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막 펭귄클래식 124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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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따뜻하고 쓰디쓴 커피 한 잔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이런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책 한 권을 들고 방구석 침대에 누워서 단 번에 읽어내려 간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도 없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 : Le Desert de l'amour (1925)>은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랑의 사막>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한 여자. 영화로든 문학작품으로든 이런 소재의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부자(父子)라는 말만으로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구체적인 작품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 또한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쉰두 살의 쿠레주 박사와 열일곱의 레몽 쿠레주는 부자지간으로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같은 인물임은 서로 알지 못한다. 이 두 남자의 뜨거운 욕망의 시선을 받는 여자는 스물일곱의 마리아 크로스. 안타깝게도(?) 그녀는 어떤 유부남의 정부(情婦)이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될까.

이 작품은 페이지 페이지마다(아니 문장 문장마다?) 사랑이라든지 욕망, 인간의 고통과 갈등, 번민에 대한 탁월한 시선에 놀라 감탄했다. <사랑의 사막>에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다른 남자의 정부를 사랑하는 늙은 유부남도 아니고, 연상의 여자를 욕망하는 열일곱 소년도 아니고, 그런 이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스물일곱 여자도 아닌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쿠레주 박사가, 때로는 레몽이, 또 때로는 마리아 그녀가 되어 있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작품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만들 의도를 가진 적이 없다 해도, 우리 운명을 가로질렀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모든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우리 속에 만들어낸다. (68쪽)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이 구절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쿠레주 부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 마리아는 그들에 의해 빚어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둘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무척이나 모순된다. 아버지 쿠레주에게 마리아는 성녀 그 자체다. 순결하고 고귀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존재. 반면 아들 레몽에게 마리아 그녀는 정열에 가득한, 때로는 음탕하기 그지없는 여자. 한 여자에게서 어떻게 그들은 이토록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마리아가 생각하는 그 두 남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마리아에게 쿠레주는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자와 같은 인물로 고결하고 품위 있는 존재다. 너무나 고결해서 지루하기까지한 사람이랄까. 또한 마리아에게 소년 레몽은 젊고 순수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은 물론 자신의 타락한 영혼까지 어쩐지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존재다. 자신이 혹시 유혹이라도 한다면 그 순수한 존재를 망칠 것만 같아, 죄를 지을 듯하여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가슴으로만 애태우는 존재. 하지만 마리아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그 두 남자의 실체 또한 그러할까?

늙은 쿠레주나 젊은 쿠레주가 ‘마리아’의 실체 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 혹은 이미지를 사랑한 것처럼 마리아 역시 두 부자의 진정한 면모를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비단 마리아와 쿠레주 두 부자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지만 그 실체를 직시하는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매혹시키는 이미지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임을 깨닫지 못(126쪽)‘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인간들이 모두 그러하지 않을까?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랑했던 대상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뒤늦게 깨달은 후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경험은 누구나 다 있었으리라.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이해시킬 수도, 혹은 보여줄 수도 없으며 자기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그저 자신이 가진 환상 혹은 이미지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진짜 그 대상을 알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타인과 자기의 진정한 소통이란 애초에 아무리 사랑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의 사막>은 보여준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일 뿐이라는, 그렇기에 거기에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사막’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막’이 아닌, 결코 마르지 않는 샘, 우물과 같은 그런 사랑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그 욕망을 충족해야만 한다. 사랑에서 욕망의 채움이란 곧 함께 있는 것,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두 육체의 결합. 만지고 쓰다듬고 느끼고 등등이리라. 이런 궁극적인 욕망이 채워진다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지속될까? 그러나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욕망한 것을 소유하게 되면 어느덧 그 가치를 잊기 마련이다. ‘더 이상 욕망도 없이 지겨운 습관만이(189쪽)’ 남을 뿐이다. 결국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는 대상만이 지속적으로 목마른,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상태를 지속하게 한다. 때문에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모리아크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사랑도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할지도(169쪽)’ 모르며 그렇기에 처음부터 완전하게 실현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상태의 계속됨만이 아닐까.

<사랑의 사막>을 읽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쿠레주 박사처럼 자신의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그 사람의 실체를 사랑했기 보다는 환상, 내가 만들어낸 허상을 사랑했던 적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했다던 그 존재들은 과연 내 실체를 사랑했을까? 아니, 내 실체를 알기는 했을까? 그들이 ‘빚은’ 혹은 ‘발견한(아니면 발견했다고 착각한)’ 나란 사람의 이미지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마리아를 사랑하는 자기를 보며 쿠레주 박사는 자신이 항상 동일한 사랑의 방식, 즉 사랑하는 대상에 가닿지 못하는 사랑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랑을 대하는 기본 태도이다. 마리아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레몽 또한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아마도 일생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지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은 두 남자와 한 여인의 사랑이라는 어쩌면 한없이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토록 읽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꼭 사랑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자기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까지 던진다. 인간이란 어쩌면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섬에 고립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각자 그 섬에 닿으려고 아무리 노력하지만 결국 닿지 못하는... 섬과 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이 존재하는.... 그럼에도 그 사막을 건너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들... 쿠레주 부자(父子)와 마리아 크로스. 그리고 현재의 당신과 나. 모두가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면 난 화가 나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지요. 오늘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은 끔찍하게도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요.”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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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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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온 사람들은 먼저 술과 안주를 주문한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한 시간에 오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 때문에 늦게 오는 이가 한 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사람 생각을 한다.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따로 챙겨놓든가, 아니면 그가 와서 뒤늦게 왔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마련이다.


가족끼리의 밥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바쁜 시대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일은 참 드물다. 언제나 늦게 오는 가족의 일원이 있기 마련이고 밥상을 차리는 이는 꼭 이렇게 뒤늦게 오는 가족을 위해 그 몫의 음식을 따로 챙겨둔다. 사람들은 이렇게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이와의 관계에서는 뒤늦게 온 사람에 대한 배려를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한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혈연이나 친분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라면 어떨까? 내 몫을 남에게 선뜻 떼어 주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자기 몫을 떼어 주어야 할 사람이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늦게 왔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 일도 덜했다면? 그런 이에게 자기가 받은 몫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가질 것이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신약 ‘마태복음’ 제20장 제13~14절)라는 성경의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존 러스킨이 말하는 ‘나중에 온 이 사람’이란 사회 경제적 약자를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나중에 온 이 사람’이라는 성경의 한 구절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러스킨이 이 글을 쓸 당시 영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시기였지만 그와 함께 경제공황, 실업, 빈부격차 같은 폐단으로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러스킨은 이러한 때 주류 경제학을 ‘악마의 경제학’이라 비판하며 대안으로 인간의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의 영혼과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진짜 경제학이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162쪽) 러스킨은 ‘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부 는 전기와 비슷한 힘이어서, 그 자체의 불균형 또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적용된다.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1기니의 힘은 여러분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만약 이웃이 그 돈을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1기니는 여러분에게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1기니가 가진 힘의 정도는 그 돈에 대한 이웃사람의 필요나 욕망에 정확하게 좌우된다. 따라서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 두는 기술인 것이다.’ (86~87쪽)

러스킨에 따르자면 내가 많이 가질수록 세계의 어느 한 쪽에서 그만큼 자기 몫의 파이가 줄어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러스킨은 내 몫의 파이를 사회 경제적인 약자(나중에 오는 이)를 위해 나눠줄 수 있는 인간의 ‘애정’에 기초한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부를 많이 가진 사람, 고용주들이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노동자를 ‘자기 아들’ 대하듯이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면 이런 선량한 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있는 요즘 이 책을 읽자니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맞는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인데, 이게 정말 실제로 적용될 수 있을까?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에도 러스킨의 이 글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일반 경제학자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러스킨의 주장은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도 믿은, 한 이상주의자의 생각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기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척박하다.

러스킨의 주장대로 ‘부’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면, 아무리 많이 가진들 그 ‘부’를 갖고 지배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숨막히는 경제시스템에서 지배할 이들이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때문에 러스킨의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富)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잘 못되고 부자연스럽고 파괴적인 노동제도’때문에 ‘서투른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반값에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고’ ‘그런 노동자는 숙련된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숙련된 노동자가 서투른 노동자와 경쟁하느라 부당한 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게 되어’(67쪽)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느니 자기 몫을 조금은 덜 챙기더라도 최대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이상한 경제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유일한 경제학이고, 앞으로도 다른 경제학은 있을 수 없다,’(196쪽) 러스킨의 말대로 ‘이상한 경제학’이지만, 지금 지구는 이 이상한 경제학에 그 어느 때보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중에 온 이'의 몫을 챙겨주는 행위는 그가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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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 모멘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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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육식의 단점, 혹은 육류산업의 폐해를 다룬 책은 꽤 많다. <육식의 종말>과 같은 책들은 언제부터인가 찾아보기가 쉬워졌다. 육식을 주제로 한 내용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방송 등 각종 미디어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육식주의자에 반대되는 개념인 채식주의자라는 말도 언제부터인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고.

나 또한 이런 정보를 통해 육식의 폐단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서 그냥 고기 먹기를 포기하고는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Why We Love Dogs, Eat Pigs, and Wear Cows: An Introduction to Carnism>는 육식주의를 파헤친 책이다. 육식주의에 대한 수많은 책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 정말 왜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저런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우리의 가족 혹은 친구 같지만 돼지와 소는 그렇지 않다. 애완동물이 아니다. 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다.”라고. 그러나 이 지구상에 먹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생명이 대체 얼마나 될까? 저자는 ‘사람들은 흔히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하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돼지와 소도 그에 못지않게 영리하고 감정을 지닌 동물이며 새끼 돼지나 소는 개 못지않게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어떤 동물에 대해 떠올릴 때 사람들은 ‘스키마’에 의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심리적 틀을 이른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 관계- 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15쪽)’

육식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돼지, 소, 닭 등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돼지와 닭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결코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런데 사람들은 들판을 뛰어다니던 돼지와 소, 혹은 닭에게서 ’고기‘가 나왔다는 것을 잘 연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걸 연결 지어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때문에 스스로 외면하거나 외면하게끔 육류산업에서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연결고리, 혹은 육류산업군에 의해 방해되어 철저히 감춰진 그 연결고리를 다시 찾으라고, 찾아야만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물론, 그 인간들에게 잡아먹히는 동물들, 그리고 그런 동물을 키워내기 위해 몸살을 앓는 지구까지 공멸한다고) 주장한다. 육식주의는 굉장히 폭력적이지만 가부장제처럼 이미 이 사회에서 주류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며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를 강조한다.    

내가 이 책을 꽤 괜찮게 읽은 이유는 이 책이 단지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만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들이 사실은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보면 아,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의 예문에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대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데올로기- 예를 들면 가부장제, 이성애, 인종주의 등의 단어를 입력해보라. 그 이데올로기들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육류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내가 ‘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즉,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것이다. 3N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서부터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에 이르는 모든 착취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돼 왔다. 한 이데올로기가 전성기에 있을 때는 이런 신화들이 면밀하게 검토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스템이 마침내 붕괴하면 그 3N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서 내세운 이유를 생각해 보라. 남성만 투표를 하는 것은 ‘선조들이 정해 놓은 일’이며, 여자들이 투표를 하게 되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고, ‘재앙과 파멸이 온 나라를 덮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132쪽)


육식이 결코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러서 결국 ‘먹는다’는 일의 끔찍함, 혹은 폭력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당장 육식을 끊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면서 육식주의자를 포기하고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참 쉬운 길은 아니다. 회사를 다닌다면 더 그렇다. 사람들과 함께 먹는(먹어야만 하는) 점심 식사와 회식자리에서 메뉴를 살펴보면 더 갑갑해진다. 나는 언젠가 고기 좀 멀리했다고 채식주의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육식주의에서 벗어나기를 거듭 강조한다. “동물들이 앞으로도 계속 고통받고 죽어 가리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197쪽)며.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먼저 고기를 찾아먹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할 때마다 내 마음을 심하게 뒤흔드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치킨!! ㅠ_ㅠ 치킨을 어떻게 끊어;; 치킨과 맥주를! 닭을 한 번 애완용으로 길러볼까…. ㅠ_ㅠ
 

우리는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생활방식이 보편적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또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38쪽)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 한 예가 가부장제다…. 육식주의도 마찬가지다. (39쪽)

어떤 면에서, 채식주의가 육식주의보다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당연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들은 알아보기가 더 쉬우니까. 그러나 육식주의보다 채식주의에 먼저 이름이 붙은 데는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40쪽)

어느 수준에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95~96쪽)

대규모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희생자 아니면 가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디스 허먼은 모든 방관자는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으며, 도덕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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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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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루해서 고전은 못 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는 몇 번쯤 ‘뭐야? 이거 왜 이래? 계속 읽어야 하나?’ 싶은 순간이 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험버트’의 끊임없는 수다와 말장난을 기억하리라.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명백히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

주인공 ‘게르만’은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놓고 언어유희를 즐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읽는 이는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롤리타>에서의 험버트(아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의 수다가 그리 싫지 않았던(혹은 참을 만했던) 사람이라면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이 펼쳐놓는 이야기에도 큰 거부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

‘험버트’와 닮은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 편의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한 문구 중에 ‘폭로해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플롯’이라는 구절이 있던데, 정말 그렇다. 만약 이 작품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와 상관있는 그 어떤 내용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의 서두는 정도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는 절대로! 스포일러를 모두 피해야 한다. 그나마 어떤 작품인지 잠깐 소개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색다르다고 해야 할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 그는 어느 날 출장 중에 교외를 거닐다 풀밭에 잠들어 있던 한 부랑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부랑자 펠릭스- 그는 게르만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의 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신과 이토록 닮은, ‘분신’ 펠릭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게르만의 머릿속에는 놀라운 생각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작품을 읽으며 두 번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험버트’를 쏙 빼닮은 ‘게르만’의 수다와 자아도취적인 태도 때문에….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놀랍도록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게르만의 수다가 단순한 ‘수다’가 아니었구나 싶어 감탄했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그 흔치 않은 작품에 속한다. 참 매혹적인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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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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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유미주의,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하다(또 다른 유미주의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도 그에게 존경을 표할 정도). 여체에 대한 탐미,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쉬 등 인간의 변태(?)성욕에 대한 집착 등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만(卍)>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이 두 작품 또한 그런 작가의 문학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먼저<만(卍)>을 살펴보자. 얽혀있는 저 한자 모양처럼 이 작품은 남녀 네 명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주를 이룬다. 동성애, 마조히즘, 사디즘 등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평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말에는 딱히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속고 속이는 인간의 기만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사뭇 충격적이다. 뭐랄까, 인간은 어차피 이런 족속이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으로 또 확인하니 뼈저리게 씁쓸하다.


스포일러를 제외한 내용은 간단하다. 고지식하고 답답한 남편을 둔 유부녀 소노코는 취미 생활로 동양화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육체와 미모를 가진 미쓰코를 만나 한눈에 호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던 소노코에게 기회는 우연히 주어진다.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미쓰코와 소노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을 계기로 실제로 그 둘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소노코는 미쓰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어 가고 남편을 속여 가며 대담한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기만을 사랑하다고 믿었던 미쓰코에게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그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만(卍)>에서 미쓰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육체에 반해 노예처럼 그녀에게 복종한다. 미쓰코 역시 그런 이들의 숭배를 받으며 점점 이기적이고 포악해져간다.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 절대적인 숭배를 받고자하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은 물론 아름다운 대상을 숭배하며 굴종하는 인간의 노예근성 등을 폭로한다. 무엇보다도 미쓰코를 자기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한다기보다 결국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열정)에 빠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일본의 고전 문학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80에 가까운 노인이 20대의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행복에 빠져 사는 이야기로 이 작품에도 역시나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당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를 어머니로 둔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이나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내용도 재미있지만 고전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분위기나 문장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온 ‘호색문학’의 전통을 근대문학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며 그만의 에로틱한 탐미주의 문학으로 피워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단순히 여체 숭배에 집착한 초기 작품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고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전통미를 탁월하게 결합했다고 하는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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