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문고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이 나오고 있다. 선집 가운데는 이미 다른 곳에서 출간된 책으로 읽은 작품(<치인의 사랑>, <열쇠>, <소년>, <슌킨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작품(<금빛 죽음>, <요시노 구즈>, <미친 노인의 일기>)도 있다. 앞으로 더 출간될 예정인 듯한데,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아닐 수 없다. 좋아한다는 말에 물음표를 붙인 까닭은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즐겨 읽는다고 말하기에는 뭐랄까 좀 멋쩍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쑥스럽다고나 해야 할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주로 여체의 미학에 탐닉하는 이야기에, 사디즘과 마조히즘, 페티시즘, 관음증 등등 인간의 이상(異常) 성욕을 다룬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이상(異常)이라는 말에도 물음표를 덧붙이고 싶기는 하다. 저런 기호들을 모두 정상을 벗어난 행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결정하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인간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타인과 다른 성적 기호나 욕망이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시즘, 관음증 등등이 정상을 벗어났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나 싶어진다.

이런 소재를 곧잘 다루기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잘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그걸 읽는 사람마저 ‘변태’로 오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전철에서 그의 작품 중 <치인의 사랑>이나 <열쇠>, <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와 같은 책의 어느 한 구절을 읽는다고 치자. 흘끔흘끔 옆 사람이 내가 읽는 책의 한 구절을 본다면 그는 나를 변태 같은 책을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읽은 <미친 노인의 일기>도 공공장소에서 보기에는 어쩐지 멋쩍은 부류에 속한다. 이 작품에는 노환으로 고생하는 77세의 노인이 등장한다. ‘미친 노인’이란 바로 그를 말한다. 그는 무엇에 미쳤을까? 상당한 재력가이자, 노환으로 매일 같이 병상일지를 쓰는 그가 미친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며느리 ‘사쓰코’이다. 아내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고, 자식들하고도 대면대면하다. 가족 구성원이나 그 관계를 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소리>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이쪽이 훨씬 파격적이고 에로틱하다. 실제로 이 노인과 며느리는 서로 주고받는 말부터가 심상치 않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예사롭지 않게 반말을 하는데,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자신을 욕망하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이용해서 태연자약하게 사치품을 뜯어낸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이 노인은 며느리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탐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발’을 욕망한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며느리의 발밑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고자 기이한 일을 벌이게 된다. 이 부분에 이르면 ‘허허허, 인간의 욕망이란! ’하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 <미친 노인의 일기>는 육체적 쇠락과 성불능 상태에서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그중에서도 발에 대한 과도한 집착(페티시즘), 이런 에로티즘이 시들어가는 한 인간에게 어떤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친 노인의 일기>는 발 페티시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오래전에 읽은 ‘후미코의 발’이라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편을 떠올리게 하며, 노인이 젊은 여성에게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여든에 가까운 노인이 20대의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그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며 행복에 빠져 사는 이야기로,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당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한편, 일기 형식으로 쓰였다는 점에서는 <열쇠>가 생각나기도 한다. <열쇠>는 남편의 일기와 아내의 일기가 번갈아 등장하는데, 부부가 서로 일기를 훔쳐본다는 전제 아래 서로의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물론, <미친 노인의 일기>에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엿보이는데,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며느리 사쓰코와 그녀를 숭배하느라 얼빠진 짓도 서슴지 않는 노인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치인의 사랑>이나 <만(卍)>이 아닐까 싶다. <치인의 사랑>의 ‘조지’와 ‘나오미’가 그 전형인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런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 절대적인 숭배를 받고자하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은 물론 아름다운 대상을 숭배하며 굴종하는 노예근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이런 변태적(?) 작품만 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설>과 <그늘에 대하여>를 읽으면 그에게 이런 면모도 있구나, 그래서 ‘대문호’로 불리는구나 끄덕끄덕하게 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 <세설>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정말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심심하게 다룬다. 오사카 몰락한 명문가 집안 네 자매의 일상생활이 잔잔하게 그려질 뿐이다. 그 안에서 그 시절 일본 문화라든지 생활상이 놀랄 만큼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죽 읽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연 묘사와 함께 그 자연물에 빗대어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하는데, 읽는 순간 아, 하는 감탄이 나온다. <세설>처럼 고전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분위기에, 문장이 무척 아름다운 작품으로 앞서 언급했던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도 있다.

한편, <그늘에 대하여>는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졌는데, 이 책에서 ‘그늘’이라고 옮긴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나 건축문화에 스며있는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딱히 건축문화로만 정의 내릴 수는 없는데,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세설>이나 <그늘에 대하여>를 읽노라면 별것 아닌 소재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이런 작품들을 읽노라면 단순히 여체 숭배에 집착한 초기 작품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고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전통미를 탁월하게 결합했다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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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2019-06-13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니다키 준이치로가 쓴 작품을 좋아합니다. 하나씩 읽어나가고 있어요.

잠자냥 2019-06-13 13:31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좀 변태작가처럼 인식된 게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말이지요. ㅎㅎ

다락방 2020-06-0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인의 사랑>을 사려고 둘러보다 잠자냥 님의 과거 페이퍼를 보게 되네요. 저는 작가의 이름, ‘다니다키 준이치로‘를 외우고 있지 못했는데, 밑에 링크해두신 책들을 보니 어쩌나요, <미친사랑>과 <만, 시게코토 소장의 어머니>를 읽었고 <열쇠>를 가지고 있네요?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번 접한 작가라니, 부끄럽기 짝이없습니다. 후훗. 치인의 사랑 땡투합니다, 잠자냥 님. 얼마전에 읽은 책에서 치인의 사랑을 욕했던 것 같아 궁금해졌거든요. 우에노 지즈코 였던가... 아무튼 땡투 받으세요!

잠자냥 2020-06-01 09:18   좋아요 0 | URL
<치인의 사랑> 사셨어요? 아니되옵니다. 그것은!!!! <미친 사랑> 읽으셨다고 하셨지요?
<미친 사랑>이 바로 <치인의 사랑>이에요. 원제 <癡人の愛 >!! 어서 취소하세요.ㅎㅎ
<미친 사랑> 읽으셨다면 아마 ‘나오미‘라는 어린 소녀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지 취향에 맞는 여자로 키워서 잡아먹는 변태남 이야기 기억하실 텐데요.

잠자냥 2020-06-01 09:23   좋아요 0 | URL
우에노 지즈코가 아마 엄청 욕했을 거 같아요. 다니자키 준이치로 대부분의 작품이 여성들이 읽기에는 좀(?) 역겨운 면이 있지요. 그럼에도 저는 줄기차게 읽기는 합니다. ㅎㅎ
아마 최근에 읽으신 <롤리타>처럼 이 <미친 사랑/치인의 사랑>도 다락방 님이 읽으시면 분노하실 지점이 여러 부분 있을 거예요.
<치인의 사랑/미친 사랑>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이라는 <겐지 이야기>에서 좀 차용한 것 같기도 해요. <겐지 이야기>가 어린 소녀 데려다가 자기 취향에 맞는 여성으로 키워서 잡아먹는 -_- ‘겐지‘라는 인간 이야기이거든요.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일본 고어로 된 이 오래된 소설을 직접 현대 일본말로 옮겨서 풀어낸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뉴욕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이용자가 도서관 직원과 통화를 하고 있다. 통화 내용으로 이 도서관은 한 사람이 한 번에 50권의 책을 1년 동안 대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라워라! 직원은 자신이 대출한 책들이 궁금한 이용자에게 목록을 일일이 불러준다. 또 다른 이용자는 유니콘에 대해 궁금한지 그에 관한 책을 문의한다. 직원은 유니콘에 대해 자신이 아는 한에서는 이런저런 정보를 준다. 이윽고 카메라는 다른 곳을 비춘다. 도서관 로비로 짐작되는 곳에서 한 남자가 수많은 청중을 앞에 세워두고 강연을 하고 있다. 사회자가 있는 걸 보니, 저자 강연쯤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은? 리처드 도킨스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니, 또 한 번 놀란다. 이곳은 뉴욕공립도서관이다.

지난 주말에 본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Ex Libris - The New York Public Library>는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면서 볼 수 있는 대단한 영화다. 다큐멘터리인 데다가 장장 3시간을 넘는 상영시간 때문에, 혹시 지루하지나 않을까? 재미없는 게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당신이 책덕후라면, 그리고 도서관, 또는 서점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얻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영화가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다큐멘터리를 딱히 즐기지 않을뿐더러 긴 상영시간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러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처음 몇 장면만으로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함께 본 친구들이 모두 책덕후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도서관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 도서관은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도서관이 아니다.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곳이며 가끔 그 책을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이 영화는 완전히 깨뜨려버린다. 앤드류 카네기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도서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고, 그의 기부에서 출발해 뉴욕공공도서관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오늘날까지 민간자본과 공공기금(시 예산)이 결합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 배움의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놀랍고 부럽기 그지없다. 리처드 도킨스나 엘비스 코스텔로, 패티 스미스 등 저자를 직접 초빙해 강연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저자와의 만남 같은 자리는 우리나라 도서관도 종종 벌이는 행사이니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고 치자(물론 강연자가 저런 이들이라는 게 놀랍고 부럽기는 하다). 그런데 뉴욕도서관은 92개 분관 곳곳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미술 컬렉션 전시회는 물론 온갖 특별한 강연과 음악회, 공연 등이 이루어진다. 정보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인터넷을 무료로 대여해주기도 하며, 방과 후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또 다른 교육과 돌봄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들보다 더 어린 유아들의 보육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점자/음성 도서관인데 이곳에서는 점자 읽는 방법과 점자를 타자로 치는 방법을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여 교육한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제작과정도 상세히 보여준다. 차이나타운에 마련된 분관은 중국인들을 위해 영어 교육과 컴퓨터 교육 등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어떤 분관에서는 직업 소개와 취업을 알선해주기도 한다. 도서관이 지식을 나누고 배움의 장이 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누리고, 지역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북돋으면서 그들의 삶이 진일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책을 보관하는 일, 즉 과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만들어가는 것이다.

도서관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오면서 이런저런 점들을 고려했지만 그중에 무엇보다 도서관과 아주 가깝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걸어서 2~3분이면 도서관이다. 우리 도서관에서도 소소한 행사를 한다. 그러나 내가 주로 이용하는 시스템은 도서 대출과 도서 신청 등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나는 도서관을 매우 잘 이용하는 편에 속한다. 학교 다닐 때도 강의실을 비롯해 캠퍼스 그 어떤 곳보다도 도서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수업 시간보다도 이렇게 앉아서 읽은 책에서 얻은 게 더 많았다. 적어도 지금의 나를 이룬 부분 가운데 ‘좋은 점’들은 도서관에서 얻은 게 많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공간보다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라면 <뉴욕라이브러리에서>에서 드러나는 도서관의 온갖 기능과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살아 숨 쉬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이들의 열정이 가슴 뜨겁게 다가올 것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토니 모리슨은 도서관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말했으며 또 어떤 이는 ‘구름 속의 무지개’와도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호기심과 열정으로 이끄는 공간’이다. 뉴욕도서관은 지식과 정보의 고른 확산과 평등한 분배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구름 속의 무지개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어디 뉴욕도서관만 그러하겠는가, 이 땅을 비롯해 전 세계 수많은 도서관들이 지금도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책과 도서관이 매우 큰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닐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해 이런저런 작가와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어떤 순간에는 프리모 레비의 말이 인용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장 주네의 <도둑일기>가 언급되기도 하며, 오디오북 제작 과정에서 읽히는 책은 다름 아닌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이런 코드들을 찾아서 음미하는 즐거움도 무척 클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는 읽을 날을 미루기만 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당장 읽고 싶어진다. 우선은 도서관과 관련하여 <세계의 도서관>이라는 이 매혹적인 책부터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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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0-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3시간 짜리 다큐라니, 금방 막내릴 텐데 빨리 검색해서 예매해야겠는걸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8-10-22 13:25   좋아요 0 | URL
네- 상영관도 그다지 많지 않아요;; 네이버에서는 상영관 검색하면 안나오기는 하는데, CGV 예술 영화관 같은 곳에서도 상영 중입니다.

2018-10-22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2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8-10-2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꼭 봐야겠네요~~~
살아 움직이는 도서관!
생생한 소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8-10-23 11:23   좋아요 1 | URL
네, 도서관 사서분들이 보셔도 굉장히 많은 영감을 얻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잠자냥 2018-10-23 11:43   좋아요 1 | URL
상영관 검색 해보셨나요?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대한극장/메가박스 정도만 나올 텐데 CGV압구정/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등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세실 2018-10-23 11:57   좋아요 0 | URL
넹~~ 서울, 인근은 대전에서 하네요.
아쉽게도 청주는 안하네요.

잠자냥 2018-10-23 12:01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댓글 달고 아차 했습니다. 제가 너무 서울 중심으로 생각했네요. ^^;;
기회가 될 때 언제고 한번 보세요. ㅎㅎ

공쟝쟝 2018-10-2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영화 보고 싶어요

잠자냥 2018-10-24 09:35   좋아요 1 | URL
저는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보고싶더라고요. ㅎㅎ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세요.
 
[eBook] 미친 노인의 일기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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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를 욕망하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와 비슷하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이라 그런지 노골적이다. <산소리> 에로틱버전이랄까.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에로티시즘은 삶의 마지막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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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0
루돌프 V.예링 지음, 윤철홍 옮김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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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빵을 먹을 수 없”듯이 “당신은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다. 고별 강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차고 뜨거운 예링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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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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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대형 쇼핑몰에서 나는 본다. 부부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음식점은 이미 만원이고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내는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쁘고 아이는 아이대로 제 또래와 노느라 정신이 없다. 바로 그때, 나는 남편의 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권태와 짜증,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아내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내는 통화중이라 남편의 시선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남자는 아내를 더없이 증오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봐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들도 한때는 사랑을 했겠지. 그러니까 아이도 낳으며 함께 살고 있겠지. 그래, 그들도 한때는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만이 간직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테니스코트. 하필이면 테니스코트다. 폴과 수전은 테니스코트에서 만난다. 나는 슬쩍 미소 짓는다. 문득 내 이야기가, 나의 단 하나의 이야기, 아니 너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너를 테니스코트에서 만났듯이, 폴과 수전도 테니스코트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테니스공을 쫓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럼에도 유독 너만은 눈에 들어왔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함께 팀을 이룬 폴과 수전은 게임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게임하는 방식, 포핸드 백핸드 공을 치는 법,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 코트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서로를 파악한다. 너와 내가 그러했듯이. 테니스코트에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폴과 수전처럼 우리는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을 본다. 나와 너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에 비하면 폴과 수전의 사랑은 조금 뻔해 보인다. 그런데 폴과 수전 또한 그들 나름대로 경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진부해 보이리라.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일 것이다. 자신들은 범주와 표시를 다 벗어나 있다’(27쪽)고 생각하는.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절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사랑이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흐지부지되었을지언정, 또는 애초에 시작도 못했거나 자기 혼자만의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었을지언정, 이 세상에 존재했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지금 여전히 사랑을 지속중인 사람이라면 그가 떠올리는 장면들은 대개 장밋빛이리라. 사랑에 빠진 폴처럼 그 또는 그녀의 웃음, 웃는 방식에 주목하고, 폴에게 수전의 이빨이 남다르게 다가왔듯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소한 신체적 특징 또는 결점(다른 이에게는 결점으로 보이더라도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매력인!)에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미 끝났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랑이 자기 삶에서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그 기억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우리 참 행복했는데”하고 말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우린 진짜로 행복했던 적이 없어.” 말하듯이, 끝난 사랑은 대개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289쪽).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331쪽)이기 때문에. 감정적 기록은 역사책과는 달리 그 진실은 항상 변하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기 때문에(289쪽). 


<연애의 기억>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못지않게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의 부정확한 기억이 빚어내는 생의 희비극에 대한 반스의 통찰은 이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빛을 발한 적이 있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고, 어쩌면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억(착각)하는 남자의 제멋대로 부풀려지거나 또는 축소된 기억, 즉 윤색된 기억. 진실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기억의 엉킴으로 인한 삶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폴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와 닮았다. 철저히 폴의 관점에서 그려진 수전은 토니가 묘사한 베로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젊은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그런 그에게 토니의 선생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이런 말들은 한 사람의 일생, 즉 개인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다. 역사와는 달리 한 사람의 일생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때문에 나이 든 토니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할 때 그 역사는 곧 한 사람의 생이 된다. 누군가의 삶은 주로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결국 평범한 이들의 회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애의 기억>속 폴의 사랑 이야기가 된다. 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한 기만일 수도 있는 어느 사랑의 역사….  


폴이 기억하는 그의 첫사랑은 처음에는 눈부시다. 도발적이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이라는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부모의 잔소리 또는 암묵적인 협박, 미스터 매클라우드와 그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의 존재 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까지. 첫사랑의 역사에 어울릴만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폴의 관점, 폴의 처지에서 그렇다. 폴보다 삶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이해한 여자, 그래서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수전, 그녀에게는 폴이 첫사랑도 아닐뿐더러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은 위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수전에게 사랑이란 그녀가 희미하게 언급했던 첫사랑이 사라진 뒤 미스터 매클라우드를 거쳐 폴에 이르는 동안 내내 어떤 고통을 싹틔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매클라우드와 함께할 때부터 있었던 음주벽이 그녀의 그런 쓸쓸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수전의 이야기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으므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수전이 폴을 바라보며 ‘내 평생 어디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을 때 수전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폴은 첫사랑의 눈부신 기억을 쫓는다. 거기에는 행복한 기억도 괴로운 기억도 존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행복했던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운 사랑의 흔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고독하게 지낸 한 남자의 인생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 수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한다. 폴처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사랑이 끝난 뒤라면 더욱 그렇다. 비탄에 잠겨 자기의 역사, 이제 끝나버린 어느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그 생생한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에, 그것이 식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이다. 끝이 좋지 않아서 ‘나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에도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은 포함된다. 수전을 기억하는 폴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쁜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에 자국을 남긴다. 좋은 쪽에 남기기도 하고, 나쁜 쪽에 남기기도 한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테고 저마다 개별의 하나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 개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이어져 하나의 삶이 된다. 아내를 더없이 증오에 찬 눈으로 쏘아보던 남자. 그 남자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분명,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도로 증오하는 듯한 한 쌍.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한 쌍.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75~76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야기는 모두에게 곧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이자, 단 하나의 인생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폴이라는, 그리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 팔짱을 낀 채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폴이 늙고, 수전은 더 늙고, 그들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사랑이, 자신들은 틀림없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그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 그래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한 사랑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는 참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쓸쓸하고도 비통했다. 사랑이 그렇듯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찬란하리라고, 나의 사랑과 삶만큼은 타인과 다를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진실은 친절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오듯이, 인생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닳아버린 세대’가 될 즈음에 그런 깨달음은 더 깊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폴과 수전은 사랑했고, 사람들 또한 사랑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 때문에 행복하거나 또는 괴롭거나 할 것이다. 나와 너의 기억이 어떻게 다르든 모든 연인은 진실을 말하며, 사랑과 진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진실 속에 사는 것’(243쪽)이기에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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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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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