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어린 시절 책벌레였다. 친구와 놀기보다 혼자 책 읽는 게 더 좋았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이 그렇게 좋니? 친구들하고도 놀아야지.” 그때도 나는 책이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지인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릴 때도 나는 딱히 외롭거나 괴롭지 않았다. 극장을 가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점을 제외하면 내 일상은 코로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책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책과 함께 따뜻한 방 안에 있노라면,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책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저 먼 곳, 먼 시대로까지 이끌어가 주기도 하며, 좋은 말벗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펼쳐보여 준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공간의 종류들>은 너무나 익숙한,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페렉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공간, 그 흔하고 사소한 것에 주목해 글쓰기를 시도한다. 페렉이 말하듯 그곳은 ‘아무것도 아닌 곳, 만질 수 없는 곳, 비물질적인 곳, 넓이를 갖는 곳, 우리 외부에 있는 곳, 우리가 이동해가는 도중에 있는 곳, 주위 환경, 주변 공간’들이다. 공간에 대해 그토록 쓸 이야기가 많을까?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까? 궁금해진다. 페렉은 아무것도 아닌 그 ‘공간’이라는 대상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며 써 내려간다. 침대, 방, 아파트, 문, 계단, 건물, 거리, 구역, 도시, 시골, 나라, 국경, 유럽, 세계로 차츰 뻗어나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써내려갔듯이 페렉은 ‘잃어버린 공간’, 너무나도 무심해서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들, 쉽게 잊힐 것들, 하지만 한때 나를, 당신을,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기록한다. 많은 이들이 지나치고 말았을 대상을 기발한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심하고 기록함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우리 주변에 새로이 불러온다. 요즘 같은 시기,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이들에게 페렉의 이런 사유는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공간들은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장소가 된다. 책을 통한 새로운 앎과 깨달음의 여행이 시작된다.

페렉이 생각하기에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이 그것들을 닳게 하고 파괴한다. 그래서 그는 글로 기록함으로써 기억이 그를 배반하는 일을 막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특이한 것, 특별한 것, 비참할 정도로 예외적인 것만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일상은 무료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그래서 다들 이벤트를 만들고 멀리 떠나려 한다. 그러나 페렉은 어리석을 만큼 천천히 접근해서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한다.(<공간의 종류들>, 84쪽) 왜냐하면 그런 것일수록 더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때문에 페렉의 공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이 글쓰기는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는 행위이자,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은 그저 ‘공간’을 집요하게 기록한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는다. 너무나 평범해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기록해두고자 하는 절박한 몸짓으로 읽힌다.

레몽 크노도 <문체 연습>에서 일상을 새롭게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출근 시간 S선 버스에 탄 한 남자를 묘사하고, 두 시간 뒤 다시 그 남자가 생라자르역에서 친구와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을 99가지 문체로 변주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출근길 일상이 99가지 새로운 사건이 된다. 크노는 가장 쉽게 말투를 바꾸거나, 글 형식을 달리하거나, 장르를 다르게 하는 방법을 쓴다. 조심스럽게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꿈결에서 하듯, 머뭇거리는 어조로 저 아침 버스에서의 일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희곡과 시(詩)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 시는 때로 소네트가 되기도 하고,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철학 특강 재료가 되기도 하고 신나는 동요로 부를 수도 하고, 구성진 가락의 창(唱)이 되기도 한다. 전보, 편지, 광고, 공식서한 등등 레몽 크노의 세계에서는 이 짧은 일화로 모든 게 가능하다.

한 사건인데도 보는 방식, 관점에 따라 어조는 물론 의미가 달라지고, 다른 정보가 드러나기도 한다. <문체 연습>은 소설, 시, 희곡 그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하다. 크노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쓰기를 시도했을까? ‘당사자의 시선’, ‘다른 이의 시선’, ‘객관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문체는 곧 시선임을 증명한다. 이 책의 99가지 색다른 문체 시도는 하나같이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닐까? <문체 연습>은 문체가 곧 하나의 시선임을 증명하면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을 우리에게 전한다. 크노는 이런 문체 연습이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문체 연습>, 157쪽) 말한다. 그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즐거운 문체 연습이 기존의 낡은 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 새롭게 세상을 보는 방식을 알려준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세상을 보는 신선한 관점까지 제시해주는 문학. 내가 문학을 이토록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올드 스쿨>에는 나처럼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잔뜩 모여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학생들은 문학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자 소설 쓰기에 매진한다. 꿈은 오로지 하나, 헤밍웨이로부터 평가받고 그를 만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학교에서 우상 같은 존재이다. 인기가 시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명성이 날로 커져만 가는 그런 존재. 헤밍웨이 자체가 이 학교에서는 문학의 상징이다. 주인공 ‘나’는 헤밍웨이를 신처럼 받든다. 그는 과연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헤밍웨이를 만나게 될까.

이 작품은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뛸 만한 공감 가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작품 자체로 하나의 문학 강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곳곳에서 시나 소설을 어떤 자세로 써야하는지가 종종 드러나는데, 그러한 구절을 읽노라면 오래된 문학 교실, 즉 ‘올드 스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문학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내 이십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을 써 와서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고, 소설가 또는 시인인 교수들에게 보여주면서 좋은 평가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때로는 초빙한 작가들에게 문학 재능을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던 20대의 나와 그들. 누군가가 문학경연대회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해서 입상한 이의 작품을 남몰래 헐뜯곤 하던 못난 모습들. 그 모든, 문학으로 이루어진 순간들이 떠오른다.


<올드 스쿨>은 문학이 인간에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문학에서 높이 사는 진정성이나 진실함이 작품을 쓴 작가의 허위나 기만, 이중성과 연결될 때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이 작품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허위와 가식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나’가 문학을 통해 진실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한다는 점에 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 스스로 부끄러웠을 과거를 고해성사하듯이 써내려간 토바이어스 울프. 그에게도 문학이 빛을 던져주었음을 알리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문학은 이렇게 나를, 우리를 감동시키고 일깨우며 변화하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22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2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