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읽을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2월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거기에 마거릿 드래블의 <찬란한 길>이 한몫했다. 장장 600쪽이 넘는 분량. 대산세계문학총서 이 시리즈는 알다시피 글자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자간도 촘촘하다. 그런데다가 600쪽. 그래서 읽는 데 오래 걸렸느냐 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복잡하지도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세 여성의 삶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잘 안 읽히는가? 한마디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배경에 그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한해가 끝날 즈음, 희망찬(?) 1980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 장면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저택에서 파티를 주최한 ‘리즈’는 정신과 의사로 성공했으며, 자신의 부와 성공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남편 ‘찰스’ 또한 남부럽지 않은 지위와 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시절은 무려 21년. 그들의 지인들 중 그렇게 길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커플은 없다. 그들은 ‘전쟁과 유혈 사태. 배신’을 지나 이제 이 넓은 집에서 평화롭게 만나 각자의 방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주말에는 마멀레이드를 앞에 놓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것, ‘애정’이 빠져 있다. 찰스는 몇 달 뒤 새 직장 때문에 뉴욕으로 갈 것이며 그들은 절대로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파티에 초대된 그 누구도 리즈가 ‘여자답게 아내답게’, 자신의 삶을 뿌리 뽑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즈는 지금 여기에 머물며 커리어를 좇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자신만의 정신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찰스와 리즈 헤들린드 부부는 남들에게 관습을 깨고 선구자가 된 능력 있는 커플로 비친다. 그런데 정말 그 속내도 그러할까?

파티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리즈의 오랜 친구들, 케임브리지 동창인 ‘알릭스’와 ‘에스터’도 있다. 오랜 세월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지내온 그들. ‘제인 오스틴 시대’였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1952년 케임브리지에서 만났다. 알릭스는 영국 문학을, 리즈는 의학을 전공할 목적으로 자연과학을, 에스터는 현대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 시절에 지방 출신의 사회 지위가 낮은, 그러나 똑똑한 젊은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중 하나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 세 여성은 이들 세대 중에서 일류 중 일류에 속했다. 명문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명문 학교들에서 탐내며 끌어오고 싶어 했던 재원들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특별한 지위는 없지만 특권을 가진다. 젊음, 지성, 미, 그리고 때때로 부. 그들이 사는 시골 마을의 공주나 다름없다.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공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젊었고, 지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 모범적이어야 했다. 그들에겐 분명 기회가 주어졌고, 선택지가 있었으며 열여덟 살에 세상이 그들 앞에 열려 다양한 것을 제시했고, 복지국가와 장학금, 성평등이라는 멋진 신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엘리트, 선택 받은 자들, 위대한 사회적 꿈을 성취하고, 화환을 목에 건 이들이었다. 모험과 가능성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몇 십 년이 지나 이제 마흔을 넘어선 이들, 1980년대를 앞둔 이 세 여성의 현재 모습은 엘리트로서 꿈을 성취하고, 선택 받은 자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나마 정신과 의사라는 확고한 지위 아래, 대저택에 살면서 이런 파티를 열고 있는 리즈가 그 오래 전 꿈꾸던 멋진 신세계에 가장 가까운 인생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 마저도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리즈는 찬란한 19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찰스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이 세 여성의 삶은 어디서부터 그 꿈에서 멀어졌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기만의 힘으로 그 계급을 벗어난 리즈, 좌파 지식인 부모 때문에 남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알릭스, 난민 출신 유대인이자 성소수자인 에스터. 애초부터 이들은 영국의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여학생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입학했고, 그러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왜 인생은 순조롭지 못했을까? 에스터를 제외하고 리즈와 알릭스는 졸업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결혼이라는 굴레 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여성이라는 한계에선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알릭스에게 결혼은 가장 치명적이다. 졸업 초기에 커리어를 쌓지 않고 전업주부가 되었던 알릭스의 선택은 중년까지도 풍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경제생활로 이어진다. 직업적 성취와 명성을 모두 얻은 리즈마저도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신만을 신경 써주는 ‘참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결혼하지 않은 에스터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만 충만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게다가 ‘찰스’보다 지적으로 뛰어난데도 작은 아파트에 살며 가끔씩 강연, 기고, 수업을 통해 푼돈을 버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선 알릭스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바스찬을 배신했다.

우린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릴 때 결혼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왜 또 하려고 하니? 알릭스가 물었다. 아 이번은 달라, 하고 리즈는 말했다. 스물다섯 살의 리즈는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알릭스는 “난 다시는 결혼 안 할 거야.”하고 말했다. 리즈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라고 했다. 알릭스는 “강의하잖아, 시험지 채점도 있고. 근근이 살아갈 수 있어.”하고 말했다. 리즈는 찰스 헤들린드와 함께 부(富)의 세계로 입성하고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결혼’이라는 개인의 선택, 그러나 사회적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굴절된 삶을 살게 된 이들 앞에 1980년대는 또 한 번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다. 희망의 시대가 결코 아니다. 1980년대와 함께 대처정권이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알릭스와 에스터의 일자리는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사람이 지닌 힘을 믿으면서 교화 시설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범죄자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는 알릭스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휘청거리게 되고, 주류에서 벗어난 재야 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에스터도 거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알릭스의 주변 인물들, 사회주의자 ‘브라이언’,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과도 같은 리즈의 동생 ‘셜리’ 등등에게 80년대는 더 가혹하다. 심지어 거침없을 것만 같았던 찰스에게도 대처주의가 남기는 상흔은 깊기만 하다. 대처리즘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에 있는 인물인 알릭스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운 삶, 사람들을 위한 삶, 두려움이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이제 없다. 두려움이 자라고, 번영하고, 번식하고, 피어나고, 타오른다. 나는 패배했다.’

이렇게 <찬란한 길>은 중산층 지식인의 눈으로 대처의 집권 이후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기록하면서 그 시대의 결코 풍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풍경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너무나도 상세히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보고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선뜻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난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이자, ‘마거릿 드래블’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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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2-2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그러면 또 제가 장바구니에 넣어야지요. 인용해주신 문장이 완전 제타입이라서요.

잠자냥 2020-02-2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화자가 ‘찰스‘나 ‘브라이언‘ 같은 남자들 이야기하다가 이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일단 이쯤에서 접고... 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해요. ㅋㅋㅋㅋ) 저 세 여성 말고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삶이 또 너무나도 와닿는... ㅠ_ㅠ 그러나!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유형의 책은 아닙니다! 참고하세욧. ㅎㅎ

Falstaff 2020-02-2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두었습니다. 4월 쯤에 읽을 거 같은데 별 다섯 개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5:12   좋아요 0 | URL
80년대 대처주의를 혹독하게 겪은 영국인이라면 정말 극공감하면서 읽을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이 작가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있더라고요? <붉은 왕세자빈>이라고. 다 읽고 나니, 이 책도 궁금해지더라고요.

Falstaff 2021-06-09 08:46   좋아요 0 | URL
윽.... 근데 이 서평 올리신 날짜가 2월 25일.
인간의 임신기간이 열 달.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2월 25일 더하기 열달은 성탄절.

그러면 2월 25일은, 우리는 찬양합니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 이름하여, 성임절.
우연히 이 날이 ㅋㅋㅋㅋ 폴스타프 생일. ㅋㅋㅋㅋㅋㅋ 천생이 복받고 나왔습지요!!!!

이 책 왜 안 팔리는 거예요. 좋기만 하던데. 지금 살 거 읎나, 싶어서 서핑 중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6-08 23:1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이게 뭐예요. ㅋㅋㅋㅋ 옛날 글에 생일 광고!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또 책을 사시다니! ㅋㅋ
 
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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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무렵, 어느 공터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 시절 나 또한 <진주>의 주인공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자전거 타기에는 무언가 엄청난 기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 아빠는 자전거를 뒤에서 붙잡아 주다가 나 몰래 놓으면서 페달을 계속 밟으라고, 다른 데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나는 드디어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게 되었다. “밟아! 계속 밟아! 앞을 봐!” 아빠가 그렇게 외치던 소리는 그 후로도 가끔 자전거를 타노라면 귓가에 울린다.

<진주>의 첫 문장은 나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버지와 긴 시절 불화를 겪었고, 이제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남남과도 같은 사이가 되었지만, 아주 드물게도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간혹 있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그날, 그 공터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기억만큼은 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로,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두려움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운동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누구에게도 넘어졌다 놀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른 아침 시간이 필요합니다.”라는 <진주>의 첫 문장은 최근 읽은 그 어떤 소설의 문장보다 마음을 울린다.

자전거는 참 이상하다. 처음 배울 때는 앞만 보고, 쉼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지만,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게 된 뒤에는 페달을 밟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절로 터득하게 되고, 때로는 앞을 보지 않고도, 아니 앞을 보면서도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물론 뒤를 보는 일만큼은 아무리 자전거에 익숙해지더라도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진주>의 화자 ‘나’는 열두 살 무렵의 나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또한 내 아버지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나’의 아버지는 ‘그 때문에 네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거듭 큰 목소리로 말한다.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의심을 살 수 있다’며 아버지는 돌아보지 말라고,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정작 자유로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을까? 딸에게 뒤를 돌아보면 절대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앞만 보라던 아버지야말로 뒤를, 주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 세계를 너무나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영영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왜 아버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줄 알면서도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그런 어른이 되었을까? 아버지는 자기만이 성공하여 사는 인생보다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는 인생을 살았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몸을 던졌기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겨우 세상에 나와도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동안 많은 계절이 지나간다. 그의 친구들은 유학을 떠나 학계에 자리 잡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등등 모두가 세상에서 자기 자리 하나쯤은 갖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전과가 있기에 일반 회사에는 갈 수 없다. 친구가 주선한 회사에 겨우 가더라도 아버지는 임금 체불, 부당 해고 등 작은 부패를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묻고 따지다가 친구도 잃고 일자리도 잃는다. 이런 삶이 반복된다. ‘함께 투쟁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졸업장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회사나 건물이 있으며 누군가의 가슴에는 의원 배지가 달려 있다.’ 모두가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간다.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기에 ‘진주’에서 옥살이를 했던 아버지의 ‘딸’의 시선으로 그 오랜 세월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형식이 매우 독특해서 때로는 시를 읽는 것 같다가, 르포 기사를 읽는 것도 같고, 어느 페이지에는 사진과 그림이 실려 있기도 하며, 또 때로는 신문 기사가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한다. 어느 구절은 딸,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 그 자신의 어린 시절 일기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부재했던 아이. 언제나 없었지만, 그래서 있었던 아버지. 딸 곁에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책장 한쪽에 놓여 있던 가족사진 속에, 냉장고 위에 쌓여 있던 <세계철학사>와 <전환시대의 논리> 속에, 장롱 서랍 속 곱게 포개져 있던 새것 같은 양말들과 속옷들, 신발장에 넣어둔 낡은 검정 구두 한 켤레로. 수많은 편지, 수많은 비밀문서 속에 언제든 찢기고 폐기되고 소각되어 사라질 수 있는 익명의 문장으로’(173쪽) 존재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있어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 지난한 세월,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 가까이의 세월을 좇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왜, 지금일까?

한때 후일담 문학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문학들.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 문학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난 2020년에 <진주>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딸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는 그 생각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려야만 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 지난 이야기잖아 너무 낡은 이야기는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왜 이제야?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바로 ‘지금’이기 때문에, 그 어린 딸이 다 자란 성인이 된 지금에야, 80년대도, 90년대도 아닌 오늘에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들 모두가 ‘딸’의 ‘아버지들’이었기에 이제야 말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딸이 말하기에, 딸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닌, 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가족의 고생과 어려움을 더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딸의 일기는 그 삶의 어려움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엄마가 거의 모든 생계를 꾸려나간다.’ 엄마와 딸의 고통스러운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들은 딸에게 아버지가 ‘참 훌륭한 일을 하신다.’ 말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딸과 엄마의 고생은 그 속에서 파묻히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 싫고, 경찰이 밉고, 경찰의 옷을 입지 않은 경찰 아닌 척하는 경찰이 미운 딸. 남편이 없는 동안 생계를 도맡았지만 그때도, 그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 지속적인 월세 지출로 인해 거처를 옮겨야 할지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 그러고도 ‘너는 하루라도 빨리 외국어를 익혀 다른 나라로 떠나라’는 이야기를 듣는 삶. ‘너희 어머니 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간을 참고 견디고 남한테 손 한 번 안 벌리고 훌륭하게 살아오셨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나라가 아니잖니.’(162쪽)라는 말을 듣고 거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삶.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고작 오천만원. 그 대상도 직접 복역한 당사자에 한할 뿐. 오랜 세월 그 복역을 인내한 아내와 딸은 보상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라도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 그 ‘언젠가는, 언젠가는’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독재자는 죽었지만 여전히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를 닮아 잘못된 관행과 잘못된 일들에 분노하지만, 아버지처럼 ‘행동’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아빠처럼 분노하다가는 평생 월세살이를 전전하고야 말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누군가를 돕다가는 평생 새카맣게 어린 상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날만 올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하다가는 평생 연금은커녕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같은 고단한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평범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딸은 오래 전 아버지의 가르침,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줄 때의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눈감아야 하고 입 다물어야 하고 고개를 처박고 견뎌야 하고 자신이 견딘다는 사실마저 깨끗하게 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갓 입사한 회사의 늙은 경비와 청소하는 여자를 잊어야’ 한다. 그들이 ‘그 건물의 가장 더럽고 습한 지하방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부조리함을 잊고 아침마다 어제를 잊은 듯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모두가 ‘완전한 각자’라고 느낀다. ‘돈을 번다는 것,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 견디는 일임을 느낀다.’(181쪽)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만 평범하게 살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가 ‘돌아보지 말라고, 앞만 보라고’ 크게 소리친 까닭은 어쩌면 딸에게 이 고단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 정말 인간다운 삶일까. 나는 왠지 이렇게 앞만 보고 페달을 밟는 삶, 그런 ‘완전한 각자’의 인생이 서글퍼진다. 그렇게 다들 ‘완전한 각자’의 삶을 좇기 때문에 독재자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면서 당신은 공산주의자이고, 당신은 빨갱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자전거를 잘 타는 딸, 앞만 보며 페달을 밟는 딸이 성인이 된 지금보다 오히려 ‘열 살 무렵의 내가 민주주의의 사명과 신념을 더 잘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딸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처음 비행기를 탔고, 그 경험은 처음 하늘을 날아본 기억이 된다. 그때 딸은 신처럼 세상을 바라보았노라고 회상한다. 이제 다시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딸, 그 딸은 아마 그 어린 시절처럼  ‘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진주로 가는 비행기는 어쩌면 그래서 ‘완전한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리라.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게 된 뒤의 삶, 그러니까 속도를 줄이고, 주변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볼 줄 아는 삶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자동차 여행과 달리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골목골목까지 돌아보며 주변인의 시선을 갖출 수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 따르면 한 프랑스 철학자는 ‘오늘날 이 세계에서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시야가 반딧불을 찾아낼 만큼 충분히 어둡지 못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라도 망설임 없이, 더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가’(91쪽)라고 말한다. 진주행 비행기에 오른 딸은 아마도 그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마침내 잃어버린 반딧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주>를 읽는 이들도 조금은 그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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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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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리는 세계는 분명히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몇 백 년 뒤에나 존재할 수 있을까 말까한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이제 인류가 꿈꿔온 우주 탐사도 가능해졌고,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완벽한 인간을 만들 수도 있으며, 행성에서 행성 간 이동도 자유롭다. 그런데다가 저 먼 우주에 지구인과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까 하는 인류의 질문도 응답을 받아, 외계 생명체를 만나는 지구인도 있으며,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류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사랑하는,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모두가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아주 먼 미래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아닌, 지금 내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술은 매우 진보했는데,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틀림없이 아주 먼 미래이다. 그런 시대에 슬렌포니아라는 제3행성에 가기 위해 ‘안나’라는 한 노인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그래서 철거를 앞둔 어느 우주정류장에서 혼자 우주선을 기다린다. 한때 과학자였던 이 노인은 어쩌다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일까?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보낸 그 행성으로 그녀 또한 곧 따라갈 계획이었지만, 아주 잠깐의 차이로 함께 떠나지 못한다. 그 사이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게 되고,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지기에 안나는 가족과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은 제법 되지만 우주 연방은 그들을 외면한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이므로 당연한 조치이다. 제아무리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졌어도 인간은 여전히 빛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군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에 떠밀려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을 고통스럽게 감내해야만 한다. 안나는 말한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1~182쪽)하고. 이 작품은 오직 경제적 이윤만을 으뜸으로 여기면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갈수록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이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관내분실>에서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마인드 접속기를 통해 죽은 사람과 재회할 수 있다. 그런 미래에서 그리는 세계 또한 지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민은 어느 날 엄마의 데이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접속할 수 없지만 엄마의 마인드 자체는 데이터베이스 어딘가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망과 실종이 다른 것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이지만 도서관 어디에서 실종된 상태이다. 엄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지민은 엄마의 상상하지 못한 과거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었던 엄마, 늘 우울한 모습으로 자식에게 상처만 준 그 엄마도 한때는 일하고 자기만의 꿈을 꾸던 여자였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함께 일을 놓아버리고 결국 집안에만 갇혀버리는 지민 엄마의 모습은 지금 이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왜소한 체격의 동양인 여성, 임신과 출산을 겪은 비혼의 중년 여성 최재경의 삶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더 현실과 중첩된다. 신체 조건에서 월등한 백인남성들을 제치고 나이도 많고 체격도 볼품없는 동양인 여성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최재경의 자격에 의문을 품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녀의 능력과 노력은 깡그리 무시당한 채 오직 그녀가 선발된 이유를 ‘인종과 성별 쿼터제’ 덕분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재경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 언론 및 대중들이 비난하는 행태는 또 어떤가.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우주 탐사가 가능해진 그 먼 미래에도 인간의 성찰이나 깨달음, 각성이 없다면 인간의 지성과 의식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미래에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별다른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주를 탐사하느니 자유로이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가 되고자 했던 최재경의 선택에는 깊은 공감과 함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우주로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성차별, 인종차별이 존재하면서 한 개인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지구- 그렇다면 인간 배아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되어 어떤 결점도 없이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들만이 모여 사는 그런 세계는  행복할까? 서로의 결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들만 모여 사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회는 진짜 유토피아일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 때문에 지구인들에게 마음껏 멸시당하고 혐오 받았던 이민자의 딸 ‘릴리’. 릴리는 인간 배아를 디자인해 선량하고 아름다운 인간들만 모여 사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구로 순례를 떠난 뒤에, 이상하게도 고통의 행성 지구에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마을로 돌아오더라도 몇몇 이들은 지구를 그리워한다. 지속적으로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그 지구에 과연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와서도 지구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감정의 물성>에서 사람들이 ‘우울’이나 ‘분노’,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돈을 주고 사서 소유하려고 하는 것처럼 순례자들도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구에 남기를 선택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만난 외계 생명체 ‘루이’는 친절함, 배려, 상냥함 등등 인간의 긍정적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갖고 있다. 루이가 속한 무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는 조금 특이해서 ‘색채 언어’이다. 루이가 ‘다르다’라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들 사이의 차이점을 지구인 희진은 알 수 없다. 수많은 파란색, 수많은 보라색, 수많은 초록색과 노란색이 있다. 루이는 그 색상들을 모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 어느 것도 같지 않다. 희진이 외계 생명체인 루이를 연구하듯, 루이 또한 자신에게는 외계 생명체인 희진을 연구한다. 희진을 연구한 루이의 종이 위의 색채들은 마치 누군가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희진은 그 가운데 한 문장을 겨우 해석하게 된다. 자신을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말하는 루이. 그들의 색채 언어에 비하면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제한적이다. 해석의 다양성이나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루이가 희진이라는 한 사람을 연구하고 기록한 종이는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사람은 저마다 모두가 그만큼의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오롯이 표현할 수 없는 다양성, 개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모두가 존중할 줄 아는 세계라면, 결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세상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루이와 같은 외계 생명체는 아주 수만 년 전,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인류를 찾아와 우리 뇌에 자리 잡으며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하면서 인간을 윤리적 주체가 되도록 가르쳐왔을지도 모른다(<공생가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외계 생명체가 꼭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라고만 볼 수 있을까? 내가 아닌 타자,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어쩌면 꺼려하고 혐오하기도 하는 대상. 그런 존재 또한 외계 생명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를 ‘루이’의 색채 언어처럼 무수히 많은 다양성 표현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함으로써 인간에게도 더 열린 세계가 가능해지고, 거기에서 잃어버린 윤리 의식까지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넓고도 넓은 우주에서 외로움의 총합은 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고, 김초엽의 작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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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2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읍. 급관심!
잠자냥님 서재 들어오면 잔고 떨어지는 소리가 막 들려요. ^^;;

잠자냥 2020-01-28 14: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사실은 별 관심 없어서 이제까지 미루다가 읽었는데요.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알라딘에서 폴스타프 님처럼 잔고 떨어지게 만드는 분도 없을 텐데요? ㅎㅎ

김은정 2021-07-18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편과 단편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 리뷰를 쓰신 점이 색다르면서도 좋았습니다 잠자냥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네요.

잠자냥 2021-07-18 21:20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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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즈음, 푸시킨의 시를 처음 접하고 그때 이후로 나는 그를 시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이 구절은 어릴 때부터 잘도 외우고는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인용하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이 구절은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와 다투거나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해서 마음 상한 친구의 마음을 다독여줄 때 특히 유용했다. 열대여섯 살 딱 그 정도 나이에서는 ‘삶이 그대를 속이’는 일들이 대부분 그런 일들이었다.

살아갈수록, 그리하여 이 나이에 이르러 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구절에 깃든 진실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임을 깨닫고 푸시킨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진실의 깊이를 어느 정도 헤아릴 즈음 나는, 푸시킨을 소설가로서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래 전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읽고 얼마나 푸시킨앓이를 했던가. 다만 그 책은, 너무나 오래전에 번역한 책이었는지, 푸시킨 작품이 지닌 명성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번역본이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읽는 내내 푸시킨은 시인인데, 이렇게 투박한 문장을 썼을 리가 없어! 자꾸만 의심했다. 그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인데, 독자 리뷰를 읽어 보면 나만 번역에 불만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태에서 이 《눈보라》의 등장은, 《벨킨 이야기》를 이미 읽었음에도 틀림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푸시킨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표제작인 <눈보라>부터 다시 읽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이 어긋난 사랑에 안타까워하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그 폭설을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다시 읽은 <눈보라>는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보다는 다른 어떤 것, 인생의 불가해함, 그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마음이 서늘해져온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마리야’는 가난한 장교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지고 부모의 반대에도 그와 사랑의 도피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의 도피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데, 축복을 위해 내리는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치는 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 거린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진다. 마리야와 블라디미르 두 사람의 발길을 붙잡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른다. 결국 둘은 함께 떠나지 못하고 삶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간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절망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하며 앓아눕기도 하지만,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이 그 아픔도 흐려지면서 살아나간다. 인생이 그러하므로. 그리고 마리야 앞에 새로운 사람인 ‘부르민’이 나타나고 삶이 그러하듯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마리야는 부르민과는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눈보라’로 잃어버린 블라디미르 대신, 이번에는 진짜 자기 사람을 맞이하게 될까?

살다 보면 ‘눈보라’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날 무렵에는 그 계획 가운데 뜻대로 이룬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한 해 한 해가 쌓여 인생을 이룬다. 그러기에 늘그막에 다다른 많은 이들이 체념의 정서를 안고 ‘삶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눈보라’가 없었다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을 이루었을까? 지금보다 어릴 때 나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보라’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들의 사랑은 어느 순간 폭설로 무너지는 집처럼 주저앉고 말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눈에 반하고 불장난하듯이 서로에게 빠지는 대부분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듯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의 사랑은 그다지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의 도피에 성공해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언제고 그들 인생에서 또 다른 ‘눈보라’가 불어 닥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마리야가 다시 만난 부르민과도 마찬가지 이리라. 이처럼 푸시킨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눈보라’ 같은 사건을 통해 삶의 불가해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인생의 수많은 ‘눈보라’들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이 일으키는 것임을 통찰한다.

이런 푸시킨의 시선은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작품들, <한 발의 총성>,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한 발의 총성>에서는 ‘따귀 한 대’가 눈보라이다. 그전까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실비오’는 따귀 한 대를 맞고서 인생이 뒤틀린다. 평생 복수를 꿈꾸며 세월을 헛되이 쓰며 음울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 따귀 한 대는 그 자신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있던 실비오 앞에 나타난 부유한 명문 귀족. 그는 젊음, 총기, 잘생긴 얼굴, 유쾌함, 유명세, 돈 등등 모든 것을 갖춘 진정한 행운아였고, 그의 등장으로 실비오의 일등 자리는 흔들린다. 그 질투와 열등감이 결국 ‘따귀 한 대’를 불러오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니 실비오에게 그 따귀 한 대는 마리야와 블라디미르를 갈라놓은 눈보라와도 같다.

<장의사>의 ‘아드리얀’도 자신의 가벼운, 그러나 악의가 잔뜩 담긴 심술궂은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 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현실화되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아드리얀’은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농담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역참지기>에서는 귀족 장교 민스키의 등장과 함께 ‘눈보라’가 일어난다. 역참지기는 예배 보러 가는 딸 두냐에게 “겁낼 게 뭐가 있니? 나리님이 늑대도 아니고 널 잡아먹기야 하겠니, 예배당까지 타고 가거라” 말하며 민스키와 딸이 함께 가도록 종용한다. 불안한 듯 망설이던 두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집을 나선다. 그런데 역참지기는 자신의 이 짧은 생각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는 예상치 못한다. 결국 일은 벌어지고, 이 가엾은 역참지기는 ‘자기가 어쩌자고 두냐를 경기병과 함께 타고 가게 했는지, 어쩌다 눈이 멀어 사람도 제대로 못 알아봤는지’ 한탄하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물론 삶에 일어나는 온갖 ‘눈보라’가 늘 불행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유쾌한 로맨스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눈보라’와 같은 사건은 ‘겁 많은 꼬리 잘린 암말’, 정확히는 사냥터에 갑자기 나타난 ‘토끼 한 마리’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반목하던 ‘이바노비치’와 ‘베레스토프’ 두 집안은 화해하게 되지 않는가.

‘삶이 그대를 속이는’,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해한, 뜻밖의 일들은 이렇게 인생 곳곳에서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그러나 그 면면을 잘 들여다보면 자연이 일으킨 재난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인간 그 자신에게서 ‘눈보라’가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비오’에게는 그 자신의 질투와 열등감이 눈보라를 일으킨 것이며, 역참지기는 손님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딸 두냐를 앞세워(정확히는 딸의 미모와 여성성을 이용해)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민스키 같은 사람 앞에 두냐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 것이다. 만일 손님들이 제아무리 불만을 터뜨리더라도 그때마다 두냐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앞서 말했듯이 <장의사>의 ‘아드리얀’은 그 자신의 심술궂음, 악의적인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의 ‘눈보라’는 스스로 불러일으켰음이 더 뚜렷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눈보라’들은 처음에는 삶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지만 그 끝에는 어떤 의미로든 깨달음을 얻거나 긍정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불행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비오는 도덕적인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그 자신의 깨달음으로 인해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며, 늘 죽음을 다루면서도 삶을 성찰할 줄 몰랐던 장의사 아드리얀은 이제 진정으로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역참지기의 딸 ‘두냐’의 인생도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눈보라>에는 하나 같이 크고 작은 뜻밖의 일로 인생이 그 전과 크게 달라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난한 이도, 부유한 이도 ‘삶의 눈보라’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대부분 그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또한 그에게 달려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은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도 유효하다. 푸시킨의 위대함은 이 짧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영롱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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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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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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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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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쇼팽의 <각성>에서 다루는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결혼한 상류층 28세의 젊은 여성 ‘에드나’가 여름휴가로 머문 그랜드 아일의 한 별장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눈 뜬다는 설정만으로는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등 이미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고 있다. 사랑 없는,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하던 유부녀 주인공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와 정신적으로 만족하는 사랑을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 자기의 욕망에 깨달음 같은 것을 얻지만 결국 파멸로 치닫는 그런 이야기. 이른바 여성의 ‘부도덕한 일탈’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하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해도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플로베르나 톨스토이와 달리 케이트 쇼팽은 여성이기에 <보바리 부인>의 ‘엠마’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도 전혀 다른 인물인 ‘에드나’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에드나와 그녀가 사랑하는 ‘로베르’와의 관계도 ‘안나-브론스키’, ‘엠마-로돌프’ 또는 ‘엠마-레옹’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아도 사뭇 다르다. 에드나는 여름 별장에서 만난 로베르에게 호감과 사랑을 느끼지만 그와의 사랑은 성적인 결합이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에드나는 로베르에게 사랑을 느낀 뒤 다른 남자와 섹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조차 ‘안나’ 또는 ‘엠마’처럼 자신과 섹스한 남자에게 끌려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쥐락펴락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흔히 말하는 ‘밀당’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각성’ 뒤 새롭게 태어나, 그 어떤 남자에게도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에드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흠모하는 ‘아로뱅’과의 밀회는 그녀에게 그저 하나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마저도 내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아로뱅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로베르처럼 마음으로 좋아하는 남자도 아니다. 그래서 에드나는 “오늘은 아로뱅,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되겠지. 내겐 아무 상관없어.”(241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에드나는 여느 여성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가정적이며 모성애가 넘치고 여성스러운 매력의 화신과도 같은 ‘아델 라티뇰’과 자주 만나지만 진실로 가까워질 수 없다. 라티뇰 부인에 비해 에드나는 가정적인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다. 특히 모성애가 그러해서, 에드나는 모성애가 강하지 않다. ‘진짜 현실이든 상상이든 자기네 귀한 자식이 행여 조금이라도 다칠라치면 커다란 모성애라는 날개를 퍼덕’이고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걸 신성한 특권으로’ 여기며 이런 역할에 만족해하는 여성들과 거리가 아주 멀다. 아들들을 사랑하나, ‘그 사랑에는 뭔가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구석’이 있어서 가끔 두 아들을 뜨겁게 품에 안지만, 때로는 아이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도 어쩌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그다지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부재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성애의 책임에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는 측면’(42쪽)도 있는 것이다.

라티뇰 부인과 거리감이 있다고 해서 독립적이고 당당하지만 어딘가 삐딱해 세상과 불화하는 피아니스트 ‘라이즈’ 양과도 완벽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에드나는 라이즈에게는 조금 마음을 여는데, 아마도 라이즈가 에드나의 독립적인 면을 비롯해 뭇 여성들과 다른 면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즈는 에드나에게 그녀의 날개가 얼마나 튼튼한지 보겠다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174쪽)

<각성>에서 에드나가 깨어나기 시작한 계기, 즉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기 시작한 계기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로베르와의 사랑으로 인해 에드나가 이런 각성의 계기를 얻었다고 보는데, 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해석이 조금 못마땅하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여자가 예전의 권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자아를 깨닫고, 자기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가 꼭 남자여야 할까? 그러고 보니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떠오른다. 이 작품들은 남자 작가가 썼기에, 남자를 만나 여성이 변화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설정에 익숙해진 많은 비평가들이 <각성>의 에드나 또한 로베르와의 사랑을 통해 새롭게 ‘각성’했다고 너무도 안일하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작품을 잘 살펴보면 에드나가 첫 번째로 ‘각성’하는 계기, 즉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힘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는 계기는 ‘바다 수영’임을 알 수 있다. 수영을 할 줄 몰랐던 그녀는 여름휴가 동안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방법을 익히고 처음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저 멀리까지 나아간다. 예전 에드나에게, 바다와 그 너머 세계는 금지된 장소였다. 그러나 홀로 헤엄쳐서 드디어 바다 멀리 나아간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힘을 깨닫는다. 이 일로 ‘희미하던 어떤 빛이 분명’해지고, ‘그 빛은 하나의 길을 보여’주게 된다. 수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 그 감격에 도취해 별장 밖에서 꿈꾸듯 행복감에 젖어 있던 에드나에게 남편 레옹스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제안하자 그녀는 사뭇 도전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말한다. “저는 여기 더 있을 거예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들어갈 생각도 없고요.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 말아요. 이제 더는 대답 안 할래요.”(69쪽). 전통적으로 문학에서 물은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에드나에게 바다 수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결말, 에드나가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그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이미 자아를 확고하게 깨달은 여성이 사회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꿈꾸며 끝없이 나아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나의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세상에 던지는 하나의 당찬 도전이 아닐까. 도덕적으로 파탄난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안나’와 ‘엠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에드나가 각성하는 두 번째 계기는 라이즈 양이 연주한 피아노 음악이다. 에드나가 <고독>이라고 이름 붙인 곡을 라이즈가 연주하자 그 음악을 듣고 에드나는 전율한다. 음악을 들은 뒤 감동에 빠진 에드나는 자신의 ‘존재가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느낀다. ‘파도가 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때리듯, 바로 열정 그 자체가 그녀의 영혼에서 깨어나 영혼을 압도하며 뒤흔든다’. 에드나는 전율하고, 숨도 쉴 수 없다. 라이즈가 에드나만이 음악을 제대로 들을 줄 안다고 말한 부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음악으로 영혼이 깨어남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에드나는 전에는 불가능했던 바다 수영을 해내고 ‘육체’의 해방을 맞이하며, 라이즈의 연주를 듣고 ‘정신’이 깨어난 것이다. 에드나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도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난 다음이다. 이 무렵에 모호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로베르에 대한 감정 또한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까 로베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각성한 게 아니라, 수영과 음악을 통해 자기의 영혼이 깨어남을 느끼고 로베르를 향한 욕망에도 눈을 뜨는 것이다. 평생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했고, 이를 입 밖에 낸 적이 결코 없었던 에드나는 이 두 가지 일을 계기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똑똑히 말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자신에게 속한, 자신만의 것’이라고 느끼며 ‘혼자서 이를 누릴 권리’가 있고,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녀나 그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새롭게 태어난 에드나 앞에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혼자서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즐겁게 찾아다닌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꿈을 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와 엄마로서 주어졌던 일,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기 존재가 더 강해지고 딛고 선 범위도 넓어’진다.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저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된다. ‘이제 자신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살 뿐, <세상의 평판을 의식하며> 사는 데 만족할 수’(197쪽) 없다. 그런 그녀가 집을 나와 소박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이 공간을 로베르나, 아로뱅과의 밀회 장소로 쓰기 위해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에드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에드나는 남편과 사는 집을 한 번도 자신의 집 같았던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집이나 그 집에 들어가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며, 엄마로부터 받은 유산과 직접 경마에서 딴 돈, 자신의 그림을 판매한 돈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다. 살림에 꼭 필요한 간단하고 자질구레한 생필품도 ‘자기 돈’으로 마련한다. 기존의 문학작품에서 집을 벗어나 다른 공간을 얻는 여인들은, 그 공간을 남편이 아닌 남자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마련하고, 그 마저도 자기 돈으로 마련하기보다는 남편 돈이나, 연인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여성들과 에드나는 확실히 다른 여자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에드나는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그녀는 이제 ‘세상 밖으로 나설 때 차려입던 옷처럼 자신을 포장하던 거짓 자아를 벗어던지’고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아버지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이지 바보 같은 남자군요. 퐁텔리에 씨가 나를 자유롭게 놔주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꿈꾸며 세월을 낭비하다니! 난 이제 퐁텔리에 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에요. 내 선택에 나 자신을 맡길 거예요. <로베르, 여기 있네. 이 여잘 데려가서 행복하게 살게나. 이제 그 여자는 자네 것일세!>라고 한다면, 당신네 둘 다 비웃을 거예요.” (226쪽)


이렇게 새로 태어난 에드나를 포용하기에 로베르는 너무도 평범한 남자이다. 아로뱅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로베르의 그 진부한 선택에 에드나는 ‘바보 같은 남자’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남편 레옹스와 두 아들은 에드나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베르와 아로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에드나를 둘러싼 주위의 평범한 인물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각성한 그녀가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녀는 저 먼 바다로 다시 팔을 저어 나아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언젠가 에드나가 지어내어 들려줬던 이야기. ‘어느 날 밤 통나무배를 타고 연인과 함께 노를 저어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처럼 다시는 이 답답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이 하염없이 나아간다. 때문에 <각성>의 결말은 더 이상 아내, 엄마 등 누군가와 이어진 ‘여성’이 아니라, 오롯이 홀로선 인간, 진정한 자아를 찾은 한 사람의 완전한 해방을 보여준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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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 왠지...

케이트 쇼팽이라는 작가가
궁금해집니다.

잠자냥 2020-01-09 18:02   좋아요 0 | URL
네 아마 레삭매냐 님이 한번 읽게 되시면 케이트 쇼팽 전작 뽀개기를 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ㅎㅎ

2020-01-1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2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2-03 10:08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