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 고전문학인 <겐지 이야기>를 읽었다.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문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달까. 일본 고대소설로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를 현대 일본어로 옮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여성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가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겐지 이야기>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어로 옮긴 것을 김난주가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일본어라고 해도
고어를 헌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분명 세세한 차이가 있으리라. 특히 한 사람은 여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남성이니 조금 더 그
차이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읽은 버전은 ‘세토우치 자쿠초’가 옮긴 것을 번역한 본이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겐지
이야기>는 또 어떤 다른 맛과 멋을 보여줄지 좀 궁금하기는 하다.
내가 <겐지 이야기>를 언급하는
까닭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고 보니 분명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 뒤에 수록된 저자 연보를 읽어보니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 뒤에 <세설>을 썼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으리라. 단순히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학을 비롯해서 일본문학의 여러 부분들-특히 연애관이랄까, 에로티시즘-이 <겐지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겐지 이야기>는 시대의 미남자 ‘겐지’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록 그 이야기가 보여주는 남녀관계라든가, 연애관 등에 모두 동의할 수 없고 때로는 불쾌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로 찬사를 보낼만한 점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자연물’에 기쁨, 슬픔, 사랑, 고통, 노여움 등 인간의 성정을 빗대어
표현하는 부분들이다. 그런 장면들은 정말로 아름다워서 아, 하는 찬탄을 하게 된다.
북쪽 나라로 돌아가는 기러기가 울어대듯
어젯밤에는 울면서
그곳에서 돌아왔구나
어차피 잠깐 살다 가는 세상
어디에나 영원히 살 곳은 없으니.
-<겐지 이야기>, 7권,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토우치 자쿠초 현대일본어로 옮김, 김난주 옮김, 한길사
<세설>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곧잘 등장한다. 내가 <세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올 뻔한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반딧불을 잡는 장면과 사치코가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이 두 장면은 자연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 자연물과 빗대어 그 순간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읽는 순간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닌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리라는 말이 왜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1917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 생각을 하면 사치코는
자신이 올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나이가 되었고 큰집의 쓰루코는 벌써 그 때의 어머니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는 지금 쓰루코나 사치코보다 훨씬 아름답고 청아한 분이었다. 하긴 돌아가셨을 때의 주변
상황이나 병 등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열다섯 소녀였던 사치코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은 실제 이상으로 단아하게 비쳤을 것이다.
폐병 환자라도 병세가 심해지면 추하게 마르고 안색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머니는 폐병이었으면서도 임종 때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안색도 하얗고 투명해졌을 뿐 검은빛을 띠지 않았고 몸도 가냘프게 마르기는 했지만 손끝과 발끝까지 윤기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병이 든 것은 다에코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하마데라, 그다음에는 스마에서 요양했다.
마지막에는 바닷가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해서 미노에 있는 조그만 집을 빌려 그곳으로 옮겨 갔다. 어머니의 말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만나러 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되도록 짧은 시간만 머무르다 돌아와야 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와서도 해변의 쓸쓸한
파도소리나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언제까지고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상화해서 생각했고 그 영상이 사모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미노로 옮기고 나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으므로
이전보다 자주 문병하러 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임종하던 날은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 와 사치코 등이 달려갔고 얼마 안
있어 곧 숨을 거두었다. 며칠 전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가을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병실 툇마루 유리창에 뿌옇게 빗물을
뿌리던 날이었다. 장지문 밖에는 아담한 뜰이 있었고 거기에서 빗물이 완만하게 골짜기로 흘러내렸는데, 뜰에서 벼랑에 걸쳐 피어 있는
싸리꽃은 이미 떨어진 채 세차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골짜기에 물이 불어 산사태라도 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던 아침의 일이었다. 빗소리보다 섬뜩한 계곡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고 계곡 바닥의 돌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쾅쾅
울리는 소리가 집을 흔들었기 때문에 사치코 등은 물이 차오르면 어떻게 하지, 하며 겁을 먹은 채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하얀 이슬이 사라지듯 죽어 가는 어머니, 너무나도 고요하고 잡념이 없는 그 얼굴을 보자 무서운 것도 다 잊고 한순간에
정화되는 감정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분명히 슬픔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 이를테면 개인적
관계를 떠나 음악적인 쾌감을 동반한 슬픔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 열린책들, 송태욱 옮김, 508~510쪽
반딧불이 잡는 장면은 위 구절처럼 따로 떼어와 읽어보면 그 맛이 살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 장면만 소개한다.
반딧불이 잡는 장면과 어머니의 임종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답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문학이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문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이렇게 ‘자연의 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그리는 것은 <겐지이야기>에서 곧잘
보였다. 참 아름답구나,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
<세설>은 별다른 ‘큰’ 이야기가 없다. 오사카 몰락한
명문가 집안 네 자매 –쓰루코,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의 일상생활이 세세하게 그려질 뿐이다. 특히 셋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유키코의 혼담은 이뤄질 듯하다가도 파혼으로 끝나기가 일쑤다. 과연 유키코가 결혼을 하게 될지 궁금한
가운데 나머지 세 자매의 소소한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시절 일본 문화라든지 생활상이 놀랄 만큼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죽 읽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쩌면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이 삶도 솜씨 좋은 문학가의 손끝에서는 ‘아름다운 한편의 문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삶은 결국, 누군가의 삶이든 ‘문학적’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