했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아주 가끔 읽는 정도랄까.

꽤 오래(?) 전에 열린책들에서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가  나오면서 다시 추리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시리즈가 맨 처음 내세웠던 야심찬 계획과는 달리 중간에 엎어지는 바람에 추리 소설에 다시 싹텄던 애정도 시들해져버리고 말았다. 매그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면 야금야금 한 권씩 모아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다. 최근 다시 나오기 시작한 버전은 왠지 예전 디자인이나 판형에 비해 소장욕구가 떨어진다(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음).

올해, 내 인생 최고의 폭염을 만나, 책읽기도 시들해질 무렵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다가 손을 대기 시작한 게 M.C.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이다. 사실 이 시리즈는 알라딘 굿즈 변색 맥주컵 받을 욕심에 장르 소설 검색하다가 흥미가 생긴 책이었다. 시리즈 11권 째인 <잔소리꾼의 죽음>이 이벤트 대상도서였다. 이걸 사볼까 하다가, 시리즈라면 처음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이 시리즈 1, 2권에  해당하는 <험담꾼의 죽음>과 <무뢰한의 죽음>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오호라, 재미있는데? 이 시리즈 하나씩 다 사서 봐야겠다. 일단 이벤트 대상 도서 <잔소리꾼의 죽음>부터 사보자 했는데, 그 사이 왕자의 게임과 어슐러 르 귄 맥주컵은 품절되고 말았다. 흐흐흑...... -_-;  그럼에도 굿즈 덕택에 이 시리즈를 발견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읽다 보니 문득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가 떠올랐다. 두 시리즈 모두 소장욕을 불러일으키는 일관된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물론 매그레 반장은 이제 바뀌었다. 옛날 디자인 돌려다오!), 무엇보다 표지 디자인과 작고 부담 없는 사이즈가 마음에 든다. 둘 다 가벼운 크기라 갖고 다니기에 좋다. 여행 떠날 때 한 두 권 챙겨가서 읽기 좋다고나 할까? 실제로 예전에 나는 터키로 한 달 가까이 여행을 떠났을 때 매그레 반장 시리즈를 여러 권 챙겨서 갖고 갔는데,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고 틈틈이 읽기에 좋았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챙겨갔던 책은 다 읽고 왔다. 해미시 시리즈도 매그레 시리즈처럼 딱 그런 크기다.

‘해미시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물론 아직 난 이 시리즈 가운데 달랑 두 권 읽은 게 전부라 이런 말하는 게 좀 웃기기도 하지만), 모든 시리즈가 <~~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통일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읽은 첫 권 <험담꾼의 죽음>과 두 번째 권<무뢰한의 죽음>을 보자. 제목에서 이미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험담꾼이든, 무뢰한이든 죽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작품 초반에 아, 이 사람이 죽겠구나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험담꾼의 죽음>은 스코틀랜드 북부 작은 마을 ‘로흐두’의 여름 낚시 교실에 여덟 명의 참가자가 모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가운데 지독한 험담꾼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곧 죽을 운명임을 독자는 제목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권인 <무뢰한의 죽음>은 <험담꾼의 죽음> 이후 약 1년이 흐른 뒤, 같은 로흐두 마을이 배경이다. 여기에서도 진짜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의 무뢰한이 등장하고 그가 곧 죽을 것임을 독자라면 다 알게 된다. 그런데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1, 2권 모두 읽어보니 ‘로흐두 마을’에는 어떤 일을 계기로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이 모이고, 이윽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죽는다. 물론 살인이다. 살해당한 사람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알고 보면 하나 같이  죽일 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일견 무능력해 보이는 순경 ‘해미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사람들을 관찰하고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해미시’나 심농의 ‘매그레 반장’이나 둘 다 심드렁하게 사건 현장을 어슬렁거리다가 (과학적 수사, 치밀 수사와는 약간 거리가 먼 ㅋㅋㅋㅋ) 직감수사로 사건을 해결하는 유형이랄까. 때문에 추리 장르에 밝은, 정교한 두뇌 게임을 펼치는 묵직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해미시 시리즈’나 ‘매그레 시리즈’ 모두 무척 싱거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싱거움, 바로 그 헐거움에 매력을 느낀다.

맥베스 순경도 매그레 반장처럼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영 미덥지 못한, 과연 실력이 있기는 있나 싶을 정도의 분위기를 풍긴다. 나이는 맥베스 순경이 매그레 반장보다 한참 어린 축으로 30대 중반이며, 직업은 경찰인데 부업으로 때때로 밀렵도 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시골에 있는 집에 몽땅 보낸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커피며 음식이며 얻어먹고 다니는(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싫어하기도 한다) 식충이 이미지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완전 무사태평주의자랄까.

그런데 바로 그 완벽하지 않은 듯한 모습 때문에 이 시리즈 주인공인 맥베스 순경에게 호감이 간다. 매그레 반장이 그랬듯이 말이다. 매그레 반장은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고, 그저 덩치 큰 중년 유부남으로 특출하고 비범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저 인간적이고 수더분한 사람이랄까. 맥베스는 매그레보다는 그런 점이 좀 덜한데. 그 또한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둘 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고독하기 짝이 없는 마초남 ‘필립 말로’나 대실 해밋 작품 속 탐정들과는 꽤 거리가 먼 이미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간다.

매그레 시리즈는 매그레 반장의 범죄자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배경에 주목한다. 물론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 또는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배경을 눈여겨보기는 한다. 그런데 그 시각은 매그레 시리즈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매그레 시리즈가 보통 인간의 불쌍한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해미시 시리즈는 인간의 속물스러움에 주목한다. 살해당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결국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범죄에 얽히고 만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캐릭터들의 개성 넘치는 면면을 살펴보는 재미는 해미시 시리즈가 좀 더 앞선다.

무엇보다 해미시 시리즈를 자꾸 더 읽고 싶게 만드는 요인은 로맨스! 1권인 <험담꾼의 죽음>에서는 그 로맨스가 로맨스로 발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2권 <무뢰한의 죽음>에서 본격적으로 로맨스 분위기를 탔네 탔어! ‘닳아빠진 경찰 제복만 벗으면 근사한 미남자’인 맥베스 순경과 로흐두 마을 지주의 딸 프리실라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정말 궁금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계속 정주행할 것 같다. 매그레 반장님에게는 로맨스가 없었기에 중간에 빼먹은 작품도 몇몇 있다. 하하하. 

1985년 첫 선을 보인 ‘해미시 순경 시리즈’는 지금까지 본편 33 권과 두 편의 외전까지 합해서 모두 35권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는데, 이제 거기에 나도 동참. 매그레 시리즈처럼 이 시리즈는 중간에 엎어지는 일 없이 끝까지 다 번역되어 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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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미시 시리즈 순서 대로 읽어야 하나요?

아직 시작은 하지 않았는데 궁금해서요 ^^

잠자냥 2018-08-27 19:17   좋아요 1 | URL
네 이 시리즈는 매 권 사건은 서로 연관이 없는데 시리즈마다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서로 좀 스토리가 얽혀있어서 처음부터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