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장장 500페이지에 걸쳐 쓰인 내용은 퍽 단순하다. 주인공 프라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온 이틀 후 부모님과 형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단 사흘 동안의 기록이다. 그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인물 및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500페이지를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멸’의 무라우 역시 부잣집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며 ‘정신적인’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 그 자체다. 특히 그의 혐오는 가족을 향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나치의 수하로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한 두 여동생,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순하기만 한 형- 이런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고향집 ‘볼프스엑’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볼프스엑이 우리 가족의 손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을 챙기는 일에만 신경 썼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생산지, 즉 농경지-지금도 2천 헥타르나 된다-와 광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늘 경제적인 이윤 추구 외에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는 척하면서 문화, 심지어 예술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사실 보잘것없어 부끄러울 정도였다. (21~22쪽)


가족 외에 그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혐오도 굉장하다. 실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을 저작권법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스스로 금했다고 하니, 고국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컸는지 짐작가능하다. 그런 그의 분신이 주인공 ‘무라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한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며, 이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고, 불가피한 경우라면 절대 필요한 선에서만 관계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 인정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성을 잃은 비굴함을 종종 입증해 보였고, 매일같이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기회에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나라이며, 언제나 하는 말처럼 민주주의 국가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가공스럽고 비굴하며 수치심을 모르는 국가이고, 자신의 가공스러움과 비굴함, 수치심을 모르는 철면피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함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341쪽)


가족과 고국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도 엄청나다. 무라우가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비정신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즉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사치와 허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문학과 예술처럼 정신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특히 반(反)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인물인 ‘어머니’에 대한 혐오는 엄청나다.

하지만 무라우가 혐오하는 세계, 그가 쏟아내는 거짓과 위선, 허영에 가득 찬 인물에 대한 독설이 통쾌하다가도 ‘그런데 이건 좀 아닌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볼프스엑’에 있는 정원사 집단과 사냥꾼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그 집단에 대해 갖는 느낌이 특히 그렇다.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고 동물 사냥이나 하는 사냥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게다가 무라우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과 무라우가 비정신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지나친 선민의식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은 역겨워졌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추구하는 ‘정신적인 세상’은 역시 나치에 협력하며 가문을 지켜 온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다(이것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읽을 때도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나쓰메 소세키의 ‘한량’ 주인공들 또한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무라우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굳어버린 세계를 도망쳐 이탈리아처럼 자유로운 곳에 머물며 독문학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결국 비싼 집을 구하고, 문학과 예술로 대표될 수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 끊임없이 도망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던 것은 그가 그토록 혐오한 ‘볼프스엑’의 부유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무라우가 ‘볼프스엑’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욕하는 태도에 나중에는 좀 질려버리더라. ‘그렇게 혐오스럽다면 경제적인 지원을 비롯하여 아예 다 끊어버리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부모와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모든 재산의 상속인이 된 무라우는 본격적인 ‘소멸’ 작업에 들어간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159쪽)’라는 생각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한량’ ‘선비’형 주인공들을 볼 때처럼 ‘무라우’라는 녀석을 보면서 ‘하이고, 그래 너 혼자 고결하신 지성인이다.’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자기만 잘났다는 거야 뭐야? 이런 심정. 그러나 결국 무라우 역시 자기 자신조차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냉소와 혐오, 까칠함과는 다르다고 느낀 것은 무라우의 혐오는 분노에 가까운 혐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나약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혐오스러운 주변 인물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일은 거의 없는 느낌. 무라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 끊임없이 상처받았다고 서술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베른하르트에 비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래도 인간에 대해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오스트리아’는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에서 무라우가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자기반성, 수치를 모르는 채, 거짓과 위선, 사치와 허영, 경제적인 것에 모든 것을 바친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 덧붙여 자기가 태어난 집과 가족, 그리고 고국을 멀찍이 떨어져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사람에게는 분명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느껴본다.

괜찮은 작품임에도 살짝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초반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졌던 이유는 너무 방대한 분량 때문인 듯하다. 특히 막판에 좀 괴로웠던 이유는 무라우가 지나치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랄까. 250페이지 정도는 덜어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사진이란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지 못한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든 상관없이, 사진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손상하고 자연을 엄청나게 왜곡하여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24쪽) 

네 아버지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 졸업장이 바로 고도의 정신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단다. 잘못된 생각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이런저런 타이틀을 지닌 자들을 증오했단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더구나. 대학교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단다. 타이틀이란 대부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지. 대단할수록 그만큼 멍청하다는 거야.  (42쪽)

네 아버지가 읽는 신문은 ‘오버 오스트리아 농민지’뿐이고 읽는 책이라곤 <회계장부>뿐이란다. 그들은 정기 회원권을 이용하고 있어서 연극을 보러 린츠로 가서는 끔찍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볼륨을 최대로 올려서 음향이 엉터리로 울리는 브루크너 하우스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콘서트도 보러 간단다. 이 사람들은, 너의 부모 말야, 연극이나 콘서트 때문에 정기 회원권을 쓰는 게 아니었단다. 그들은 삶 전체의 근거를 정기 회원권에 두고 있지, 매일 같이 극장에 가서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단다. 엉터리 음향만 울려 퍼지는 역겨운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란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정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을 정기 회원권으로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지, 극장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는 셈이지. 콘서트에서 환호하듯이 살면서 환호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계속 환호한단다. (47쪽)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경시하면서 졸업장이나 타이틀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다. 졸업장이나 타이틀은 거실의 벽에 걸어둔다. 도축 장인, 철학자, 보조 요리사, 변호사, 파나는 집 안에 증서를 걸어 놓고 평생 동안 탐욕스럽게 응시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끼리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놓고 말하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졸업장과 타이틀이다. (63쪽)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날의 20대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분별한 향락 말고는 얼마나 만사에 무관심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춤을 추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빈둥거렸고, 평생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결국 치명적이 될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부터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서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렸고 온통 직업과 여자, 쓸데없는 외형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형편없는 천박함과 특히 앞으로 받게 될 노후의 연금과 자동차 생각뿐이다. (261쪽)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기뻐서 악수를 청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이젠 한낱 멍청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개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 우리 자신이, 어떤 쪽으로든 발전해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든 전혀 발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한 것도 없이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정말 어느 한구석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이다. (263쪽)

다른 사람들이 멍청한 표현들을 사용하면 우린 계속해서 흥분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형편없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감베티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64쪽)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반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내 취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는 항상 그러지 못했으며 그들의 허풍이 역겨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의상은 틀림없이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입한 것으로 지금 그들은 말하자면 마지막 리허설 무대에서처럼, 남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이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우쭐거리며 대단히 교만을 떨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자만심에 차 있었다. (372쪽)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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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소설에 몰두하는 내공이 깊은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

잠자냥 2016-02-17 18:01   좋아요 0 | URL
네~ 문학을 좋아하고 소설 읽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