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읽을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2월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거기에 마거릿 드래블의 <찬란한 길>이 한몫했다. 장장 600쪽이 넘는 분량. 대산세계문학총서 이 시리즈는 알다시피 글자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자간도 촘촘하다. 그런데다가 600쪽. 그래서 읽는 데 오래 걸렸느냐 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복잡하지도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세 여성의 삶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잘 안 읽히는가? 한마디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배경에 그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한해가 끝날 즈음, 희망찬(?) 1980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 장면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저택에서 파티를 주최한 ‘리즈’는 정신과 의사로 성공했으며, 자신의 부와 성공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남편 ‘찰스’ 또한 남부럽지 않은 지위와 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시절은 무려 21년. 그들의 지인들 중 그렇게 길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커플은 없다. 그들은 ‘전쟁과 유혈 사태. 배신’을 지나 이제 이 넓은 집에서 평화롭게 만나 각자의 방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주말에는 마멀레이드를 앞에 놓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것, ‘애정’이 빠져 있다. 찰스는 몇 달 뒤 새 직장 때문에 뉴욕으로 갈 것이며 그들은 절대로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파티에 초대된 그 누구도 리즈가 ‘여자답게 아내답게’, 자신의 삶을 뿌리 뽑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즈는 지금 여기에 머물며 커리어를 좇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자신만의 정신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찰스와 리즈 헤들린드 부부는 남들에게 관습을 깨고 선구자가 된 능력 있는 커플로 비친다. 그런데 정말 그 속내도 그러할까?

파티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리즈의 오랜 친구들, 케임브리지 동창인 ‘알릭스’와 ‘에스터’도 있다. 오랜 세월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지내온 그들. ‘제인 오스틴 시대’였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1952년 케임브리지에서 만났다. 알릭스는 영국 문학을, 리즈는 의학을 전공할 목적으로 자연과학을, 에스터는 현대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 시절에 지방 출신의 사회 지위가 낮은, 그러나 똑똑한 젊은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중 하나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 세 여성은 이들 세대 중에서 일류 중 일류에 속했다. 명문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명문 학교들에서 탐내며 끌어오고 싶어 했던 재원들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특별한 지위는 없지만 특권을 가진다. 젊음, 지성, 미, 그리고 때때로 부. 그들이 사는 시골 마을의 공주나 다름없다.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공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젊었고, 지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 모범적이어야 했다. 그들에겐 분명 기회가 주어졌고, 선택지가 있었으며 열여덟 살에 세상이 그들 앞에 열려 다양한 것을 제시했고, 복지국가와 장학금, 성평등이라는 멋진 신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엘리트, 선택 받은 자들, 위대한 사회적 꿈을 성취하고, 화환을 목에 건 이들이었다. 모험과 가능성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몇 십 년이 지나 이제 마흔을 넘어선 이들, 1980년대를 앞둔 이 세 여성의 현재 모습은 엘리트로서 꿈을 성취하고, 선택 받은 자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나마 정신과 의사라는 확고한 지위 아래, 대저택에 살면서 이런 파티를 열고 있는 리즈가 그 오래 전 꿈꾸던 멋진 신세계에 가장 가까운 인생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 마저도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리즈는 찬란한 19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찰스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이 세 여성의 삶은 어디서부터 그 꿈에서 멀어졌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기만의 힘으로 그 계급을 벗어난 리즈, 좌파 지식인 부모 때문에 남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알릭스, 난민 출신 유대인이자 성소수자인 에스터. 애초부터 이들은 영국의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여학생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입학했고, 그러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왜 인생은 순조롭지 못했을까? 에스터를 제외하고 리즈와 알릭스는 졸업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결혼이라는 굴레 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여성이라는 한계에선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알릭스에게 결혼은 가장 치명적이다. 졸업 초기에 커리어를 쌓지 않고 전업주부가 되었던 알릭스의 선택은 중년까지도 풍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경제생활로 이어진다. 직업적 성취와 명성을 모두 얻은 리즈마저도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신만을 신경 써주는 ‘참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결혼하지 않은 에스터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만 충만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게다가 ‘찰스’보다 지적으로 뛰어난데도 작은 아파트에 살며 가끔씩 강연, 기고, 수업을 통해 푼돈을 버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선 알릭스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바스찬을 배신했다.

우린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릴 때 결혼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왜 또 하려고 하니? 알릭스가 물었다. 아 이번은 달라, 하고 리즈는 말했다. 스물다섯 살의 리즈는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알릭스는 “난 다시는 결혼 안 할 거야.”하고 말했다. 리즈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라고 했다. 알릭스는 “강의하잖아, 시험지 채점도 있고. 근근이 살아갈 수 있어.”하고 말했다. 리즈는 찰스 헤들린드와 함께 부(富)의 세계로 입성하고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결혼’이라는 개인의 선택, 그러나 사회적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굴절된 삶을 살게 된 이들 앞에 1980년대는 또 한 번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다. 희망의 시대가 결코 아니다. 1980년대와 함께 대처정권이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알릭스와 에스터의 일자리는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사람이 지닌 힘을 믿으면서 교화 시설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범죄자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는 알릭스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휘청거리게 되고, 주류에서 벗어난 재야 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에스터도 거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알릭스의 주변 인물들, 사회주의자 ‘브라이언’,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과도 같은 리즈의 동생 ‘셜리’ 등등에게 80년대는 더 가혹하다. 심지어 거침없을 것만 같았던 찰스에게도 대처주의가 남기는 상흔은 깊기만 하다. 대처리즘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에 있는 인물인 알릭스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운 삶, 사람들을 위한 삶, 두려움이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이제 없다. 두려움이 자라고, 번영하고, 번식하고, 피어나고, 타오른다. 나는 패배했다.’

이렇게 <찬란한 길>은 중산층 지식인의 눈으로 대처의 집권 이후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기록하면서 그 시대의 결코 풍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풍경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너무나도 상세히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보고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선뜻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난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이자, ‘마거릿 드래블’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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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2-2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그러면 또 제가 장바구니에 넣어야지요. 인용해주신 문장이 완전 제타입이라서요.

잠자냥 2020-02-2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화자가 ‘찰스‘나 ‘브라이언‘ 같은 남자들 이야기하다가 이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일단 이쯤에서 접고... 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해요. ㅋㅋㅋㅋ) 저 세 여성 말고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삶이 또 너무나도 와닿는... ㅠ_ㅠ 그러나!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유형의 책은 아닙니다! 참고하세욧. ㅎㅎ

Falstaff 2020-02-2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두었습니다. 4월 쯤에 읽을 거 같은데 별 다섯 개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5:12   좋아요 0 | URL
80년대 대처주의를 혹독하게 겪은 영국인이라면 정말 극공감하면서 읽을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이 작가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있더라고요? <붉은 왕세자빈>이라고. 다 읽고 나니, 이 책도 궁금해지더라고요.

Falstaff 2021-06-09 08:46   좋아요 0 | URL
윽.... 근데 이 서평 올리신 날짜가 2월 25일.
인간의 임신기간이 열 달.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2월 25일 더하기 열달은 성탄절.

그러면 2월 25일은, 우리는 찬양합니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 이름하여, 성임절.
우연히 이 날이 ㅋㅋㅋㅋ 폴스타프 생일. ㅋㅋㅋㅋㅋㅋ 천생이 복받고 나왔습지요!!!!

이 책 왜 안 팔리는 거예요. 좋기만 하던데. 지금 살 거 읎나, 싶어서 서핑 중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6-08 23:1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이게 뭐예요. ㅋㅋㅋㅋ 옛날 글에 생일 광고!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또 책을 사시다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