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 사운드를 사용한지 몇 달 지났다. 내가 전자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기도 버거웠지만 무엇보다 전자책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은 조금 뜻밖이었다. 여름 밤,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창문을 열고 책을 읽노라면 제아무리 방충망이 있다하더라도 어디선가 온갖 벌레들이 날아 들어온다. 불을 끄고 책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전자책을 떠올렸다. 그래서 전자책리더기를 검색하다 알게 된 크레마 사운드는 작은 사이즈에 예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자책과의 만남. 처음에는 기계만 사두고 잘 활용하지 못했다. 사둔 종이책을 읽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전자책리더기에 이렇다 할 콘텐츠를 담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을 떠날 일이 있었는데, 아, 내게 전자책이 있었지! 하고 잊었던 존재를 기억해냈다. 그런데, 전자책을 구매하다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사고 싶은 책이 드물구나! 콘텐츠가 빈약하다. 읽고 싶은 책 가운데 전자책으로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나온다하더라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점 등등. 그래도 가끔 사고 싶은 책들이 있기는 하더라.

그리하여 나는 요즘 곧잘 전자책을 읽는다. 창을 열고 불을 끈 채 읽어보기도 했다.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벌레의 양은 확실히 줄었다. 어쩌면 여름이 다 지난 시점부터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할 때는 꽤 유용하다. 이런저런 책을 얇고 가벼운 기기 안에 쏙 담아서 갖고 다닐 수 있어 든든하다. 어떤 책을 읽다가 좀 지루하거나 여행지에서 읽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금세 다른 책으로 넘어가도 된다. 비행기나 전철처럼 좁은 공간에서 읽기도 편하다. 한 손에 잡고 엄지로 톡톡 페이지를 넘기면 되니까.

그런데, 이토록 편한 기계에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일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읽어도 내가 얼마큼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만큼 남았는지 쉽사리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더욱이, 나는 전자책을 읽을 때는 글자크기를 120% 정도 키워서 읽는다. 그러면 전체 쪽수는 그에 맞춰서 늘어난다. 종이책으로 500쪽인 책은 700쪽 이상으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전자책을 읽을 때는 내가 지금 읽는 페이지가 전체 페이지 중 몇 쪽에 해당하는지 자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120/800, 321/783, 이런 식으로 읽다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때로는 목차까지 다시 확인해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의 어느 부분에 내가 속해 있는지 안다는 것,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게 독서에서 이토록 중요할 줄이야.

요즘 읽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이 책도 전자책으로 구매했다)에서 아, 하고 무릎을 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근거로 전자책은 ‘뭔가 재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자책에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마디로 그것은 책이 지닌 두툼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전자책의 단점으로 꼽은 것이다(이 구절이 이 책 몇 쪽에서 인용했는지 정확히 기입하고 싶지만 전자책으로는 그것도 애매하다). 그는 ‘남은 페이지를 모르면 책을 읽기 어렵’다고 까지 말한다. 과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가에 따라 언어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으리라.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는 책을 집어든 두 손바닥에 전해지는 책의 좌우 중량의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구나 싶으면 끝나기 전에 아직 하나 더 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주의 깊게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때 불현듯 ‘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20페이지쯤 남았다 싶을 때 뒤에 남은 18페이지가 신간 광고로 채워져 있다면 낙담하겠지요.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입니다. 아무리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수수께끼를 풀기 어려워도,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추리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지막에 탐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을 때, ‘오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다 읽은 나’를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난 나’가 보증인이 되어주기 때문에 ‘지금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는 모래밭 양쪽에서 굴을 파는 두 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파 들어가는 사이에 점점 맞은편에서 굴을 파는 상대방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얇은 모래벽이 무너지면 손과 손이 만나고 바람이 훅 통합니다. ‘아아 드디어 만났구나!’하는 성취감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내가 다 읽은 것을 기다린 나’와 다시 한 번 만나는 것입니다.

전자책의 독서에 깃든 곤란한 점은 ‘다 읽은 나’의 자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 물론 디지털 표시로 ‘몇 페이지 남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우리는 페이지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이제 몇 페이지가 남았으니 읽는 방식을 바꾸어야겠군’ 하는 귀찮은 방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손으로 받쳐 든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감촉이나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 즉 주제의 측면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시그널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지나치게 섬새해서 책을 읽는 자신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 책을 읽을 때 가슴이 뛰는 느낌은 무의식중에 ‘쾌락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읽어버린 나’의 공동작업이라는 말과 ‘다 읽은 나’를 상정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게감, 손바닥 위의 균형 변화 같은 요소에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기 방식을 미세하게 조정한다는 점에도. 때마침 종이책으로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은 700쪽에 가까운 두께를 자랑한다. 모두 3부로 나뉘어 있어 1부, 2부, 3부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유추해보게 된다. 이쯤이면 이제 사건이 터져야 할 텐데, 마무리가 되어야 할 텐데 등등 머릿속으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름다움의 선>과 같은 책이 이럴진대 미스터리 장르는 오죽할까. 만일 추리소설을 전자책으로 읽는다면 책의 무게나 부피, 남은 쪽수 등을 헤아려 이야기의 ‘감’을 잡는 일이 어려워서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실제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진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이나, 문학동네 세계문학, 민음사 세계문학, 대산세계문학,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내가 자주 구매하고, 그 생김새를 익히 아는 책들은 전자책으로 구매하더라도 딱히 그 모양새가 궁금하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구매한 전자책 가운데 커트 보니것,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이라 스트로버, <뒤에 올 여성들에게>, 다이앤 세터필드, <벨맨 앤드 블랙>과 같은 책들은 한 번도 그 실제 모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산 책들이라 그 생김새가 무척 궁금하다. 이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도 마찬가지이다. 조만간 서점에 가려고 하는데, 아마 이 책들부터 살펴볼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샅샅이.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는 이제 ‘제7강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를 읽을 차례다. 절반쯤 온 셈인가? 아닌가? ‘다 읽은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나’가 만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감으로 헤아리기는 여전히 어렵다. 이렇듯 전자책은 책이 지닌 고유의 물질성에서 종이책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다. 시디를 MP3로 대체할 수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책의 부피감마저 독서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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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 잠자냥님 글 읽으니 전자책과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느낌이 드는군요...ㅎ

잠자냥 2018-12-19 17:07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래도 전자책의 장점도 있어요. 일단 보관과 이동할 때 편리하다는 막강한! ㅎㅎ

목나무 2018-12-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자의 저 말에 공감하면서 전자책을 갈아탈까 말까 고민하던 마음을 그냥 가차없이 버렸답니다. ㅋㅋ
그래도 이사를 해야할 계절이 돌아오면 전자책으로 어쩌면 갈아탈지도.....--;; 이사의 가장 큰 적은 정말이지 책이지 싶어요! ㅎㅎ

잠자냥 2018-12-19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꽤 오래 전자책을 염두에 두다가 올해 마련했는데요, 확실히 책이 늘어나는 숫자가 조오오오금 줄긴 했습니다. 12월엔 종이책보다 오히려 전자책 구매량이 더 많네요.
이사할 때처럼 책이 원수 같을 때는 없죠. 이사할 때만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변환해서 옮겨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어요. ㅋㅋㅋ

케이 2018-12-19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전자책으로 읽고 정말 좋았던 책이면 종이책도 또 사고 있답니다.;;;; (제대로 돈낭비 ㅋㅋㅋ)
저도 처음에 전자책 읽을땐 참 답답했어요. 그런데 그 답답함을 넘어서는 편리함이 있죠. 역시 가벼운 게 최고 장점이지만 저같은 경우는 전자책에 내장된 사전도 참 잘 쓰고 있어요.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전 책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꽤 많이 나오거든요. 그때마다 바로 찾아서 보니 너무 편리해요.
CD가 MP3 로 완벽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는 CD를 이용한 인류의 역사가 워낙 짧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책은 그렇지 않죠.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인간 곁에는 책이 있었고, 그렇게 책을 읽어왔던 인류의 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책처럼 즐기기에 간단하고 완벽한 물건도 없죠.동력도 필요없고, 몇 년 지나도 그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작년에 봤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류 대정전이 발생했을 때 전기를 이용해 저장한 모든 자료는 다 날아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저장된 정보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책도 이사 다닐때마다 웬수 같아서 그렇지, 내가 잘 들고만 다니면 전자책보다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잘 읽고 있어요. 잠자냥님 감사해요!

잠자냥 2018-12-19 17:45   좋아요 1 | URL
하하하, 종이책을 또 사시는군요! ㅋㅋㅋ
전자책은 정말 편리하기는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사전 기능도 그렇고,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일 필요도 없고 등등.
CD가 MP3로 완벽하게 대체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케이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정말 공감합니다. (근데 저는 MP3로 듣고 좋은 음악은 여전히 다시 CD로 사기는 해요. 애초에 처음부터 CD로 사는 음악도 있고요. 그러고는 그걸 또 굳이 추출해서 아이폰에 넣지요. 이게 무슨 짓인지 ㅋㅋㅋㅋㅋ 이 죽일놈의 소유욕때문에 ㅋㅋ)
그리고 정말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편리한 전자책을 잘 사용하다가도 문득 두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이 기기가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이 안에 있는 책들은?!!

암튼 책환자들한테 전자책은 보조 수단은 될지언정 메인은 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ㅎ

크리스마스와 연말 잘 보내시고 한해 마무리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