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라이겐>은 창녀와 군인 / 군인과 하녀
/ 하녀와 젊은 주인 / 젊은 주인과 젊은 부인 / 젊은 부인과 남편 / 남편과 귀여운 아가씨 / 귀여운 아가씨와 시인 /
시인과 여배우 / 여배우와 백작 / 백작과 창녀 총 열 커플이 등장하는 희곡이다. 등장인물의 배열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듯 한
사람을 매개로 계속 관계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모두 성적(性的)으로 이어졌다.
‘라이겐’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잡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을 말한다고 한다. 슈니츨러는 이 춤의 형식을 빌려 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창녀를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시킴으로써 ‘라이겐’의 원형적 구조를 완성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등장인물들이 아무런 도덕적 가책이나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배우자나 약혼자, 애인을 속이고 불륜을 저지른다. ‘젊은 부인과 남편’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 불륜이며 그 관계에는 어김없이 성행위가 등장한다.
이 작품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게
1903년이라고 하니,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싶다. 실제로 출간 당시 8개월 만에 1만 4천부가 팔렸는데 오스트리아와 독일
검열 당국은 곧 금서 목록에 올렸고, 공연 과정에서도 커다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창녀촌 연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상영
중인 극장 안으로 악취 폭탄이 투척 되기도 했단다(‘악취’ 폭탄이라고 하니 좀 귀엽기도 ㅋ). 퇴폐작가라는 오명까지 쓴 슈니츨러는
결국 ‘라이겐’ 공연을 스스로 영구히 금지했고, 이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한 1982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연할 수 있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퇴폐적이기만 할까?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홍상수의 영화를 연극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 아래 감춰진 ‘성적인 욕망’을 통해 인간의 비속함, 저열함 등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말한다. 여자는 고고하고 순결하며 도도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꾀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달이 나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여자는 넘어가고 곧 그들은 성관계를 맺는다. 그 뒤 서로의 태도는 너무나도 뻔뻔하게
바뀐다. 남자는 여자를 막 대하기 시작하고, 여자 역시 처음의 고결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주인공은 계속 바뀌지만,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사와 행동은 다를 바가 없다.
슈니츨러의 작품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인간 심리를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하듯 분석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을 비롯해 함께 들어 있는 또 다른 희곡인 <아나톨>,
단편 소설 <구스톨 소위>를 봐도 <라이겐>처럼 인간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것도 인간의 찌질한 면을 잘
꼬집어서 보여준다.
외설적이고 퇴폐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상당히 야할(?) 것 같지만 사실 <라이겐>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는 모두
“……”로 암시되고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묘사도 없고 단지 그냥 “…”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렸을 때는 어떠했을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남녀가 껴안은 채 무대 위의 불이 꺼지려나? 그런데 이런 연극을 보고 ‘창녀촌
연극’이라며 난리가 났던 것을 보면 100년이 지난 지금 주변의 자극은 실로 엄청나게 발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뭐
요즘 연극은 정말로 관객의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데 더 말해 무엇하리.
저 가운데 줄 .........................이 바로 문제(?)의 장면이다.
촛점이 맞지 않아 사진이 매우 흐리게 나왔는데 왠지 어울리는 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