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500페이지에 걸쳐 쓰인 내용은 퍽 단순하다. 주인공 프라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온 이틀 후 부모님과 형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단 사흘 동안의 기록이다. 그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인물 및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500페이지를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멸’의 무라우 역시 부잣집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며 ‘정신적인’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 그 자체다. 특히 그의 혐오는 가족을 향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나치의 수하로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한 두 여동생,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순하기만 한 형- 이런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고향집 ‘볼프스엑’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사진이란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지 못한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든 상관없이, 사진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손상하고 자연을 엄청나게 왜곡하여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24쪽)
네
아버지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 졸업장이 바로 고도의 정신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단다. 잘못된 생각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이런저런 타이틀을 지닌 자들을 증오했단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더구나. 대학교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단다. 타이틀이란 대부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지. 대단할수록 그만큼 멍청하다는 거야. (42쪽)
네
아버지가 읽는 신문은 ‘오버 오스트리아 농민지’뿐이고 읽는 책이라곤 <회계장부>뿐이란다. 그들은 정기 회원권을
이용하고 있어서 연극을 보러 린츠로 가서는 끔찍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볼륨을 최대로 올려서
음향이 엉터리로 울리는 브루크너 하우스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콘서트도 보러 간단다. 이 사람들은, 너의 부모 말야, 연극이나 콘서트
때문에 정기 회원권을 쓰는 게 아니었단다. 그들은 삶 전체의 근거를 정기 회원권에 두고 있지, 매일 같이 극장에 가서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단다. 엉터리 음향만 울려 퍼지는 역겨운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란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정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을 정기 회원권으로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지, 극장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는 셈이지. 콘서트에서 환호하듯이 살면서 환호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계속
환호한단다. (47쪽)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경시하면서 졸업장이나 타이틀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다.
졸업장이나 타이틀은 거실의 벽에 걸어둔다. 도축 장인, 철학자, 보조 요리사, 변호사, 파나는 집 안에 증서를 걸어 놓고 평생
동안 탐욕스럽게 응시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끼리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놓고 말하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졸업장과 타이틀이다. (63쪽)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날의 20대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분별한 향락 말고는 얼마나 만사에 무관심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춤을 추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빈둥거렸고, 평생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결국 치명적이 될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부터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서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렸고 온통 직업과 여자, 쓸데없는
외형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형편없는 천박함과 특히 앞으로 받게 될
노후의 연금과 자동차 생각뿐이다. (261쪽)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기뻐서 악수를 청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이젠 한낱 멍청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개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 우리 자신이, 어떤 쪽으로든 발전해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든 전혀 발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한 것도 없이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정말 어느 한구석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이다. (263쪽)
다른 사람들이 멍청한 표현들을 사용하면 우린 계속해서 흥분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형편없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감베티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64쪽)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반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내
취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는 항상 그러지 못했으며 그들의 허풍이 역겨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의상은 틀림없이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입한 것으로 지금 그들은 말하자면 마지막 리허설 무대에서처럼, 남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이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우쭐거리며 대단히 교만을 떨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자만심에 차 있었다. (372쪽)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4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