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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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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500페이지에 걸쳐 쓰인 내용은 퍽 단순하다. 주인공 프라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온 이틀 후 부모님과 형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단 사흘 동안의 기록이다. 그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인물 및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500페이지를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멸’의 무라우 역시 부잣집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며 ‘정신적인’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 그 자체다. 특히 그의 혐오는 가족을 향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나치의 수하로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한 두 여동생,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순하기만 한 형- 이런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고향집 ‘볼프스엑’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볼프스엑이 우리 가족의 손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을 챙기는 일에만 신경 썼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생산지, 즉 농경지-지금도 2천 헥타르나 된다-와 광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늘 경제적인 이윤 추구 외에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는 척하면서 문화, 심지어 예술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사실 보잘것없어 부끄러울 정도였다. (21~22쪽)


가족 외에 그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혐오도 굉장하다. 실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을 저작권법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스스로 금했다고 하니, 고국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컸는지 짐작가능하다. 그런 그의 분신이 주인공 ‘무라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한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며, 이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고, 불가피한 경우라면 절대 필요한 선에서만 관계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 인정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성을 잃은 비굴함을 종종 입증해 보였고, 매일같이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기회에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나라이며, 언제나 하는 말처럼 민주주의 국가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가공스럽고 비굴하며 수치심을 모르는 국가이고, 자신의 가공스러움과 비굴함, 수치심을 모르는 철면피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함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341쪽)


가족과 고국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도 엄청나다. 무라우가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비정신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즉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사치와 허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문학과 예술처럼 정신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특히 반(反)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인물인 ‘어머니’에 대한 혐오는 엄청나다.

하지만 무라우가 혐오하는 세계, 그가 쏟아내는 거짓과 위선, 허영에 가득 찬 인물에 대한 독설이 통쾌하다가도 ‘그런데 이건 좀 아닌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볼프스엑’에 있는 정원사 집단과 사냥꾼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그 집단에 대해 갖는 느낌이 특히 그렇다.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고 동물 사냥이나 하는 사냥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게다가 무라우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과 무라우가 비정신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지나친 선민의식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은 역겨워졌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추구하는 ‘정신적인 세상’은 역시 나치에 협력하며 가문을 지켜 온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다(이것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읽을 때도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나쓰메 소세키의 ‘한량’ 주인공들 또한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무라우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굳어버린 세계를 도망쳐 이탈리아처럼 자유로운 곳에 머물며 독문학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결국 비싼 집을 구하고, 문학과 예술로 대표될 수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 끊임없이 도망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던 것은 그가 그토록 혐오한 ‘볼프스엑’의 부유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무라우가 ‘볼프스엑’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욕하는 태도에 나중에는 좀 질려버리더라. ‘그렇게 혐오스럽다면 경제적인 지원을 비롯하여 아예 다 끊어버리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부모와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모든 재산의 상속인이 된 무라우는 본격적인 ‘소멸’ 작업에 들어간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159쪽)’라는 생각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한량’ ‘선비’형 주인공들을 볼 때처럼 ‘무라우’라는 녀석을 보면서 ‘하이고, 그래 너 혼자 고결하신 지성인이다.’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자기만 잘났다는 거야 뭐야? 이런 심정. 그러나 결국 무라우 역시 자기 자신조차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냉소와 혐오, 까칠함과는 다르다고 느낀 것은 무라우의 혐오는 분노에 가까운 혐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나약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혐오스러운 주변 인물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일은 거의 없는 느낌. 무라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 끊임없이 상처받았다고 서술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베른하르트에 비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래도 인간에 대해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오스트리아’는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에서 무라우가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자기반성, 수치를 모르는 채, 거짓과 위선, 사치와 허영, 경제적인 것에 모든 것을 바친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 덧붙여 자기가 태어난 집과 가족, 그리고 고국을 멀찍이 떨어져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사람에게는 분명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느껴본다.

괜찮은 작품임에도 살짝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초반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졌던 이유는 너무 방대한 분량 때문인 듯하다. 특히 막판에 좀 괴로웠던 이유는 무라우가 지나치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랄까. 250페이지 정도는 덜어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사진이란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지 못한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든 상관없이, 사진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손상하고 자연을 엄청나게 왜곡하여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24쪽) 

네 아버지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 졸업장이 바로 고도의 정신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단다. 잘못된 생각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이런저런 타이틀을 지닌 자들을 증오했단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더구나. 대학교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단다. 타이틀이란 대부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지. 대단할수록 그만큼 멍청하다는 거야.  (42쪽)

네 아버지가 읽는 신문은 ‘오버 오스트리아 농민지’뿐이고 읽는 책이라곤 <회계장부>뿐이란다. 그들은 정기 회원권을 이용하고 있어서 연극을 보러 린츠로 가서는 끔찍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볼륨을 최대로 올려서 음향이 엉터리로 울리는 브루크너 하우스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콘서트도 보러 간단다. 이 사람들은, 너의 부모 말야, 연극이나 콘서트 때문에 정기 회원권을 쓰는 게 아니었단다. 그들은 삶 전체의 근거를 정기 회원권에 두고 있지, 매일 같이 극장에 가서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단다. 엉터리 음향만 울려 퍼지는 역겨운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란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정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을 정기 회원권으로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지, 극장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는 셈이지. 콘서트에서 환호하듯이 살면서 환호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계속 환호한단다. (47쪽)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경시하면서 졸업장이나 타이틀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다. 졸업장이나 타이틀은 거실의 벽에 걸어둔다. 도축 장인, 철학자, 보조 요리사, 변호사, 파나는 집 안에 증서를 걸어 놓고 평생 동안 탐욕스럽게 응시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끼리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놓고 말하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졸업장과 타이틀이다. (63쪽)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날의 20대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분별한 향락 말고는 얼마나 만사에 무관심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춤을 추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빈둥거렸고, 평생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결국 치명적이 될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부터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서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렸고 온통 직업과 여자, 쓸데없는 외형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형편없는 천박함과 특히 앞으로 받게 될 노후의 연금과 자동차 생각뿐이다. (261쪽)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기뻐서 악수를 청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이젠 한낱 멍청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개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 우리 자신이, 어떤 쪽으로든 발전해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든 전혀 발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한 것도 없이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정말 어느 한구석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이다. (263쪽)

다른 사람들이 멍청한 표현들을 사용하면 우린 계속해서 흥분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형편없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감베티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64쪽)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반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내 취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는 항상 그러지 못했으며 그들의 허풍이 역겨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의상은 틀림없이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입한 것으로 지금 그들은 말하자면 마지막 리허설 무대에서처럼, 남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이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우쭐거리며 대단히 교만을 떨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자만심에 차 있었다. (372쪽)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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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소설에 몰두하는 내공이 깊은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

잠자냥 2016-02-17 18:01   좋아요 0 | URL
네~ 문학을 좋아하고 소설 읽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빈곤론
가와카미 하지메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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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오늘날 문명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라고 이 책은 시작한다. 이 문장만 보면 근래에 쓰인 책인가 싶은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세상에 선을 보인 문장이다. 정확히는 1916년 9월부터 12월까지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소개된 글로, 1917년에 책으로 묶여져 나온 <빈곤론(貧乏物語)>의 서두이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다. <빈곤론>은 그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세상에 선을 보인 책이었고 때문에 몇몇 오류도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빈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주의적인 모습이 종종 보인다. 그럼에도 그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는 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빈곤론>은 크게 3장으로 나뉜다. 가와카미는 첫 번째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가를 따져본 뒤 두 번째로 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지 연구한다. 끝으로 어떻게 해야 가난을 근본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100년 전의 경제학자들에게 가와카미의 이론이 비판받은 것은 마지막장인 ‘빈곤을 퇴치하는 방법’이 제도적인 방법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지나치게 도덕적,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태도 때문이었다.

가와카미는 가난한 사람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부자에 비해 가난한 사람으로 경제상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가난을 꼽았다. 두 번째는 구휼을 받는 사람(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다른 사람의 자선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으로 이는 경제상의 의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물질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경제상의 결핍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세 번째 의미의 사람을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100년 전에도 부의 불평등은 심했다. 가와카미는 영국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지녔음에도 도시 빈곤층의 비율이 30%에 달했다(경제적 의존과 경제적 결핍에 해당하는 이들). 이는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불과 2%에 지나지 않는 최고 부유층이 부의 72퍼센트를 소유했다(프랑스는 60%, 독일 59%, 미국 57% 100년 전 기준).

가와카미는 열심히 일을 해도 노동자는 낮은 임금밖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파헤침으로써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근면 성실한 태도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치스러운 소비를 하지 않는 것과 현격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사람들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 마지막으로 각종 생산업을 개인의 돈벌이에만 맡겨두지 말고, 군비나 교육처럼 국가가 직접 담당하도록 경제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의 사치 근절을 빈곤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이 책을 폄하했다. 학자들의 비판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사회 빈곤을 폭로한 이 책은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빈곤의 해결이 단순히 ‘사치 근절’처럼 인간의 마음, 윤리적 소비와 윤리적 생산에 호소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역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당시 30판이 넘게 팔렸던 이 책을 스스로 절판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의 영향으로 경제학자가 되었고 일본의 출판사에서는 그가 스스로 절판한 책을 다시 출판하여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였던 가와카미는 <빈곤론> 이후 점차 마르크스주의자로 변모했으며 결국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되었다. <빈곤론>에서의 오류를 수정하여 후에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류의 경제사적 발전과정을 설명한 <빈곤론 2>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고,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빈곤론 2>보다 <빈곤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빈곤론>에서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뜨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자발적 가난이 아니라 결핍의 공포를 동반하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극빈한 삶을 그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가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상황을 진심으로 우려한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연대와 도덕성 회복을 주장한다. 그런 그의 주장이 담긴 <빈곤론>은 학자들에게는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가와카미 하지메라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구제원에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온 사람. 그것도 모자라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고는 모든 옷을 기부하고 온 사람. 마지막에는 영양실조와 노쇠로 죽어간 사람. 교토대의 교수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사회주의자로 찍혀 사상의 전향을 강요받고, 감옥살이까지 하면서도 꺾이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이 세상에 선을 보인지 10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넘쳐난다. 부의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다. 가난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넘쳐난다. 100년 전의 학자들이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했던 그의 주장은 여전히 바보 같은 소리일까. 그래도 나는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사회 제도 보다도 그 제도를 만들어냈고, 그렇기에 그 제도를 고칠 수 있는 인간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외침은 1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 따르면 1906년 영국에서는 빈곤 계층 아이들의 학습 능력 및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식사공급조례를 만들어 의회에서 통과했다고 한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이 역시 의회에 있는 이들이 빈곤한 계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선거를 앞둘 때마다 무상급식을 비롯해 가진것 없는 이들을 위한 복지를 화두로 여야가 싸움을 벌인다. 그들이 정말 빈곤한 계층의 마음을 헤아린 것인지, 그저 표를 얻기 위한 쇼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복지를 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이땅에 과연 그러한 날이 올지........



   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몇 명이라도 자유롭게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 다만 무료로 식사를 제공받는 아동에 대해서는 위원회에서 그 아동의 가정 실태를 조하하고 그 사정에 따라 무료 제공을 허락하거나 식비의 일부 내지 전부를 납부하게 한다. 아동은 그 사회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무료로 제공받는 아동과 식비의 일부나 전부를 부담하는 아동을 차별하기 않고 모두 똑같이 대우한다. 따라서 아동들은 서로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100년 전 영국에서 식사제공 조례가 통과한 뒤 블랫포드 시에서 시행된 내용. 가와카미 하지메, <빈곤론>,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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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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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심미안을 가진 예술 비평가로, 열렬한 투사로 그리고 작가로. 분류하기 애매한 책들도 있지만 굳이 나누자면 <해석에 반대한다>, <강조해야 할 것>,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우울한 열정> 같은 책에서는 그 누구보다 뜨겁게 예술을 사랑했던 비평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과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의 제3장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노이 여행’ 등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사회,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폭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화산의 여인>,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인 아메리카>에서는 스스로 그 어떤 이름보다 ‘작가’로 불리기 원했던 수전 손택의 문학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자유다 : At the Same Time (2007)>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굳이 나누자면 어떤 분류에 들어갈 것인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에서 유추하기로 문학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은 그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분류를 포함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장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비평가로서의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2장 ‘미국의 야만성’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의 파시즘적인 행태(특히 부시행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쓴 소리가 펼쳐지고 있어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3장 ‘투쟁하는 독자’는 그녀가 쓴 소설이나 희곡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작가의 의무, 작가란 어떤 위치인가, 번역의 의미(와 중요성) 등 문학 전반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책의 성격상 수전 손택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거나, 그녀에 대해서 깊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이 책을 2장, 3장 그리고 1장 순으로 읽었는데, 이렇게 장의 순서를 바꿔 읽어도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각 장은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전혀 상관없는 에세이들을 엮어놓은 산만한 책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각 장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즈음 머리 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자기 부족에서 떨어져 나오기, 자기 집단에서 나와 정신적으로는 더 넓지만 수적으로는 더 작은 세계에 들어가기. 고립이나 반체제에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 (p.242 ‘용기와 저항’)으로서의 수전 손택의 모습.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p.252 ‘용기와 저항’)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다.

'문학, 세계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 속물주의, 강압적 지역주의, 알맹이 없는 교육, 결함 있는 운명과 불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이었습니다.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 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 (p.274 ‘문학은 자유다’)라고 그녀가 말했듯 손택에게 문학은 이 세상의 진실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가도록 이끌어준 세계였고, 문학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장의 ‘소멸되지 않음’에서 그녀가 찬미한 ‘빅토르 세르주’의 삶에서 수전 손택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자기 자신은 작가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작가보다는 거대한 헤게모니와 맞서 평생을 싸운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확고했던 것까지. 빅토르 세르주의 삶과 묘하게도 닮았다.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싶고, 문학계의 한 판을 차지하고 싶고, ‘작가’라는 타이틀로 거드름을 피우며 사회의 지식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혹은 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수전 손택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그녀가 찬미한 세르주의 삶은 ‘작가’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따라서 문학은(여기서 저는 단순히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이번에도 역시 그럴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래고, 자발성이고, 찬미고, 환희입니다. (p.203 ‘말의 양심’)


양심이나 이해관계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논쟁에 뛰어들거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의견(도덕주의적인 문구)을 내놓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거기 가 본 적도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으면서 이건 지지하고 이건 반대한다는 식으로. 작가는 의견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을 받던 미국의 흑인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p.206 ‘말의 양심’)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스스로 기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적어도’ 혹은 ‘특히’ 미국에서는 실제 사건을 실시간으로 찍는다는 앤디 워홀의 이상이(삶은 편집되지 않는데 왜 삶의 기록은 편집되어야 하는가?) 인터넷 중계에서 당연한 기준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을 기록하여 저마다 리얼리티 쇼를 방송한다. (p.183 ‘타인의 고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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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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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무거운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 사람들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난 범죄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까?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하기엔 카포티의 향기가 무척 느껴진다. 반면 단순한 소설이라 하기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너무나도 충실하게 1959년 미국의 한 마을이 재현되고 있다.


1959년 미국 캔자스의 작은 동네 홀컴에서 일가족 네 명이 엽총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당한 사람은 중년 부부와 그들의 10대 아들, 딸이다. 목격자는 없다. 증거도 없다. 아주 작은 액수의 현금만이 사라졌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왜, 무슨 동기로 그들을 그렇게도 잔혹하게 살해했을까?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카포티는 뉴욕 타임스에서 이 기사를 보고 친구(‘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와 함께 홀컴을 방문한다.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두 명의 범인이 체포된다. 카포티는 그들과 인터뷰를 시도한다. 범인, 마을 사람들, 수사 담당자 등을 만나며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카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위해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그렇게 해서 1966년 <인 콜드 블러드>는 세상에 등장한다. 이 작품은 카포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생생한 기록 속에서 살인이라는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배경, 동기, 살인이 일어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심리, 위선적인 행태, 희생자들의 삶, 남겨진 친인척 및 친구들의 삶, 그리고 무엇보다 범죄자의 삶,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배경, 범죄자들의 심리 등을 만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무엇보다 두 잔혹한 범죄자 딕과 페리 때문이다. 예전에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한 심정이 되살아났다. 연쇄살인범들과의 인터뷰를 다뤘던 이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어린 시절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트라우마)를 얻었다.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어릴 때 성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폭행을 당한 경험이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장 환경에서 자랐어도 범죄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그랬다.

일가족 4명을 잔혹하게 살인한 딕과 페리- 그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조금 특이하다면 딕은 그래도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고, 작은 범죄로 감옥에 가게 되면서 감옥에서 점점 더 망가졌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큰 범죄자가 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페리는 불우한 가정환경, 한없이 부족한 관심과 애정, 사람들의 인정, 받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교육 환경 등 열악한 사회적 환경 때문에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유형이다.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면 분노가 일다가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희생자는 어떨까? 살해당한 클러터 씨 일가는 마을에서 그 누구도 적이 없을 만큼 사랑받던 가족이다. 아이들도 그렇고, 클러터 씨 부부는 말할 것도 없다. 적이 없기 때문에 누가 그들을 죽였을지, 죽이고 싶어 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수사는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무기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한다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은 두려움도 느껴진다.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복잡한 심경이 든다. 잔혹한 범죄를 예방하고자, 그리고 잔혹하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일말의 ‘복수’를 하고자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할까? 파렴치한 범인들이 이토록 선량한 일가족을 몰살하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는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다가도 복수를 위해, 똑같이 죽음으로 되갚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진다. 그런다고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범죄자의 가족들이 사람들을 이목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 끔찍하게 사형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을 볼 때면 더더욱 사형제도의 정당성에 의문이 든다. 

<인 콜드 블러드>는 딕 히콕에 비해 지나치게 페리 스미스를 동정적으로 묘사할 때가 많아 기분이 나빠질 때도 종종 있다. 카포티가 페리라는 인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카포티는 페리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도록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실제로 담당 형사 중 한 사람은 카포티가 페리와 애정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었다고 비난했다). 페리에게 사랑을 느꼈기에 카포티가 그를 그토록 동정적으로 묘사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카포티는 페리에게서 자신과 닮은 면을 봤던 게 아닐까. 자신처럼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한 남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지.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딕과 페리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토록 죽기 두려운 너희들, 너희들은 죽기 그렇게 싫으면서 살려달라고 공포에 떨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댔지?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게 살고 싶니? 욕이 나오기도 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가 치민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데(교화하는 데는)는 결국 강력한 처벌보다도 애정이 중요한 것 같다. 사랑과 끊임없는 관심이 없다면 인간은 이렇게 쉽게 망가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구나 싶다.

모든 범죄는 단지 ‘절도의 변형’이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살인도 포함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거지’(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라는 말. 남의 물건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오거나, 훔쳐 본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을 ‘인간’ 그런데 그 인간이 그런 행동을 단순히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끝내는지, 상습범이 되는지, 그러다 결국 타인의 생명까지 훔치는 잔혹한 살인범이 되는지는 결국 또 다른 인간의 사랑과 관심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정말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그토록 잔인한 범죄자마저도 그 나약함을 벗어날 수는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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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겐 을유세계문학전집 14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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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라이겐>은 창녀와 군인 / 군인과 하녀 / 하녀와 젊은 주인 / 젊은 주인과 젊은 부인 / 젊은 부인과 남편 / 남편과 귀여운 아가씨 / 귀여운 아가씨와 시인 / 시인과 여배우 / 여배우와 백작 / 백작과 창녀 총 열 커플이 등장하는 희곡이다. 등장인물의 배열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듯 한 사람을 매개로 계속 관계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모두 성적(性的)으로 이어졌다.


‘라이겐’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잡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을 말한다고 한다. 슈니츨러는 이 춤의 형식을 빌려 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창녀를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시킴으로써 ‘라이겐’의 원형적 구조를 완성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등장인물들이 아무런 도덕적 가책이나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배우자나 약혼자, 애인을 속이고 불륜을 저지른다. ‘젊은 부인과 남편’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 불륜이며 그 관계에는 어김없이 성행위가 등장한다.

이 작품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게 1903년이라고 하니,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싶다. 실제로 출간 당시 8개월 만에 1만 4천부가 팔렸는데 오스트리아와 독일 검열 당국은 곧 금서 목록에 올렸고, 공연 과정에서도 커다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창녀촌 연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상영 중인 극장 안으로 악취 폭탄이 투척 되기도 했단다(‘악취’ 폭탄이라고 하니 좀 귀엽기도 ㅋ). 퇴폐작가라는 오명까지 쓴 슈니츨러는 결국 ‘라이겐’ 공연을 스스로 영구히 금지했고, 이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한 1982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연할 수 있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퇴폐적이기만 할까?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 아래 감춰진 ‘성적인 욕망’을 통해 인간의 비속함, 저열함 등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말한다. 여자는 고고하고 순결하며 도도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꾀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달이 나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여자는 넘어가고 곧 그들은 성관계를 맺는다. 그 뒤 서로의 태도는 너무나도 뻔뻔하게 바뀐다. 남자는 여자를 막 대하기 시작하고, 여자 역시 처음의 고결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주인공은 계속 바뀌지만,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사와 행동은 다를 바가 없다. 

슈니츨러의 작품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인간 심리를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하듯 분석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을 비롯해 함께 들어 있는 또 다른 희곡인 <아나톨>, 단편 소설 <구스톨 소위>를 봐도 <라이겐>처럼 인간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것도 인간의 찌질한 면을 잘 꼬집어서 보여준다. 

외설적이고 퇴폐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상당히 야할(?) 것 같지만 사실 <라이겐>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는 모두 “……”로 암시되고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묘사도 없고 단지 그냥 “…”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렸을 때는 어떠했을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남녀가 껴안은 채 무대 위의 불이 꺼지려나? 그런데 이런 연극을 보고 ‘창녀촌 연극’이라며 난리가 났던 것을 보면 100년이 지난 지금 주변의 자극은 실로 엄청나게 발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뭐 요즘 연극은 정말로 관객의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데 더 말해 무엇하리.




저 가운데 줄 .........................이 바로 문제(?)의 장면이다.

촛점이 맞지 않아 사진이 매우 흐리게 나왔는데 왠지 어울리는 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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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6년 리뷰에 땡투합니다.
그런데.. 별은 셋이로군요.. 흐음.....

잠자냥 2022-08-22 16:22   좋아요 0 | URL
이 시절에는 슈니츨러가 전반적으로 저랑 좀 맞지 않는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장님이 갖고 계신 그 책, <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도 그랬고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특히 구스톨 소위.... 기억에서 잊힌 구스톨아, 내가 다시 만나주랴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8-22 16:36   좋아요 1 | URL
곧 다시 만납시다, 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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