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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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무렵, 어느 공터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 시절 나 또한 <진주>의 주인공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자전거 타기에는 무언가 엄청난 기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 아빠는 자전거를 뒤에서 붙잡아 주다가 나 몰래 놓으면서 페달을 계속 밟으라고, 다른 데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나는 드디어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게 되었다. “밟아! 계속 밟아! 앞을 봐!” 아빠가 그렇게 외치던 소리는 그 후로도 가끔 자전거를 타노라면 귓가에 울린다.

<진주>의 첫 문장은 나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버지와 긴 시절 불화를 겪었고, 이제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남남과도 같은 사이가 되었지만, 아주 드물게도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간혹 있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그날, 그 공터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기억만큼은 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로,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두려움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운동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누구에게도 넘어졌다 놀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른 아침 시간이 필요합니다.”라는 <진주>의 첫 문장은 최근 읽은 그 어떤 소설의 문장보다 마음을 울린다.

자전거는 참 이상하다. 처음 배울 때는 앞만 보고, 쉼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지만,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게 된 뒤에는 페달을 밟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절로 터득하게 되고, 때로는 앞을 보지 않고도, 아니 앞을 보면서도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물론 뒤를 보는 일만큼은 아무리 자전거에 익숙해지더라도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진주>의 화자 ‘나’는 열두 살 무렵의 나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또한 내 아버지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나’의 아버지는 ‘그 때문에 네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거듭 큰 목소리로 말한다.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의심을 살 수 있다’며 아버지는 돌아보지 말라고,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정작 자유로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을까? 딸에게 뒤를 돌아보면 절대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앞만 보라던 아버지야말로 뒤를, 주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 세계를 너무나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영영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왜 아버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줄 알면서도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그런 어른이 되었을까? 아버지는 자기만이 성공하여 사는 인생보다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는 인생을 살았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몸을 던졌기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겨우 세상에 나와도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동안 많은 계절이 지나간다. 그의 친구들은 유학을 떠나 학계에 자리 잡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등등 모두가 세상에서 자기 자리 하나쯤은 갖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전과가 있기에 일반 회사에는 갈 수 없다. 친구가 주선한 회사에 겨우 가더라도 아버지는 임금 체불, 부당 해고 등 작은 부패를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묻고 따지다가 친구도 잃고 일자리도 잃는다. 이런 삶이 반복된다. ‘함께 투쟁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졸업장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회사나 건물이 있으며 누군가의 가슴에는 의원 배지가 달려 있다.’ 모두가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간다.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기에 ‘진주’에서 옥살이를 했던 아버지의 ‘딸’의 시선으로 그 오랜 세월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형식이 매우 독특해서 때로는 시를 읽는 것 같다가, 르포 기사를 읽는 것도 같고, 어느 페이지에는 사진과 그림이 실려 있기도 하며, 또 때로는 신문 기사가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한다. 어느 구절은 딸,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 그 자신의 어린 시절 일기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부재했던 아이. 언제나 없었지만, 그래서 있었던 아버지. 딸 곁에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책장 한쪽에 놓여 있던 가족사진 속에, 냉장고 위에 쌓여 있던 <세계철학사>와 <전환시대의 논리> 속에, 장롱 서랍 속 곱게 포개져 있던 새것 같은 양말들과 속옷들, 신발장에 넣어둔 낡은 검정 구두 한 켤레로. 수많은 편지, 수많은 비밀문서 속에 언제든 찢기고 폐기되고 소각되어 사라질 수 있는 익명의 문장으로’(173쪽) 존재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있어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 지난한 세월,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 가까이의 세월을 좇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왜, 지금일까?

한때 후일담 문학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문학들.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 문학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난 2020년에 <진주>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딸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는 그 생각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려야만 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 지난 이야기잖아 너무 낡은 이야기는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왜 이제야?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바로 ‘지금’이기 때문에, 그 어린 딸이 다 자란 성인이 된 지금에야, 80년대도, 90년대도 아닌 오늘에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들 모두가 ‘딸’의 ‘아버지들’이었기에 이제야 말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딸이 말하기에, 딸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닌, 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가족의 고생과 어려움을 더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딸의 일기는 그 삶의 어려움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엄마가 거의 모든 생계를 꾸려나간다.’ 엄마와 딸의 고통스러운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들은 딸에게 아버지가 ‘참 훌륭한 일을 하신다.’ 말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딸과 엄마의 고생은 그 속에서 파묻히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 싫고, 경찰이 밉고, 경찰의 옷을 입지 않은 경찰 아닌 척하는 경찰이 미운 딸. 남편이 없는 동안 생계를 도맡았지만 그때도, 그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 지속적인 월세 지출로 인해 거처를 옮겨야 할지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 그러고도 ‘너는 하루라도 빨리 외국어를 익혀 다른 나라로 떠나라’는 이야기를 듣는 삶. ‘너희 어머니 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간을 참고 견디고 남한테 손 한 번 안 벌리고 훌륭하게 살아오셨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나라가 아니잖니.’(162쪽)라는 말을 듣고 거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삶.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고작 오천만원. 그 대상도 직접 복역한 당사자에 한할 뿐. 오랜 세월 그 복역을 인내한 아내와 딸은 보상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라도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 그 ‘언젠가는, 언젠가는’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독재자는 죽었지만 여전히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를 닮아 잘못된 관행과 잘못된 일들에 분노하지만, 아버지처럼 ‘행동’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아빠처럼 분노하다가는 평생 월세살이를 전전하고야 말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누군가를 돕다가는 평생 새카맣게 어린 상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날만 올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하다가는 평생 연금은커녕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같은 고단한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평범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딸은 오래 전 아버지의 가르침,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줄 때의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눈감아야 하고 입 다물어야 하고 고개를 처박고 견뎌야 하고 자신이 견딘다는 사실마저 깨끗하게 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갓 입사한 회사의 늙은 경비와 청소하는 여자를 잊어야’ 한다. 그들이 ‘그 건물의 가장 더럽고 습한 지하방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부조리함을 잊고 아침마다 어제를 잊은 듯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모두가 ‘완전한 각자’라고 느낀다. ‘돈을 번다는 것,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 견디는 일임을 느낀다.’(181쪽)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만 평범하게 살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가 ‘돌아보지 말라고, 앞만 보라고’ 크게 소리친 까닭은 어쩌면 딸에게 이 고단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 정말 인간다운 삶일까. 나는 왠지 이렇게 앞만 보고 페달을 밟는 삶, 그런 ‘완전한 각자’의 인생이 서글퍼진다. 그렇게 다들 ‘완전한 각자’의 삶을 좇기 때문에 독재자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면서 당신은 공산주의자이고, 당신은 빨갱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자전거를 잘 타는 딸, 앞만 보며 페달을 밟는 딸이 성인이 된 지금보다 오히려 ‘열 살 무렵의 내가 민주주의의 사명과 신념을 더 잘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딸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처음 비행기를 탔고, 그 경험은 처음 하늘을 날아본 기억이 된다. 그때 딸은 신처럼 세상을 바라보았노라고 회상한다. 이제 다시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딸, 그 딸은 아마 그 어린 시절처럼  ‘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진주로 가는 비행기는 어쩌면 그래서 ‘완전한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리라.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게 된 뒤의 삶, 그러니까 속도를 줄이고, 주변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볼 줄 아는 삶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자동차 여행과 달리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골목골목까지 돌아보며 주변인의 시선을 갖출 수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 따르면 한 프랑스 철학자는 ‘오늘날 이 세계에서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시야가 반딧불을 찾아낼 만큼 충분히 어둡지 못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라도 망설임 없이, 더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가’(91쪽)라고 말한다. 진주행 비행기에 오른 딸은 아마도 그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마침내 잃어버린 반딧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주>를 읽는 이들도 조금은 그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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