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강승현 옮김 / 모모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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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은 남편을 설득해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종용하고,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은 왕비가 된다. 그 후로 ‘레이디 맥베스’는 흔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권력욕 넘치는 여성을 일컫게 되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레이디 맥베스>에는 바로 그런 여성이 등장한다.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가 바로 그녀이다. 그러나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를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거나 살인을 종용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직접 나선다. 그것도 여러 차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이 강렬한 여인의 일생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폭풍처럼 몰아 써내려 간다.

작품은 ‘우리 지방에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떠올릴 때마다 영혼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인물들이 간혹 나온다. 상인의 부인이었던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도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하는데, 언젠가 그녀가 일으켰던 끔찍한 사건 이후 우리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간단히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그리고 그가 일으킨 일이 ‘끔찍한 사건’임을 예상하게 하고, 이 모든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레스코프가 형사재판소의 말단 기록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경험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레스코프의 상상력이 더해졌으리라.

타고난 미녀는 아니지만 매우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카테리나 리보브나’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넷. 그런데 매력적인 외모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녀의 인생은 권태로 가득하다. 부유한 상인이지만 쉰 살이 넘은 남편 ‘지노비 보리스이치’와 오래전에 홀아비가 된 아흔 살에 가까운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카테리나 부부에게는 아이도 없다. 지노비 보리스이치는 카테리나와 결혼하기 전 20년을 함께 살았던 전 부인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아이도 없이, 늙은 두 남자와 사는 권태에 사로잡힌 젊은 아내. 게다가 그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난에도 질린 상태이다.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체 뭐 하러 결혼을 했느냐는 비난. 사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면 문제는 남편에게 있을 가능성이 큰 데도  마치 그녀가 기품이 넘치는 그들 집안에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듯하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침묵과 권태 속에 나날을 보낸다.

큰 변화 없이 소소하게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 꼭 권태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삶이 알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테리나에게는 그렇지 못했으니, 그녀의 성격이 원래부터 불같았기 때문이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해 조신하게 살아가기 이전, 가난한 처녀 시절 그녀는 꾸밈없이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일례로 ‘양동이를 들고 강에 나가 나룻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하는 것’을 좋아했고, ‘쪽문 밖으로 지나가는 청년에게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리며 농을’ 걸기를 즐겼다. 그런데 이곳에선 모든 것이 달랐다. 강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은커녕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릴만한 청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카테리나의 권태를 감지한 집안의 하인 세르게이는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젊음과 빛나는 외모를 무기삼아 주인마님인 카테리나에게 폭풍처럼 밀어붙이고 카테리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에 불을 붙인 자를 기꺼이 맞이하는 것이다.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사랑이나 애정 없이 사는 지루한 삶, 거기에 나타난 젊고 잘생긴 남자. 그와의 애정행각…….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레이디 채털리 등등. 그러나 이들과 카테리나는 완전히 다르다. 욕망에 눈뜨고 남편이 아닌 남자와 벌이는 애정행각에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린다. 아니, 욕망에 눈뜬다는 표현조차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권태에 짓눌려있던 욕망이 폭발한 것이다. 그 욕망은 고삐가 풀린 채 질주한다. 시아버지를 비롯해 남편이 알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당신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밝혀낼 거야.” 말하는 남편에게 카테리나는 그를 비웃으며 오히려 조롱한다. “당신의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겁쟁이가 아니랍니다. 나는 그런 거 두려워하지 않아요.”(56쪽). 이렇게 거침없는 여성이 있었던가? 한편으로는 통쾌한 생각에 왠지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카테리나는 한술 더 뜬다. 외도 현장을 덮친 남편 앞에 “여기 그 사람이 있다”며 연인을 당당히 소개하는 게 아닌가. 세르게이의 팔을 잡고 남편 앞에 선 카테리나는 말한다. “어디 나하고 이 사람을 심문해 보시죠.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도망가지 못하게 재빨리 방문을 잠근 뒤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고는 앞섶을 풀어헤친 채 세르게이와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계속 도발한다. “왜? 마음에 안 드시나? 한번 보라니까. 내 사랑하는 양반아, 얼마나 좋은지!” 그러고는 마침내 남편 앞에서 세르게이에게 정열적으로 키스한다. 이 광경을 낱낱이 지켜볼 수밖에 없던 카테리나의 남편은 격노한 끝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야 마는데, 그마저도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권태로웠던 지난날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남편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41쪽)


카테리나의 이 극악무도한 잔인함에는 세르게이조차 몸서리친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면 연인인 세르게이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카테리나가 내뱉은 위와 같은 말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외도 상대에게 사랑만을 갈구하면서 끌려 다니던 가련한 비운의 여주인공들과 사뭇 다르다. 당당히 ‘내가 너를 원했다’고 말할 줄 아는 한편으로는 ‘너는 나를 유혹했고, 네 술수’라고 명확히 언급한다. 술수임을 알아도 나는 그 욕망에, 젊고 잘생긴 남자를 끌어안는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를 배신한다면 결코 살아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 아닌가.

그러나 이처럼 거칠 것 없이 잔인하고 당당한, 그 여자도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만다. 아무리 욕망을 채우고자 몸을 던진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이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만 것이다. 그의 ‘술수’인지 알았어도 이제 세르게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지은이가 레스코프, 그러니까 ‘남자’임을 상기해야만 했다. 단순히 욕망을 채우는 상대였더라면, 아니 그러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더라도, 그놈의 배신을 알았더라면 웬만한 여자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갈면서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세르게이에게 돌렸을 것이다. 레스코프가 여성 작가였다면 그렇게 썼을 텐데, 남성이라 그런지 복수의 칼을 세르게이에게 돌리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캐릭터를 일구어놓고도 막판에 조금 힘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함께 실린 또 다른 작품 <쌈닭>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레이디 맥베스 ‘카테리나’ 못지않게 당당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강렬한 캐릭터 ‘돔나 플라토노브나’- 그런 인상 깊은 인물을 창조하고도 그런 허무한 결말을 짓다니, 오호 레스코프여 오호 통재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레스코프가 빚어낸 이 두 여성은 너무도 강렬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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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ue76 2020-04-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여주의 대사가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군요. 강렬합니다!

잠자냥 2020-04-07 20:40   좋아요 0 | URL
저것보다 더 시원한 대사들이 많습니다~ 한 번 꼭 읽어보세요. ㅎㅎ

유부만두 2020-04-0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는데요, 일꾼 세르게이가 영 매력적이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나겠다는 생각만....) 여주인공이 훨씬 더 우위에 선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영화에선 일련의 사건들이 별 특별하지 않게 반복, 처리 되어서 지루했어요.

잠자냥 2020-04-08 12: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더럽고 냄새날 거 같은 느낌 알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사실 책에서도 그래요. 그깟 세르게이 따위... 에휴.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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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검은색부터 시작해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검은색’에 관한 이토록 깊고 너른 사유라니 그저 놀랍다. 알랭 바디우를 잘 몰라도 누구나 친숙하게 읽을 수 있는 철학 에세이. 짧지만 깊고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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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강승현 옮김 / 모모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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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는 카테리나.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캐릭터라니. 그럼에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사뭇 아쉽구나. 그놈을 끌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아무튼 읽으면 읽을수록 반하게 되는 레스코프. 레스코프 선집 어디서든 다 번역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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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4-04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개봉했을 때 읽어봤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결말이 더 좋더라구요 책 결말은 잠자냥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잠자냥 2020-04-04 22:50   좋아요 1 | URL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저도 꼭 한 번 봐야겠어요. ㅎㅎ

camiue76 2020-04-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잠자냥님은 레스코프까지 섭렵하셨군요. 대단하세요. ^^ 저는 영화를 먼저 접했는데(우울하고 독특했어요)
이 리뷰 읽고 책도 읽어보는 것으로.

잠자냥 2020-04-06 11:2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가 왜 레스코프를 많이 읽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했다던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ㅎㅎ 영화와 결말이 다르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영화도 보기로 했습니다. ^^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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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도 디카페인 커피가 나오길 바랐는데, 드디어! 카페인 없이 얼마나 맛과 풍미까지 살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일반 커피 마시는 것과 큰 차이를 모를 정도. 디카페인 맞아? 의심이 들 만큼 맛도 풍미도 살아있다. 고소하고 묵직한 맛. 앞으로 계속 구매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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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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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현대문학 세계 단편선 <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와 똑같은 작품이 실려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를 비교하면서 겹치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워낙 이 단편집을 흥미롭게 읽기도 했고, 듀 모리에의 다른 작품도 즐겁게 읽었던 터라,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단편들 모음이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책 소개를 보니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에 걸쳐 쓴’ 초기 걸작 단편을 모아 낸 선집이라고 한다. 거장이 거장으로 자리 잡기 전, 얼마쯤은 어설프고 풋풋한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내 생각은 책을 받아 읽는 순간 와장창 깨지고 만다. 아니, 이게 정말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라고? 그렇다, 거장은 애초부터 거장인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는, 제목에 끌려 <집 고양이>부터 읽었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암고양이》처럼 왠지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런 작품일 것 같았다. 느긋한 고양이가 등장하지만 그 고양이와 얽힌 기괴하고 짜릿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생각 또한 와장창 깨진다. 서스펜스의 왕이자(여왕이 아니다!!), 인간의 저 밑바닥 욕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내려다 보고 있는 대프니 듀 모리에가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쓸 리가 없다. 비록 아무리 초기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 작품에는 단 한 번도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양이의 특성을 비롯하여, 얼마나 묘사를 잘했는지 온갖 고양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린 꼬마였던 ‘나’는 파리에서 숙녀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성숙한 어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 같은 존 삼촌과 함께 사교계를 누빌 꿈에 부푼다. 그런데 그 기대는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처음으로 화장한 ‘나’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전에 없이 쌀쌀맞게 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늘 졸린 얼굴이던 존 삼촌은 그날따라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다.

존 삼촌은 사실 혈연관계는 아니다. 모녀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나’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프린턴 해변의 얕은 물에서 해수욕을 하던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존 삼촌은 집안 식솔로 여러 해를 함께 지내오면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처리한다. ‘티켓을 구입하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장사꾼을 상대하고, 청구서를 지불하고, 역에선 그들의 가방을 옮겨주고, 차를 마실 땐 빵과 버터를 건네주고, 전화를 받고, 약속을 기록하는 수첩을 정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양손을 문지르면서 아양을 떨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 오랜 세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어머니와 함께 한다. 어머니에게 여러모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이제 마흔을 훨씬 넘긴 존 삼촌. ‘나’의 친구는 언젠가 그에 대해서 “저 사람이 너희 어머니가 키우시는 집고양이야?”하고 묻기도 한다. 나는 친구의 그 말에 크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존 삼촌은 ‘구석에서 조용히 가르랑거리다가 절대 발톱을 드러내는 일 없이 평화롭게 후다닥 우유 접시로 달려가는 고양이’ 모습과 어쩐지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는 존 삼촌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나의 ‘어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어머니’에게 빌붙어 사는 기둥서방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게다가 성숙하게 자라서 젊음 그 자체로 빛나는 딸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엄마가 딸을 경쟁상대로 느낀다는 것도 곧 알 수 있다. 그 두 모녀 사이에서 이 ‘집고양이’ 존 삼촌의 능글맞은 변화를 엿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다. ‘나’가 기차역에 내렸을 때부터, 아니 ‘나’가 드레스를 사러 갔을 때 쳐다보던 그 음흉한 시선에서 이 존 삼촌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가능한데, 그런 변화를 고양이에 비유하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매력적인 젊은 아가씨를 꾀어낼 궁리를 마친 존 삼촌은, 자기의 은밀한 연인인 ‘어머니’의 눈을 피해 딸을 만나기 위해 ‘나’의 귀에 속삭인다.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오너라.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찾아오면 돼.”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잠깐이지만 그의 모습이 정말로 잘 먹고 자라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나직이 가르랑거리며 등을 활처럼 굽히는 얼룩고양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존 삼촌은 때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둡고 축축한 벽에 기대어 자신이 만든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는 교활하고 냄새나는 도둑고양이’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고양이에 빗댄 묘사와 그 상황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그저 감탄이 나온다.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감춘 존 삼촌의 음흉한 속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쩐지 차가워진 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집고양이, ‘작고 뺀질뺀질하고 땅딸한 남자’의 정체와 ‘미모가 사라져 겁을 집어먹고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기 딸의 젊음을 시기해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인 ‘어머니’의 저열한 속내도 깨닫게 된다. 이 또한 성장이라면 성장이겠지만 참으로 그 대가는 쓰디쓰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대프니 듀 모리에를 경쟁상대로 느끼고 끊임없이 견재했던 듀 모리에의 친어머니와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읽혀, 작품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왠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복잡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친밀한 관계의 부도덕한 이면, 사랑스러움도 없고 로맨스도 없었다. 그녀도 자기 차례가 되면 이렇게나 어머니와 똑같은 가면을 쓴 채 거짓으로 점철된 가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집고양이’,  163쪽)



표제작인 <인형>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다. 이 작품은 액자식으로, 바닷가에서 발견된 한 권의 수첩 속 이야기를 스트롱맨 박사라는 이가 옮겨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박사는 ‘본문에 실린 글은 베이의 어느 바위 틈새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바닷물에 젖어 상당 부분 색이 바랜 너덜너덜한 수첩에서 발견된 내용’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수첩의 주인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으며, 아무리 부지런히 탐문을 해보아도, 주인공의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아마도 수첩 주인은 수첩을 숨긴 지점 근처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시신마저 바닷속으로 사라졌거나 자신의 비극과 자기 자신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세상을 떠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수첩은 ‘인간은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너무도 끔찍한 공포와 너무도 크나큰 절망으로 가득차, 두뇌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간혹 있다.’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아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일 것임을 예고하는데, 실상 초반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리 심란하지는 않아서 조금 뜻밖이었다. 수첩의 주인인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부다페스트 출신 ‘리베카’라는 이름의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왠지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가까워져도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가까워진 듯하면 멀어지고, 멀어진 것 같으면 또 금세 가까워지고, 리베카는 ‘나’를 쥐락펴락하는 데 선수 같다. 리베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왠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리베카는 말한다. “나는 애정을 품을 만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사랑에 빠져본 적도 없어요. 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언제나 사람들을 싫어했어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리베카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녀와 가학/피학적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맞닥뜨린 그녀의 비밀은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처럼 심약한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 또한 리베카의 ‘비밀’이랄까, 그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는 광경을 맞닥뜨렸을 때는 헐 정말? 진짜? 하는 생각이 들어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텐데, 이 작품을 읽을 이들을 위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인형>은 사디즘, 마조히즘, 관음증을 비롯해 문제의 그 장면에서까지 정말 여러 의미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무튼 이 작품이 대프니 듀 모리에 20대에 쓰인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년 전 작품일 텐데 이런 생각을, 게다가 리베카라는 여성이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상상력이 시대를 앞서도 한참 앞서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한 단편이 많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는 서간체 형식으로 오직 사랑에 빠진 남자의 관점으로 쓰였는데, 처음에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예의와 조심성을 갖추더니, 뜨거운 열정의 시기를 거쳐 여인의 마음을 얻은 뒤 조금씩 편해가는 모습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 차이>나 <주말 >같은 단편에서도 사랑하는 남녀의 겉모습과 그 속마음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인생의 훼방꾼>이라는 단편은 ‘믿을 수 없는 화자’, 자기 자신이 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타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데 탁월한, 소름끼칠 만큼 진저리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단편집에서 대프니 듀 모리가 창조한 캐릭터 가운데 완벽하게 선한 인물은 없다. 겉으로는 제아무리 선함을 가장하고 있다하더라도 사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그 욕망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좌절되면 분노한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인간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차디차게 비웃는다. “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언제나 사람들을 싫어했어요.”라는 저 리베카의 말은 듀 모리에 그 자신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관찰했기에 그런 저열한 속성까지 낱낱이 알고 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도 무려 20대에 말이다. 서스펜스의 왕 대프니 듀 모리에. 그이의 국내 번역 작품은 이제 <희생양> 하나 남겨두고 다 읽었다. 안타깝다! 또 다른 책이 얼른 번역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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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0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 리뷰 다 읽기도 전에 읽어야겠다고 아주 강하게 마음 먹게 됐어요. 사두고 안읽은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읽고 싶어졌고요. 아 초조하네요 얼른 사고 싶어서.

20대에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은 천재일까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소설을 못쓰고 있는데 말예요. 언젠가는 근사하게 한 편 쓸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없어요 ㅠ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타고나는 재능이란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2020-04-02 16:21   좋아요 0 | URL
대프니 듀 모리에는 천재 같아요. 이야기도 잘 만들어 내고 그 묘사하며... 휴... <나의 사촌 레이첼>도 정말 재미있어요!

다락방 2020-04-02 16:38   좋아요 1 | URL
저 레베카 엄청 재미있게 읽고 나의 사촌 레이첼도 부랴부랴 사두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많은 책들이 그런것처럼 저쪽에 치워져있어요...오늘 집에 가면 어디있나 찾아봐야겠어요. 인생... ㅠㅠ

단발머리 2020-04-0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름만 아는 작가인데 잠자냥님 리뷰 읽고 나니 당장! 읽고 싶네요. 얼른 서둘러야겠어요.
잠자냥님은 이제 <희생양> 하나 남으셨다고 하시니,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첼, 인형이 남아있는 제가 부러우시겠어요 호호

잠자냥 2020-04-06 10:3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ㅎㅎㅎ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철, 인형 등등 다 너무 재미있어요. 현대문학에서 나온 대프니 듀 모리에 다른 단편집도 그렇고요. 부럽습니다~!! ㅎㅎ

2020-05-0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7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