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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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다고 소설을 잘 쓰게 될 일은 없다. 이 책은 설터의 문학관이나 그가 읽은 책,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다만 설터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쓴 단편이나 장편의 탄생 배경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 보너스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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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4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메리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치버와 카버와 또 있죠? 잠자냥 덕에 알게된 작가들, 잠자냥님 글 덕에 제가 서재의 달인 같은 영예를 안았네요 감사드리고 잠자냥님도 축하드립니다 건강이 최고!

잠자냥 2018-12-24 18:17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 덕분에 서재의 달인이 되셨다니요! 그런 말씀 마시고요~ ㅎㅎ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가족과 함께 재미난 책 많이 읽으시고 좋은 글 계속 쓰세요!
 
[eBook]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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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글을 쓰는 법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다만 그 말을 하기까지 너무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엮은 책이라, 우리나라 현실이나 한국어와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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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마 사운드를 사용한지 몇 달 지났다. 내가 전자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기도 버거웠지만 무엇보다 전자책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은 조금 뜻밖이었다. 여름 밤,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창문을 열고 책을 읽노라면 제아무리 방충망이 있다하더라도 어디선가 온갖 벌레들이 날아 들어온다. 불을 끄고 책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전자책을 떠올렸다. 그래서 전자책리더기를 검색하다 알게 된 크레마 사운드는 작은 사이즈에 예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자책과의 만남. 처음에는 기계만 사두고 잘 활용하지 못했다. 사둔 종이책을 읽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전자책리더기에 이렇다 할 콘텐츠를 담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을 떠날 일이 있었는데, 아, 내게 전자책이 있었지! 하고 잊었던 존재를 기억해냈다. 그런데, 전자책을 구매하다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사고 싶은 책이 드물구나! 콘텐츠가 빈약하다. 읽고 싶은 책 가운데 전자책으로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나온다하더라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점 등등. 그래도 가끔 사고 싶은 책들이 있기는 하더라.

그리하여 나는 요즘 곧잘 전자책을 읽는다. 창을 열고 불을 끈 채 읽어보기도 했다.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벌레의 양은 확실히 줄었다. 어쩌면 여름이 다 지난 시점부터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할 때는 꽤 유용하다. 이런저런 책을 얇고 가벼운 기기 안에 쏙 담아서 갖고 다닐 수 있어 든든하다. 어떤 책을 읽다가 좀 지루하거나 여행지에서 읽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금세 다른 책으로 넘어가도 된다. 비행기나 전철처럼 좁은 공간에서 읽기도 편하다. 한 손에 잡고 엄지로 톡톡 페이지를 넘기면 되니까.

그런데, 이토록 편한 기계에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일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읽어도 내가 얼마큼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만큼 남았는지 쉽사리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더욱이, 나는 전자책을 읽을 때는 글자크기를 120% 정도 키워서 읽는다. 그러면 전체 쪽수는 그에 맞춰서 늘어난다. 종이책으로 500쪽인 책은 700쪽 이상으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전자책을 읽을 때는 내가 지금 읽는 페이지가 전체 페이지 중 몇 쪽에 해당하는지 자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120/800, 321/783, 이런 식으로 읽다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때로는 목차까지 다시 확인해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의 어느 부분에 내가 속해 있는지 안다는 것,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게 독서에서 이토록 중요할 줄이야.

요즘 읽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이 책도 전자책으로 구매했다)에서 아, 하고 무릎을 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근거로 전자책은 ‘뭔가 재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자책에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마디로 그것은 책이 지닌 두툼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전자책의 단점으로 꼽은 것이다(이 구절이 이 책 몇 쪽에서 인용했는지 정확히 기입하고 싶지만 전자책으로는 그것도 애매하다). 그는 ‘남은 페이지를 모르면 책을 읽기 어렵’다고 까지 말한다. 과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가에 따라 언어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으리라.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는 책을 집어든 두 손바닥에 전해지는 책의 좌우 중량의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구나 싶으면 끝나기 전에 아직 하나 더 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주의 깊게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때 불현듯 ‘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다 싶을 때 뒤에 남은 18페이지가 신간 광고로 채워져 있다면 낙담하겠지요.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입니다. 아무리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수수께끼를 풀기 어려워도,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추리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지막에 탐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을 때, ‘오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다 읽은 나’를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난 나’가 보증인이 되어주기 때문에 ‘지금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는 모래밭 양쪽에서 굴을 파는 두 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파 들어가는 사이에 점점 맞은편에서 굴을 파는 상대방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얇은 모래벽이 무너지면 손과 손이 만나고 바람이 훅 통합니다. ‘아아 드디어 만났구나!’하는 성취감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내가 다 읽은 것을 기다린 나’와 다시 한 번 만나는 것입니다.

전자책의 독서에 깃든 곤란한 점은 ‘다 읽은 나’의 자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 물론 디지털 표시로 ‘몇 페이지 남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우리는 페이지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이제 몇 페이지가 남았으니 읽는 방식을 바꾸어야겠군’ 하는 귀찮은 방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손으로 받쳐 든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감촉이나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 즉 주제의 측면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시그널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지나치게 섬새해서 책을 읽는 자신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 책을 읽을 때 가슴이 뛰는 느낌은 무의식중에 ‘쾌락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이라는 말과 ‘다 읽은 나’를 상정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한다는 점에도. 때마침 종이책으로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은 700쪽에 가까운 두께를 자랑한다. 모두 3부로 나뉘어 있어 1부, 2부, 3부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유추해보게 된다. 이쯤이면 이제 사건이 터져야 할 텐데, 마무리가 되어야 할 텐데 등등 머릿속으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름다움의 선>과 같은 책이 이럴진대 미스터리 장르는 오죽할까. 만일 추리소설을 전자책으로 읽는다면 책의 무게나 부피, 남은 쪽수 등을 헤아려 이야기의 ‘감’을 잡는 일이 어려워서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실제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진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이나, 문학동네 세계문학, 민음사 세계문학, 대산세계문학,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내가 자주 구매하고, 그 생김새를 익히 아는 책들은 전자책으로 구매하더라도 딱히 그 모양새가 궁금하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구매한 전자책 가운데 커트 보니것,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이라 스트로버, <뒤에 올 여성들에게>, 다이앤 세터필드, <벨맨 앤드 블랙>과 같은 책들은 한 번도 그 실제 모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산 책들이라 그 생김새가 무척 궁금하다. 이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도 마찬가지이다. 조만간 서점에 가려고 하는데, 아마 이 책들부터 살펴볼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샅샅이.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는 이제 ‘제7강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를 읽을 차례다. 절반쯤 온 셈인가? 아닌가? ‘다 읽은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나’가 만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감으로 헤아리기는 여전히 어렵다. 이렇듯 전자책은 책이 지닌 고유의 물질성에서 종이책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다. 시디를 MP3로 대체할 수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책의 부피감마저 독서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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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 잠자냥님 글 읽으니 전자책과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느낌이 드는군요...ㅎ

잠자냥 2018-12-19 17:07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래도 전자책의 장점도 있어요. 일단 보관과 이동할 때 편리하다는 막강한! ㅎㅎ

목나무 2018-12-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자의 저 말에 공감하면서 전자책을 갈아탈까 말까 고민하던 마음을 그냥 가차없이 버렸답니다. ㅋㅋ
그래도 이사를 해야할 계절이 돌아오면 전자책으로 어쩌면 갈아탈지도.....--;; 이사의 가장 큰 적은 정말이지 책이지 싶어요! ㅎㅎ

잠자냥 2018-12-19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꽤 오래 전자책을 염두에 두다가 올해 마련했는데요, 확실히 책이 늘어나는 숫자가 조오오오금 줄긴 했습니다. 12월엔 종이책보다 오히려 전자책 구매량이 더 많네요.
이사할 때처럼 책이 원수 같을 때는 없죠. 이사할 때만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변환해서 옮겨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어요. ㅋㅋㅋ

케이 2018-12-19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전자책으로 읽고 정말 좋았던 책이면 종이책도 또 사고 있답니다.;;;; (제대로 돈낭비 ㅋㅋㅋ)
저도 처음에 전자책 읽을땐 참 답답했어요. 그런데 그 답답함을 넘어서는 편리함이 있죠. 역시 가벼운 게 최고 장점이지만 저같은 경우는 전자책에 내장된 사전도 참 잘 쓰고 있어요.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전 책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꽤 많이 나오거든요. 그때마다 바로 찾아서 보니 너무 편리해요.
CD가 MP3 로 완벽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는 CD를 이용한 인류의 역사가 워낙 짧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책은 그렇지 않죠.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인간 곁에는 책이 있었고, 그렇게 책을 읽어왔던 인류의 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책처럼 즐기기에 간단하고 완벽한 물건도 없죠.동력도 필요없고, 몇 년 지나도 그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작년에 봤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류 대정전이 발생했을 때 전기를 이용해 저장한 모든 자료는 다 날아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저장된 정보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책도 이사 다닐때마다 웬수 같아서 그렇지, 내가 잘 들고만 다니면 전자책보다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잘 읽고 있어요. 잠자냥님 감사해요!

잠자냥 2018-12-19 17:45   좋아요 1 | URL
하하하, 종이책을 또 사시는군요! ㅋㅋㅋ
전자책은 정말 편리하기는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사전 기능도 그렇고,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일 필요도 없고 등등.
CD가 MP3로 완벽하게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케이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정말 공감합니다. (근데 저는 MP3로 듣고 좋은 음악은 여전히 다시 CD로 사기는 해요. 애초에 처음부터 CD로 사는 음악도 있고요. 그러고는 그걸 또 굳이 추출해서 아이폰에 넣지요. 이게 무슨 짓인지 ㅋㅋㅋㅋㅋ 이 죽일놈의 소유욕때문에 ㅋㅋ)
그리고 정말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편리한 전자책을 잘 사용하다가도 문득 두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이 기기가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이 안에 있는 책들은?!!

암튼 책환자들한테 전자책은 보조 수단은 될지언정 메인은 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ㅎ

크리스마스와 연말 잘 보내시고 한해 마무리 잘하세요~!
 
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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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이 꽃필 무렵 고약한 마음의 병에 걸렸던 나는 그 삼 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처 입은 것이 나 혼자뿐이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쓰련다. (<세기아의 고백>, 9쪽)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은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단 하나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광기 어린 사랑을 시적 언어로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소설을 ‘고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작품은 뮈세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서두에서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기아의 고백>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뮈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더욱이 그 절절한 애정의 대상은 조르주 상드임을.

<세기아의 고백>은 알프레드 뮈세와 조르주 상드, 이탈리아인 의사 파젤로와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4대 시인으로 꼽히는 뮈세는 십대 시절부터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천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렬한 사랑을 꿈꾸던 그는 1833년 여름, 만찬 자리에서 상드를 처음 만난다. 뮈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서른의 상드는 이혼 뒤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함께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러나 기대로 가득했던 여행에서 뮈세와 상드는 번갈아 병석에 눕게 된다. 먼저 상드가 몸져누워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파젤로의 간호를 받는다. 상드가 회복한 뒤에는 뮈세가 병이 나고 그사이 상드는 파젤로의 연인이 되고 만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홀로 귀국해, 거의 4개월 동안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화해하려는 노력에도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뮈세는 <세기아의 고백>으로 이 사랑의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그 여자와 그 남자>라는 책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렇다고 <세기아의 고백>이 뮈세와 상드의 사랑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한 ‘브리지트 피에르송’은 상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에서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사회 변동은, 붕괴하는 구세대에게는 환멸과 비애감을, 앞날을 모색하는 신세대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드리웠다. 이 무렵 청년들을 괴롭힌 우울증과 염세적 고독감을 뮈세는 이른바 세기병(世紀病)이라 말한다. <세기아의 고백>의 주인공 옥타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즉 ‘세기아’이다. 이제 막 꽃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인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믿었던 애인이 배신,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심지어 애인이 또 있다! 심하게 마음을 다친 옥타브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타락한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기에, 단 한순간도 그녀의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배신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더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는 차라리 인간 사회를 믿지 않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내 연인과 흡사한, 악과 위선의 소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실연에 빠져 상심한 채 사회와 담쌓고 지내는 옥타브를 보다 못한 데주네는 선배로서 그에게 온갖 사랑의 충고를 한다. 그가 보기에 옥타브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그려낸 사랑, 이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런 옥타브에게 데주네는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을 믿더라도 실제로 이루려고는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게, 주정뱅이가 되지는 말게. 연인이 진실하고 충실하다면 그 이유로 사랑하게. 충실하진 않지만 젊고 아름답다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게. 상냥하고 재기발랄하다면, 더 사랑하게. 만일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지만 오직 자네만 사랑한다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사람이 밤마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네. (<세기아의 고백>, 56쪽)


옥타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파리 근교 시골에 머물던 옥타브는 그곳에서 바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 피에르송’을 만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찍 남편을 잃은 여인, 고결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송받는 순수함의 결정체인 브리지트, 그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옥타브와 브리지트로 변형되어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상드와 달리 브리지트는 더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뮈세가 상드에게 바랐던 여인상일까? 어쨌든 옥타브는 그녀와 단둘이서 걷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외친다. “신을 찬양하라!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러나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 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 번째 사랑에서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두 번째 사랑에서는 연인을 100% 믿는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녀를 믿다가도, 때때로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심지어 이 어리석은 남자는 브리지트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갖고도 자신을 괴롭힌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지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수록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순수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여인일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철저히 옥타브 관점에서 그려졌으므로 <세기아의 고백>에서 묘사된 브리지트의 모습을 100%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부분에 이르러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그들, 아니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예언처럼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오늘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100% 완벽하게 연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데주네의 충고처럼 ‘완벽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기아의 고백>은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또 어떠한지.


사는 것, 그렇다. 존재하고,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임을 강하게, 깊이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 가장 커다란 혜택이다.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어떤 사슬로, 어떤 불행으로, 그리고 나는 세상이 어떤 혐오감으로까지 사랑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것인데, 사랑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편견의 산 아래 푹 파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추악함 너머로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강인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하늘에 태양을 매달아 놓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하늘의 법칙이다. (<세기아의 고백>,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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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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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가식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가는지를 조용히, 섬세하게 써내려간 수작. 1부와 2부에서 켜켜이 쌓아놓은 이야기들이 3부에서 압도적으로 폭발한다. 신기하게도 주인공 닉에게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들지 않는다. 그 또한 어쨌든 반쯤은 그 세계의 일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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