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욕망 열린책들 세계문학 171
유진 오닐 지음, 손동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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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희곡 <느릅나무 아래 욕망 : Desire Under the Elms>은 꽤 짧은 분량인데 마치 영화를 보듯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원초적인 ‘욕망’ 때문에 파멸해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이 작품 역시 한 가족의 이야기다.


탐욕스럽고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한 아버지 ‘캐벗’과 그의 세 아들 ‘시미언’, ‘피터’, ‘에벤’, 그리고 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하는 한 여자 ‘애비’- 이렇게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극은 흘러간다. 주인공은 캐벗의 셋째 아들인 ‘에벤’이라고 볼 수 있다. 에벤에게 있어 시미언과 피터는 이복형이다. 캐벗이 두 번째 결혼을 통해 낳은 아들인 에벗은 자신의 어머니를 캐벗이 학대하다 죽였고 원래 어머니 소유였던 농장마저 아버지가 빼앗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언제든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의 농장을 되찾을 꿈만 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벗’은 세 번째 부인이라며 ‘애비’를 데리고 나타난다. 캐벗보다는 오히려 에벤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애비’는 전형적인 팜므파탈형 여인으로 에벤이 다시 되찾고자 하는 ‘농장’에 대한 탐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캐벗이 죽으면 ‘이 농장은 내 것’이 될 거라며 에벤을 마음껏 조롱한다. 농장을 둘러싼 캐벗과 에벤, 시미언과 피터, 그리고 애비의 욕망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 욕망의 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줄거리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계속 책장을 넘기다보면 좀 충격적인 전개로 흘러간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도 느껴지고 애비와 에벤의 관계에서는 ‘페드라’도 느껴진다. 영화 <Desire Under the Elms>는 소피아 로렌과 앤서니 퍼킨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던데, 앤서니 퍼킨스는 공교롭게도 영화 <페드라>에서도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인물이다(아주 오래 전에 <페드라>를 보면서 앤서니 퍼킨스는 고뇌하는 미남형이라 느꼈는데 거의 비슷한 역을 맡았다. 아마도 이 배우 얼굴이 좀 이런 역에 어울리는 얼굴인지도).


이 작품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와 비슷하지만 욕망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와 조금은 더 충격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비극적이면서도 슬프고 강렬하면서 아름답다. 혹시라도 이 작품을 이 책으로 읽을 사람이 있다면 책 뒤표지는 읽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작품의 모든 줄거리가 나와 있다. 물론 이 리뷰도 이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겠지만…. 그래도 낱낱이 밝히지는 않았다....

작품을 다 읽고 유진 오닐 연보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유진 오닐의 딸이 18세의 어린 나이로 찰리 채플린과 결혼을 하자(당시 채플린의 나이는 54세로 유진 오닐보다 고작 한 살 어렸다고 한다), 유진 오닐은 그의 딸 우나와 평생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가족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살았던 그가 결국 자신의 딸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준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가족’이란 존재는 결국 존재 자체가 ‘상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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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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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중 하나는 '인간관계'가 아닐까. 가족, 친구, 연인, 직장 상사 등 수 많은 '인간관계'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로빈 스턴의 <가스등 이펙트>는 인간관계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 혹은 무기력을 느끼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보며 '혹시 내가 타인에게 가학적으로 대하는 면은 없을까'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가스등 이펙트'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 상대방을 이상화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잉그리드 버그먼이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고전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따왔다. 이 영화에서 남편은 아내 폴라의 유산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그가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방에 불을 켜면, 그 때문에 폴라의 방에 있는 가스등이 희미해지곤 하는데, 폴라가 아무 이유 없이 흐릿해지는 가스등에 대해 얘기하면,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환각을 보는 것이라고 매도한다. 폴라는 혼란스럽고 겁에 질린 나머지 점차 히스테릭하게 행동하고, 남편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실제로도 무기력하고 방향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영화로 이러한 가학-피학적 인간관계를 ‘가스등 이펙트(Gaslight Effect)’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사실 가해자, 피해자(가학-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나는 상관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서 나열된 사례들을 보면 이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힘의 균형, 혹은 권력의 균형이 동등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가스등 이펙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을 펑펑 쓴다는 배우자의 비난이나 스타일이 우스꽝스럽다는 어머니의 빈정거림, 자신의 업무 능력을 낮게 평가하는 상사의 지적 등등. 대체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거나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서 더 우위에 있거나 더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드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가스등 이펙트'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어렵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자식을 이끌기 위해, 아이들이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게 만들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저자는 가해자의 유형을 크게 '난폭한 유형' '매력적인 유형' '선량한 유형'의 세 가지로 나눈다. '난폭한 유형'은 소리를 지르며 피해자를 비난하기 때문에 알아채기 쉽다. 피해자는 그가 언제 감정을 폭발시킬지 몰라 항상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한다. 폭력적인 남편이나 남자친구, 억압적인 상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매력적인 유형'은 대체적으로 연인에게서 볼 수 있는데, 불안정하고 예민한 성향은 이성에게 오히려 연민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그의 자아도취적 성향을 낭만적인 사랑으로 오해하고, 그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는 갖가지 해석과 추측을 달아 자신이 원하는 신비로운 이미지로 재창조한다. 마지막으로 '선량한 유형'은 부모나 단짝 친구, 충실한 배우자처럼 피해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알아채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피해자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이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불평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참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현재 '가스등 이펙트'에 처한 상황인지 체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각 단계별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에, 타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삶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친구, 어머니, 직장 상사, 연인과 다툰 것을 계속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괴로워한다면 이미 어떠한 '가해자'로부터 심정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 삶을 다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를 존중'하는 법을 찾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를 이 책은 권유한다.


상대방과 계속 만날 것인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질문

1. 나는 이 사람을 다르게 대할 수 있는가?


2. 상대방이 나를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


3. 나에게 상대방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의지가 있는가?


4. 현실적으로,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 사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향력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자신이 항상 옳다고 여기며 자존심을 세우고 힘을 과시하는 가해자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들의 인정이나 사랑, 관심이나 보호 등을 받기 위해서 가해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영향력 행사는 성별에 구분 없이 모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22쪽)


 문제는 상대방의 영향력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해와 인정, 사랑을 받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걱정에서 상대방의 영향력이 생겨난다. 우리가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상대방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특히 그 말 속에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그것을 불신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특히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즉 그들을 인생의 동반자나 존경할 만한 상사 혹은 훌륭한 부모로 생각한다면 그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기는 쉽지 않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할 때, 상대방의 영향력이 시작된다. (25쪽)


 

 실제 인간관계에서는 상대방을 조종하는 사람이 비록 결과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더라도 처음부터 사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어긋나는 작은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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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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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본 고전문학인 <겐지 이야기>를 읽었다.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문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달까. 일본 고대소설로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를 현대 일본어로 옮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여성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가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겐지 이야기>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어로 옮긴 것을 김난주가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일본어라고 해도 고어를 헌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분명 세세한 차이가 있으리라. 특히 한 사람은 여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남성이니 조금 더 그 차이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읽은 버전은 ‘세토우치 자쿠초’가 옮긴 것을 번역한 본이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겐지 이야기>는 또 어떤 다른 맛과 멋을 보여줄지 좀 궁금하기는 하다.
 
내가 <겐지 이야기>를 언급하는 까닭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고 보니 분명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 뒤에 수록된 저자 연보를 읽어보니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 뒤에 <세설>을 썼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으리라. 단순히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학을 비롯해서 일본문학의 여러 부분들-특히 연애관이랄까, 에로티시즘-이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겐지 이야기>는 시대의 미남자 ‘겐지’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록 그 이야기가 보여주는 남녀관계라든가, 연애관 등에 모두 동의할 수 없고 때로는 불쾌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로 찬사를 보낼만한 점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자연물’에 기쁨, 슬픔, 사랑, 고통, 노여움 등 인간의 성정을 빗대어 표현하는 부분들이다. 그런 장면들은 정말로 아름다워서 아, 하는 찬탄을 하게 된다.


북쪽 나라로 돌아가는 기러기가 울어대듯
어젯밤에는 울면서
그곳에서 돌아왔구나
어차피 잠깐 살다 가는 세상
어디에나 영원히 살 곳은 없으니.

          -<겐지 이야기>, 7권,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토우치 자쿠초 현대일본어로 옮김, 김난주 옮김, 한길사


<세설>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곧잘 등장한다. 내가 <세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올 뻔한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반딧불을 잡는 장면과 사치코가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이 두 장면은 자연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 자연물과 빗대어 그 순간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읽는 순간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닌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리라는 말이 왜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1917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 생각을 하면 사치코는 자신이 올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나이가 되었고 큰집의 쓰루코는 벌써 그 때의 어머니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는 지금 쓰루코나 사치코보다 훨씬 아름답고 청아한 분이었다. 하긴 돌아가셨을 때의 주변 상황이나 병 등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열다섯 소녀였던 사치코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은 실제 이상으로 단아하게 비쳤을 것이다. 폐병 환자라도 병세가 심해지면 추하게 마르고 안색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머니는 폐병이었으면서도 임종 때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안색도 하얗고 투명해졌을 뿐 검은빛을 띠지 않았고 몸도 가냘프게 마르기는 했지만 손끝과 발끝까지 윤기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병이 든 것은 다에코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하마데라, 그다음에는 스마에서 요양했다. 마지막에는 바닷가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해서 미노에 있는 조그만 집을 빌려 그곳으로 옮겨 갔다. 어머니의 말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만나러 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되도록 짧은 시간만 머무르다 돌아와야 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와서도 해변의 쓸쓸한 파도소리나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언제까지고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상화해서 생각했고 그 영상이 사모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미노로 옮기고 나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으므로 이전보다 자주 문병하러 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임종하던 날은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 와 사치코 등이 달려갔고 얼마 안 있어 곧 숨을 거두었다. 며칠 전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가을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병실 툇마루 유리창에 뿌옇게 빗물을 뿌리던 날이었다. 장지문 밖에는 아담한 뜰이 있었고 거기에서 빗물이 완만하게 골짜기로 흘러내렸는데, 뜰에서 벼랑에 걸쳐 피어 있는 싸리꽃은 이미 떨어진 채 세차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골짜기에 물이 불어 산사태라도 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던 아침의 일이었다. 빗소리보다 섬뜩한 계곡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고 계곡 바닥의 돌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쾅쾅 울리는 소리가 집을 흔들었기 때문에 사치코 등은 물이 차오르면 어떻게 하지, 하며 겁을 먹은 채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하얀 이슬이 사라지듯 죽어 가는 어머니, 너무나도 고요하고 잡념이 없는 그 얼굴을 보자 무서운 것도 다 잊고 한순간에 정화되는 감정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분명히 슬픔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 이를테면 개인적 관계를 떠나 음악적인 쾌감을 동반한 슬픔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 열린책들, 송태욱 옮김, 508~510쪽

 


반딧불이 잡는 장면은 위 구절처럼 따로 떼어와 읽어보면 그 맛이 살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 장면만 소개한다. 반딧불이 잡는 장면과 어머니의 임종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답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문학이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문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이렇게 ‘자연의 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그리는 것은 <겐지이야기>에서 곧잘 보였다. 참 아름답구나,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 


<세설>은 별다른 ‘큰’ 이야기가 없다. 오사카 몰락한 명문가 집안 네 자매 –쓰루코,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의 일상생활이 세세하게 그려질 뿐이다. 특히 셋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유키코의 혼담은 이뤄질 듯하다가도 파혼으로 끝나기가 일쑤다. 과연 유키코가 결혼을 하게 될지 궁금한 가운데 나머지 세 자매의 소소한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시절 일본 문화라든지 생활상이 놀랄 만큼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죽 읽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쩌면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이 삶도 솜씨 좋은 문학가의 손끝에서는 ‘아름다운 한편의 문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삶은 결국, 누군가의 삶이든 ‘문학적’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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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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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꽤 통속적인 내용으로 무척 흥미진진하다. 캐서린이라 불리는 여주인공이 있다. 그녀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뉴욕 상류층과 어울리며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다가온다. 파티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캐서린에게 엄청난 호감을 표현하더니 급기야 그녀에게 반했다며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남자, 모리스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하지만 캐서린은 돈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볼품없는 여자다.  

독자는 궁금하다. 모리스는 정말 캐서린을 사랑하는 것일까? 정말 그의 말대로 그녀의 평범한 매력 속에 숨어있는 진가를 발견했고, 반한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저, 돈이 필요해서, 그녀의 유산이 탐나서 접근하는 거겠지 등등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 초반에는 모리스가 정말 돈 때문에 캐서린에게 접근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캐서린은 좀 독특한 여주인공이다. 보통 소설 속 여주인공은 이른바 ‘여주인공적인 특질’-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든가, 외모가 좀 떨어진다면 그를 보충할만한 영민함 혹은 재치나 재능을 겸비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 스퀘어>의 캐서린은! 정말 그 무엇도 아니다.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건장한 체격! 그때문에 건강하다는 것! 정도? 이런 여주인공 같지 않은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이 이 작품을 독특하게 만든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캐서린의 ‘평범함’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소설의 여주인공에 대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좀 거북하지만, 식탐이 약간 있었다고 덧붙여야 하겠다. 내가 알기로 찬장에서 건포도를 훔쳐 먹은 적은 없었지만, 용돈을 크림 케이크 사먹는 데 탕진하곤 했다.’(16쪽) 이런 부분에서는 푸핫! 웃게 된다.

캐서린과 모리스 외에 한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캐서린의 아버지, 의사인 슬로퍼 씨다. 그는 인성과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의사로 뉴욕 상류층에서도 칭송받는 사람이다. 아내 또한 그에 걸맞게 재능과 미를 겸비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아름다운 아내는 캐서린을 낳은 지 1주일이 지나자 죽고 말았다. 외동딸인 캐서린이 예쁘고 똑똑한 아내의 재능을 좀 물려받았으면 좋았으련만 그 어느 것 하나 엄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늘 딸을 낮게 평가하던 슬로퍼 씨는 모리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캐서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아니 그 마음이 절대 순수하지 않으리라 믿고 둘의 교제를 반대하기 시작한다.

<워싱턴 스퀘어>는 캐서린과 모리스, 캐서린의 아버지, 그리고 또 한 사람, 로맨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캐서린의 고모 이 네 명의 등장인물이 이끌어간다. 캐서린을 묘사하는 문장에서 살펴볼 수 있듯 이 작품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 헨리 제임스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충분히 잘 활용한다. 적절한 개입이라고 해야 할까? 완급조절이 뛰어나다. 평소 나는 소설에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은 어쩐지 작품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칫 유치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런 편견을 완벽하게 깬다. 전지적 작가 시점도 잘만 활용하면 퍽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모리스에게 빠져들고 급기야 결혼을 감행하려는 캐서린, 그들에게 반대하는 아버지-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유산은 한 푼도 물려줄 수 없다는 아버지- 옆에서 로맨스를 구경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제대로 오지랖질 하는 고모- 캐서린과 모리스는 어떻게 될까?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결국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모리스도, 아버지 슬로퍼 씨도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캐서린을 판단했을 뿐이지, 진짜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잘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던 캐서린-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그런 캐서린을 잘 대변한 듯한데….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자신의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 대해서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잘난 아버지, 잘난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그녀, 앨리스 제임스가 캐서린의 모습에 살짝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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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 -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 유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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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 어허, 이건 사실 어쩌면 내가 잘하는 일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자신의 방에서 칩거하는 것을 ‘여행하는 법’이라 이름 붙인 것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18세기 사람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히키코모리의 원조(元祖)가 아닐까? 그런데 사실 그의 은둔은 처음에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금지된 결투를 벌인 죄로 42일 동안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집안에 갇히게 되니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방 안’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방을 그래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느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방에서 이제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그의 세계를 둘러싼 물건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읽었던 책이나, 들었던 음악, 벽에 걸린 온갖 회화들도 이제 그의 눈에는 새롭다. 그에 얽힌 지나간 추억을 불러와 곱씹으며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침대도 새롭고 의자도 새롭다. 그 안에서 철학을 하며 하인 조아네티나 애견 로진에 대한 전에 없던 사랑 혹은 잊고 지냈던 고마움을 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이 ‘내 방’ 여행에는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위험 또한 도사린다. 꽈당!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이토록 위험천만하다니! 그는 이렇게 온갖 발견과 추억과 위험(?)을 맞닥뜨리면서 이제껏 가지 못했던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다. 아무리 즐거운, 돌아오고 싶지 않은 여행이라도 돌아와야 한다. 그렇기에 ‘여행’이리라. 만일 돌아올 곳이, 돌아와야 할 이유 없이 계속 떠돈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되리라.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도 드디어 여행을 마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여행은 가택연금이 풀려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됨을 뜻한다. 그리고 그때가 오자 그는 오히려 구속을 느낀다.

상상력이 넘치는 매혹의 세계여, 그대는 자애로우신 그분께서 현실의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준 존재였다. 이제 그대를 떠날 시간이 된 것 같다.

오늘은 내 운명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내게 나의 자유를 돌려주는 날이다. 그들이 정말 내게서 그것을 빼앗기나 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자유를 박탈하고 내 앞에 항상 드넓게 펼쳐진 이 넓은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 것을 두고 순간이나마 좋아했다면 말이다. 그들은 내게 어떤 곳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그들은 내게 이 우주 전체를 남겨 놓았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이 내 뜻에 좌우되었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런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내 여행을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나를 방에 가두는 게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간직한 이 멋진 공간에서 말이지? (183~184)

그가 가택연금이 풀려나 사회로, 일상으로 돌아감은 곧 상상의 세계가 끝남을 뜻한다. 발견의 세계 또한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두 발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그저 ‘기계적인 돌아다님’에 그치리라. 씻지도 않고 잠옷 바람으로 널브러져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격식을 차리고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와 똑같지 않은가!

42일 동안의 가택연금 속에서 이뤄진 ‘내 방 여행’은 이렇게 우리에게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여행은 그저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제아무리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발견이나 상상을 할 수 없다면 그 여행은 떠나지 않은 일상의 연장과 마찬가지이다. 반면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등등 수고를 들여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그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발견과 상상을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행’이 된다. 때문에 ‘내 방’ ‘내 집’ ‘내가 사는 동네 골목길’ ‘이 도시’ 등등도 얼마든지 여행 장소가 될 수 있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상상이며 발견’인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고 그저 떠났다가 되돌아옴을 반복하면서,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증거 또는 흔적(사진 찍기, 여행 가방에 나라별 입국 스티커 붙이기, 여권에 온갖 나라 도장 찍기 등등)을 남기기에 급급해하면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공허한 만족감만을 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자, 이제 당신도 새로운 의미의 진정한 여행을 떠나보지 않겠는가? 오늘 지금 바로, '내 방'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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