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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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때때로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Science Fiction은 소설이라는 거짓말의 세계에서도 한층 더한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거짓말쟁이 중에 으뜸 거짓말쟁이랄까. 그렇지만 SF는 ‘어차피 이건 다 거짓말이야, 다들 알지?’ 말하면서 현실보다 더한, 현실에서는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진실한 세계를 담아낸다. ‘이건 거짓말이니까 믿지 마’라고 상대의 마음을 허물어놓고 현실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꺼내지 못할 이야기들을 건넨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담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읽어보라. 그 누가 이 이야기를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목만 본다면 누구라도 ‘아니, 이런 제목의 작품이 어쩌다가 이 SF 단편모음집에 실린 거지? 잘못 실린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틀림없이 ‘Science Fiction’이다. 그런데 몇 장만 넘겨보아도 그 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참혹하리만치. 이 책의 첫 번째 작품인 종이 동물원」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거의 모든 작품마다 감탄하며 읽어가다가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켄 리우라는 작가, 그의 시선과 열정에 사뭇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시간여행은 이제 이런 SF장르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소재이다. 새롭지 않은, 매우 익숙한 거짓말이라 ‘에, 또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좀 새로운 거짓말을 해봐!’ 하는 생각까지 든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겠는가? 이 질문을 받고 당신은 지금 어느 아름다운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는가? 그런데 시간여행을 제안한 사람이, 그저 한 개인의 일상적인 삶,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 아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한 순간으로 가보자고 말한 것이라면? 예를 들어 히틀러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당한 아우슈비츠 현장이거나,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731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한 현장이라면?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 그 현장을 목격할 의향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그 현장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장면만 보고도 솔직히 나는 힘들어서 책을 읽다가 전철에서 내려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그런데 누가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굳이 그 부대의 잔학 행위를 직접 두 눈으로 보려고 하겠는가.

켄 리우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통해 그 끔찍한 역사를 다시 불러온다. 이 작품에서 그런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만든 ‘에번’과 ‘기리노’처럼 기계를 통해 그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하지는 않지만 ‘글’로써 우리 눈앞에 그 과거를 재현한다. 이 작품은 일본 고대사 전문가인 에번과 그의 아내이지 저명한 물리학자인 기리노가 발명한 기술을 통해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 갈등’을 다룬다. 다큐멘터리 영화 형식으로 각국 정부 관계자 및 학자, 731부대 희생자 유족 등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진행된다. 731부대의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련자의 증언과 일본의 로비, 미국 정치계의 대립 등을 거의 현실과 똑같이 구성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이건 픽션’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게 한다.


물론 그 소재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구는 각국의 여러 관계자가 존재하고, 또 그들이 만들어낸 ‘진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라고 말했음에도 그의 단편집이 일본에서 출간될 때 이 작품은 수록되지 않았으며, 중국 또한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삭제한 채 불완전하게 출간됐다고 한다. 동북아시아 4개국 가운데 이 작품을 완전한 형태로 출판한 나라는 대만과 한국뿐이라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Fiction’임에도 일본과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거짓말의 형태를 빌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으리라.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니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게 아닐까 지레 겁먹거나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는 싫다고 고개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종이 동물원>에 실린 모든 작품은 환상적일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다.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한편으로도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동물들이 그때는 생생히 살아 움직이다가, 엄마와 소원해지면서 동물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자칫 지나치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곧 ‘아빠는 엄마는 카탈로그에서 골랐다’라는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이 마법 같은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단순히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중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의 정체성의 혼돈, 어머니의 굴곡진 역사와 삶, 그리고 ‘사랑’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법’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진실’ 그 자체이다.

이 책 내내 이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편 전쟁 직후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여우 요괴가 등장하고 그 요괴를 사냥하는 사냥꾼도 나온다. 미국인 소녀와 중국인 점술가의 우정을 그린 「파자점술사」에서는 2·28 사건처럼 굵직한 대만 현대사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손을 잡고 태평양 횡단 해저 터널을 만들어 대공황을 타개, 식민 지배를 이어간다는 가상의 역사를 소재로 한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를 비롯해, 소행성 충돌로 멸망한 지구를 뒤로 하고 살아남은 인류가 우주선 한 척에 올라 외계로 나아가는 미래를 그린 「모노노와레」 등 가상현실과 실제 역사의 기억을 절묘하게 배치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보는 듯한 느낌인「레귤러」도 기억에 남는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여성 사립탐정이 해결해 간다는 설정도 예사롭지 않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보조 장치로, 법집행 기관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가상의 장치 ‘레귤레이터(regulator)’라는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다른 작품에서도 간간이 엿보였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켄 리우의 여성관이 잘 드러나는데,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점, 넓은 포용력으로 상처를 지닌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다는 점 등등 주로 긍정적인 면이 많아서 켄 리우를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 ‘좋은 작가군’에 넣게 된다. 비단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 엄청나게 공부하고 성실한 자세로 꼼꼼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면서도 쉽게 읽히고 아름답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켄 리우, 그가 궁금해지고, 그 감정은 호감에 가깝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계 미국인 켄 리우. 그런 정체성 때문인지 「종이 동물원」처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있으며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조각을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인류의 역사, 즉 거시적인 기억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 한 인간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이렇듯 켄 리우는 기억을 재현하고 보존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작품에서 ‘기억 같은 거 어차피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못하잖아요’(「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는 왜 이토록 인류의 기억 또는 한 개인의 기억에 집착할까? 아마도 이 또한 작품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만약 사람들이 과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는 말처럼……. 켄 리우는 SF라는 ‘거짓말’의 세계, 이야기의 힘을 빌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진실’을 전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별 다섯 개가 아닌 여섯 개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당신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바로 <종이 동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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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제목이 자주 눈에 밟히던 책이라 궁금했는데 별 여섯 개를 주고 싶다는 잠자냥님 글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 장르 소설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읽고 장르소설도 이렇게 아름답고 문학적일 수 있구나 감탄했었거든요. 왠지 <종이 동물원>도 그런 느낌을 받을 것 같네요. ^^

잠자냥 2019-01-17 12:45   좋아요 1 | URL
저도 장르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는데, 몇몇 장르 소설은 ‘장르 소설‘이라는 말로 한정짓기에는 좀 억울한 작품이 있더라고요. 켄 리우의 <종이 호랑이>는 틀림없이 그런 작품입니다. 그가 앞으로 쓸 작품들도 그럴 거 같고요. 그리고 이 작가는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게 아니라, 습작 시기도 길고 그동안 쓴 작품도 어마어마한 것 같더라고요. 노력형 작가인 것 같아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케이 2019-01-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알라딘에서 나에게 추천했던 작품인데 제가 평소 읽던 책과는 거리가 멀어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전쟁 배경인 소설을 읽으면 너무 심각하게 정신에 타격을 입는지라, 고민되긴 하는데 잠자냥님께서 이렇게 대단하다고 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자기네한테 불리한 소설을 빼고 출판한 이웃국 일본의 치졸함에 다시한번 분노합니다. 정말 웃기는 작자들 아닌가요.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근데 왜 역사를 계속 부정하는지.
일본 니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역사가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잠자냥 2019-01-17 14:23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이 작품은 읽을까말까 하던 중이었는데, 전자책 사면 받을 수 있는 증정품이 탐나서 구매했거든요. 안 샀으면, 안 읽었으면 정말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본처럼 그렇게 역사를 부정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있으니, 켄 리우가 ‘기억‘을 계속 환기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하루빨리 모든 게 잊히기를 바랄 테니까요.
어쨌든 <종이 동물원>은 꼭 한번 읽어보세요. 케이 님은 왠지 ‘종이 동물원‘, ‘파자점술사‘, ‘시뮬라크럼‘ 같은 작품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떤 작품을 인상 깊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19-01-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을 가지고 책인데
멋진 리뷰를 써주셔서 참고가 많이
된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 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19-01-17 14:24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 이라는 이름으로 홀대(?)받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서 열렬히(?) 썼습니다. ㅎㅎ
네~ 틀림없이 흥미롭게 읽으실 거예요~!

카알벨루치 2019-01-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는 기계 같으셈!!!ㅋㅋ그리고 글쓰는 기계 ㅋㅋㅋㅋ🥰

잠자냥 2019-01-17 15:27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소설 리뷰 AI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1-17 16:18   좋아요 1 | URL
4차산업혁명이 눈앞에 이렇게 빨리 알라딘 속에 들어왔군요 햐~ㅋㅋㅋㅋㅋ
 
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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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델로의 단편은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눈앞에서 생생한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인물은 주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소박한 이들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안타깝고 연민 가득한 그런 영화 말이다. <어느 하루>를 다 읽고 나면 왜 그의 작품에서 영화 같은 느낌을 받는지 곧 깨닫게 된다.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란델로는 생전에 250여 편에 이르는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 가운데 <어느 하루>에 실린 9편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한다. 아하, 비밀이 거기 있었구나! 더욱이 그의 유명한 희곡 중에는 단편소설을 개작한 작품이 많단다.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다. 피란델로의 머릿속에서 단편 소설은 애초부터 하나의 영상처럼 그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곡작품으로 개작하기에도, 영화로 만들기에도 좋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어느 하루>의 첫 번째 단편인 ‘미차로의 까마귀’를 읽었을 때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매력을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느 양치기가 절벽에서 까마귀 한 마리를 붙잡아 마을로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정작 잡아온 까마귀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양치기는 기념으로 방울을 달아준 뒤 까마귀를 풀어준다. 방울을 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그런데 이 녀석은 방울 소리를 내면서 하필이면 어느 농부의 빵을 훔쳐 먹는다. 그러려니 하면 그만일 것을, 이 농부는 까마귀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까마귀에게 자기 뜻대로 한방 멋지게 먹였을까? 이 이야기는 다분히 우화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왜 서두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또 다른 아들’을 읽으면서 나는 피란델로의 세계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어! 조금씩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노파 마라그라치아는 아들 둘이 아메리카로 떠난 뒤 혼자 부랑자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라면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인데, 글을 모르는 그녀는 마을의 과부 닌파로사에게 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토록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도 떠난 아들들로부터는 답장 한 번 없다. 그래도 노파는 오늘도 닌파로사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편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일까? 편지의 비밀과 함께 이 노파의 굴곡진 삶이 드러나면서 뜻밖에도 커다란 비통함을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노파의 모습에서 인간은 어쩌면 비참한 현실에서도 꿈꾸기를 멈추지 못하는 존재는 아닐까 숙연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작품인 ‘달의 저주’는 자신을 늑대 인간이라 믿는 농부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와 결혼한 신부의 이야기로, 첫 번째 작품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또 다른 아들’과는 더더욱 다르다. 알고 보니 피란델로는 소설 속 공간에 따라 크게 ‘시칠리아 이야기’와 ‘로마 이야기’ 두 가지를 썼는데,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주로 고풍스럽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미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이나 현대의 비극을 초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단다. ‘달의 저주’는 그야말로 토속적이면서도 미신적인 세계를 담으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날카롭게, 그러나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달의 저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 표제작 ‘어느 하루’도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매우 짧은 분량인데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실수였는지 몰라도, 돌연 누군가에 의해 잠에서 깬 나는 어느 간이역에 멈춰 선 기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한밤중이고, 내 수중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루’. 94쪽)


이렇게 시작하는 ‘어느 하루’는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간이역에서 내던져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꿈과 환상, 정신착란과 환각 등 시공간을 벗어난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기이한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는 온갖 일을 겪고 난 뒤 순식간에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항아리’는 가장 많이 알려진 피란델로의 단편 중 하나로, 수많은 버전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발레극으로도 재현됐다고 한다. 익살스럽고 재미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꽤 철학적이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주 돈 롤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귀한 항아리는 마련했는데, 그만 그 항아리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신통방통한 고무접착제를 발명한 땜장이 디마를 불러와 항아리를 원래대로 고쳐주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만 받았던 디마는 드디어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신나게 항아리를 붙인다. 이윽고 항아리는 감쪽같이 새것처럼 붙는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나? 디마는 자신이 항아리 안에 들어간 채 붙이고 만 것이다. 항아리를 깨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디마와 항아리를 절대로 깰 수 없다는 돈 롤로. 이들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상황에서 돈 롤로에 비해 디마의 체념은 조금 빠른 편인데, ‘디마는 진정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이 별난 사건에 재미를 느꼈고, 이를 불행한 사람들 특유의 슬픈 유쾌함으로 웃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피란델로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면서 서글픈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의 백미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작품 ‘유모’와 ‘침묵 속에서’이다. 그의 다른 작품은 읽지 않더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모’의 주인공 안니키아 또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유모살이를 하러 떠난다. ‘로마’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작품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그 안에서 이 힘없는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나간다. 안니키아는 오래전부터 아가씨로 모시던 에르실리아가 막 출산을 하자 그 갓난아이의 유모로 마지못해 고향을 떠난다. 에르실리아는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된 변호사 모리와 결혼했는데, 신혼인데도 그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모리는 사회주의사상의 인도적인 관점에 매료된 상태이지만, 사실 그는 위선적인 부르주아일 뿐이다. 순박한 안니키아를 보고도 ‘그 무지몽매함을 참을 수 없어’하고, ‘노예근성이 이렇게나 깊게 뿌리박힌 시칠리아의 최하층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는 게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부르주아 인텔리의 위선은 이 작품 끝에 가서 절정에 달하는데, 안니키아의 비극을 앞에 두고도 모리는 방관자적 태도로 멀거니 지켜만 본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비극을 사회주의자 모임 회담 주제로 삼기로 하고는, 기계적으로 글을 쓸 뿐이다. 그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느끼면서 안니키아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게 된다.

  

마지막 작품인 ‘침묵 속에서’는 근면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늘 칭찬받던 소년 ‘체사리노’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무슨 일인지 공부에 통 집중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체사리노. 그는 이제껏 아버지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떤 사람인지 도통 알지 못한다. 집안에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고 어머니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종일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해 어머니 또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바쁜 어머니. 잠시도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한 덕분에 체사리노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 소년에게 삶은 고독하고 적막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독하고 적막한 생활일지언정 어머니 곁에서 계속 학교에 다니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갑자기 그에게 기숙사 입학을 제안하고, 체사리노는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어느 날, 기숙사로 전해온 어떤 소식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한껏 상처받기 쉬운 열여덟 체사리노 앞에 닥친 가혹한 인생의 무게에 한숨짓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를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는 인생의 슬픔, 기쁨, 비극이 모두 담겨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끝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는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 내 작품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 아홉 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그의 단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 단편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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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단편만 읽고는 아, 이런 우화같은 이야기면 쫌 그런데 하면서 다음 단편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당장 다음 단편들 읽어야겠어요.

잠자냥 2019-01-09 09: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죠? 첫 단편이 조금 읭? 스러운데 다음 단편부터는 괜찮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아니면 아예 마지막 두 단편만 읽으시던가요-

카알벨루치 2019-01-0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시유~피란델로 ㅎㅎ

잠자냥 2019-01-09 09:20   좋아요 1 | URL
재미나게 읽게 되시길 바랍니다! ㅎ
 
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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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청춘을 호명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이십대가 아닌, 서른을 넘긴 나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주로 떠올리는 청춘의 기억은 설익고 치기어린, 그렇지만 그래서 뜨거웠을 어느 한 시기일 것이다. 때문에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오고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무렵을 떠올리느라 밤잠을 설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H전집’에 얽힌 ‘그들’의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의 20대, 정확히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제목으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라는 말. 그 앞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생략되었으리라. 그런데 어떤 말이 생략되었을지는 감으로 헤아릴 수 있다. 어리석고 치기어리고 부족하고 미숙하고 실수투성이에 엉터리 같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었고, ‘그래도’ 청춘이었다는.

헌책방에서 H전집을 발견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후미오. 후미오의 약혼녀인 세쓰코는 그 책에 찍혀 있는 옛 소유자의 장서인이 낯익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그 책은 세쓰코가 대학 때 알고 지낸, 도쿄대 역사연구회 회원이었던 사노의 것이었다. 후미오는 세쓰코의 부탁으로 사노의 행적을 좇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후미오와 세쓰코, 거기에 사노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이 책을 읽노라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미오나 세쓰코보다 사노가 더 깊이 인상에 남는다. 사노의 절박함과 절망이 담긴 편지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사노는 한때 지하 군사조직에 참가할 정도로 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렇지만 1955년 무장투쟁을 지향하던 일본 공산당이 이른바 ‘육전협(제6회 전국협의회) 결의’ 이후 평화혁명으로 노선을 바꾸자, 학교로 돌아와 정치투쟁과 선을 그은 채 평범한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겉보기엔 육전협이 노선을 바꿈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 그가 그토록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더더욱 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배신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배신은 치명적이어서 그는 학생운동에 뜨겁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소시민성과 그걸 비판하는 양심 사이의 모순’을 겪으면서 그저 조용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사노의 모습에서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전혀 낯선 풍경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운동권 끝자락이 존재해서 나보다 학번이 훨씬 높은 선배들 가운데는 여전히 거리 투쟁을 벌이고, 그 때문에 수배를 받고 학교에서 숨어 지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사노처럼 마르크시즘에 열렬히 경도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선배가 그랬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 또한 몇 번은 거리에 서기도 했는데, 그것조차 나는 곧 시들해져서, 그들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그 세계를 떠났다. 그때 그 선배는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그 또한 언젠가는 그 세계를 떠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학창 시절의 운동은 홍역 같은 거야. 시간이 지나 취직하면…….” 하는 말을 한다. 지금은 대기업에 적을 둔 나는 겉으로 보기에 아마 전형적인 인물이겠지.(<그래도 우리의 나날>, 70쪽)


이 구절을 읽는데,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노처럼 소시민으로 살면서 주말에는 명동, 광화문, 종로, 대학로 등지에서 쇼핑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면서 살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나는 어느 날 그 선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그는 을지로, 광화문, 종로, 대학로에서 여전히 그 누군가를 위해 ‘투쟁’중이었다. 어느 해 5월 1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명동 거리를 걷다가 노동절 시위 무리에 있는 그 선배를 보기도 했고, 용산 참사 진실 규명을 외치는 시위 무리에서도 그를 보았으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그를 보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시위할 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때조차도 시위 현장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몇 년에 한번쯤은 그런 그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렸구나. 그는 여전하구나. 그를 우연히 마주친 날이면 이렇게 평범하게 소시민적으로 사는 내가 비겁해 보이고, 한심스러웠다. 그는 어떻게 그런 삶이 여전히 가능한 걸까? ‘혁명가이고 싶었지만 혁명가가 되지 못한 사노’와 달리 그 선배는 지금도 생활 속 작은 혁명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선배는 죽는 순간에 떠올릴 만한 확실한 ‘어떤 것’을 가졌으리라.

H전집의 옛 주인인 사노의 편지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라는 엄청나고도 무서운 질문을 평범하게 살아가던 후미오와 세쓰코에게 던진다. 이 책을 읽는 이들도 이 질문을 마주하고 문득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벼운 충격 같은 것을 느끼리라. 세쓰코는 자신이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갖고 있을 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약혼한 사이지만 후미오와의 생활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生)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해한다. 그런 세쓰코를 지켜보는 후미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과 죽음이 있다. (...) 나는 머잖아 어학 강사가 되어 강사로 살고, 두세 권의 역서라도 내서 잠깐 행복해지다, 끝내는 어학 강사로 늙어가려고 마음먹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이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 99쪽)


후미오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노의 편지가 불러온 파문은 그리 잔잔하지만은 않다. 세쓰코는 세쓰코대로, 후미오는 후미오대로 저마다 과거를 환기하고, 자기가 지금 밟고 선 세계를 되돌아본다. 이런 현상은 세쓰코 쪽이 한층 심하다. 그녀는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아? 죽을 때 아무것도 떠올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죽는다는 건 외로운 일이야. 하지만 외롭다는 것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일이 무(無)가 되어버리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야.” 말하며 자신의 공허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쓰려고 한다.

그에 비해 후미오는 과거를 돌아보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을 크게 조정하지는 않는다. 진폭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후미오는 사노나 세쓰코, 또 세쓰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노세 등 다른 인물에 비해 너무나도 덤덤하고 관조적인,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늙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도 그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걸까? 후미오에게는 조금 반감이 들기도 한다. 사노나 노세, 세쓰코에게는 ‘그래도’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시절이 있는데, 후미오에게는 딱히 그럴 만한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공허함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닐까.

후미오의 그런 모습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세쓰코나 유코)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주변에 여자는 넘쳐나고 후미오는 아쉬울 것 없이 여자를 만나고 떠나보낸다. 세쓰코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애초부터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후미오는 하루키 작품에서 곧잘 등장하는, 아닌 척 하지만 실은 왕자병 기질의 남주인공(<상실의 시대> ‘와타나베’ 같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가 유코와 세쓰코를 대하는 방식에는 전형적인 여성의 대상화가 엿보이는데, 특히 유코, 세쓰코와 처음으로 섹스를 나누게 되는 순간의 묘사나 그때 그녀들의 심리 상태 등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F교수가 가즈코에게 하는 짓거리 또한 그렇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닐걸? 하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결점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이 작품에서 남자들은 사노를 비롯해 노세는 물론 사노가 ‘자신의 또 다른 눈’이라고 지칭한 소네 등 모두 하나 같이 젊은 날 어떤 이상이나 사상에 경도되어 거기에 열정적으로 빠지거나 그런 상황 속의 자기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세쓰코나 유코, 가즈코 같은 여자들은 어떤가. 그저 그녀들이 한다는 일은 그런 남자들을 지켜보며 ‘사랑’에 빠지거나 그들의 열정에 감동해 그 열정을 좇을 뿐이다. 스물 한 살 유코에게 가장 절실한 고민이 고작 그 나이에도 ‘남자에게 안기거나 키스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을 ‘추하다고’ 여기는 일이라니, 실소가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남자에게는 ‘인생 소설’이 될 수는 있어도 여자에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현실에 머무는 후미오에 비해 자기 삶을 바꾸고자 용감하게 결단을 내린 세쓰코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이와 같은 결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도’ 이 작품은 지금 한 순간,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착각으로 지탱된 날들’일지라도 ‘거기에는 인생과 미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기쁨과 관능에 넘쳤던 날들을 떠올리는 세쓰코의 기억에서 우리가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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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활 속 작은 혁명가인 그런 선배가 있기에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걸어볼 비빌 언덕을 찾게 되는 건 아닐까 싶네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게 되는 책인데 이참에 저도 펼쳐봐야겠어요. ^^
잠자냥님 덕분에 <어느 하루>도 도서관에서 대여해왔는데 이걸 다 언제 읽을지....ㅋㅋㅋㅋ

잠자냥 2019-01-05 17: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렇게 쌓여가는 거죠. ㅋㅋㅋㅋㅋ

케이 2019-01-07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이 소설 제가 너무 싫어하는 일본 남자 작가들의 여자 묘사가 있을 거 같아서 읽기 싫어지네요. 모든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또 떠날때는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떠나주는 일본 소설 속 무수한 여자 주인공들에 대해 읽는 거 너무 싫었거든요. (대부분 또 얼굴도 예쁨 ㅋㅋ)
가만 보면 이 정도면 절대 존엄이다 생각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그려졌던 거 같아요. 남자처럼 분노하고 질투하고 주도적이고, 어쩌면 남자보다 더 강한 면도 가지고 있는.
역시 아무나 대단한 소설가 되는 거 아니란 생각 다시 하게 됩니다.

잠자냥 2019-01-07 14: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거랍니다!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하루키 작품이 거의 그렇잖아요? 근데 이 작품 남주인공이 어떤 면에서는 하루키 작품 남주인공스럽다능. ㅋㅋ 가끔 보면 몇몇 일본 남자작가들은 현실에서 자기가 못 이룬 꿈을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나 싶기도 해요. 이 작품은 좀 애매하네요.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뭐한...

케이 2019-01-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이가 자기 열등감이나 한없이 찌질한 모습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쓰면 오히려 작가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글쓴이가 자기 글을 통해 대리만족하거나 멋져 보이고 싶어하는 게 은연중 보이면 오히려 글쓴이가 참 딱하게 느껴지니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자신의 은밀하고 추한 모습까지 다 고백한 작가의 용기에 더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잠자냥님!

잠자냥 2019-01-07 16: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늘도 케이 님 댓글에서 여러 가지 배웁니다.
케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많이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고, 쓰고 싶어지니 책을 읽을 때 ‘쓰는 관점’에서 보게 된다.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쓰는’ 눈으로 살펴보기에 좋다. 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한강의「작별」을 읽다가 나는 먼저 무릎을 친다.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일찍이 카프카는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는 인물을 생각해냈고, 한강은 거리에서 깜빡 졸았는데, 눈사람이 되고 마는 사람을 창조했다. 물론 벌레가 되고 눈사람이 된다는 아이디어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더욱이「작별」은 어찌나 슬픈지. 눈사람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삶, 그 소멸해 가는 삶이, 다가오는 죽음이, 그로인한 세상 모든 것과의 이별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에 더욱 마음을 흔든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로 시작하는「작별」은 아들과 연인을 두고 이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한 여인의 삶이 안타깝고 슬퍼서 처음에는 눈물이 나지만, 그 슬픔의 근원을 헤아리다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눈사람과도 같은 건 아닐까 싶어서 문득 한없이 쓸쓸해진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눈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눈사람’과도 같은 존재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날 문자로 사직 통고를 받은 그녀. 그런데도 그녀는 문자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출근한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뜻밖의 실직 앞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갈 날을 헤아리며 ‘자신의 삶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지 궁금’해한다. 눈사람이 되었을 때나 사람일 때나 똑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다. 오직 그녀 스스로 ‘최악의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한다. 해고당한 뒤 회사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눈 내리는 날 아이들이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 뒤 골목 어귀에 쓸쓸하게 선 채로 곧 잊히고 마는, 그러다 볕이라도 들면 녹아서 사라지고 마는 눈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현수’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그만 둔 뒤 받지 못한 월급을 받기 위해 사장 방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사장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도 현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는 회사에 나타나 ‘마치 낯익은 정물이 된 것처럼 사장의 방 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현수를 지켜보면서 나무늘보의 발톱을 떠올리지만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서, 해고당한 뒤의 그녀처럼 어느 응달진 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눈사람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녹고 말, 곧 소멸해버리고 말 존재들. 겨우내 가까스로 존재하지만 봄이 오면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듯이 마땅히 사라지고 말 존재들.


그녀의 아들은 온기에 녹고 마는 엄마를 위해 냉동고 같은 곳에 들어가면 어떨까 제안한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어쩌면 이미 냉동고와도 같은 게 아닐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주 커다란 냉동고. 그래서 눈사람처럼 곧 사라질 존재들이 겨우겨우 녹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이 세계는 냉동고이므로 눈사람과도 같은 이 냉동고 속 사람들은 하루하루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본다. 


그런 차디찬 곳이므로 이 세계에서 온기는 치명적이다. 따스함을 지닌 사람 또한 그렇다. 다른 이들이 모두 외면한 현수에게 그녀만이 말을 건넨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고, 그 냉정한 세계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온기가 이제는 그녀를 부스러뜨리고 있다. 타인을 껴안는 것도 위험하고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된다. 심장이 세차게 뛸수록 그 언저리가 녹아든다. 따뜻함이, 온기가 그녀 존재의 소멸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따뜻한 사람이 살아남기에 힘든 공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차가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할 뿐이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한파가 필요’할 뿐이다. 


아들을 생각한다면 살아남고 싶기도 하련만, 뜻밖에도 그녀는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게 피곤하다고, 지쳐버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렇듯「작별」은 냉동고와도 같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눈사람처럼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기에 서로 온기를 나누는 일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프카의 <변신>이 노동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면 한강의「작별」은 눈사람처럼 쓸쓸히 소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함께 온기를 나눌수록 살아남기 힘든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전하는 듯하다. 때문에 그저 눈사람이 된 엄마와 아들, 눈사람이 된 연인과 헤어지는 남자. 그들의 작별만을 눈여겨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그칠 수만은 없다. 


권여선의「희박한 마음」과 김혜진의「동네 사람」, 정이현의「언니」도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한국 문학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다룬 퀴어 문학이 여럿 선을 보이고 있다.「희박한 마음」과「동네 사람」에도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단 한 번도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희박한 마음」의 데런과 디엔,「동네 사람」의 ‘나’와 ‘너’는 누가 보기에도 동성커플이다.「동네 사람」에는 그런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과 지나친 호기심이 오싹하고도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폭력은「희박한 마음」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데런과 디엔에게 담배(사실은 그들의 사랑)를 끄라고 명령하는 낯선 남자의 존재가 그러하다. 그와는 조금 다른 종류이기는 하지만 커플 내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심리적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인 그녀들은 다수인 그들에 비해, 또 약자는 강자에 비해 눈사람처럼 서서히 부셔져갈 존재임이 틀림없다. 교수에게 착취당하고 결국 그 이유로 배제당한 채 우두커니 교정 한 구석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인회’(「언니」)의 모습에서도 또 다른 눈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 또한 눈사람일 뿐이야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단지 이 세계가 너무나 가혹하고 차디찬 냉동고이기 때문에 날마다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 걸 모를 뿐이지. 오늘 내가 사는 곳은 어떤 세계인가. 책을 덮을 때는 쓸쓸한 마음이 든다. 이런 세상에서 바스라지지 않으려면 나만의 ‘벙커’가 필요하다. ‘인회’의 엄마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안온하게 숨이라도 쉴 수 있는 작은 공간. 문학은, 그리고 한강의「작별」같은 작품은 이 세계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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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사람이라 상상력이 역시 대단한 한강입니다~

잠자냥 2018-12-30 22:53   좋아요 0 | URL
그렇죠? ㅎㅎ 기회가 되면 언제 읽어보세요..

목나무 2018-12-30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쓰는 눈으로 글을 읽고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한강의 최근 단편 기대가 되네요. 쓰고픈 마음에 불을 지르는 그런 글 많이 만나고싶어요

잠자냥 2018-12-30 23:02   좋아요 1 | URL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좋은 글을 읽다 보면, 기가 팍 꺾이는 단점도 있지요. 하하하. 그래도 계속 읽어야겠죠? ㅎㅎ

목나무 2018-12-30 23:04   좋아요 1 | URL
그럼요. 읽는 이에게 새로운 눈과 의욕이 생겨날지어니. ㅎㅎ
새해에도 좋은글 추천 많이 해주셔야해요. ^.~
 
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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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만큼이나 유명해진 맨부커상. <아름다움의 선>은 2004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이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일간지들은 일제히 그 소식을 대서특필했단다. ‘게이소설이 맨부커상을 수상하다’, ‘영국 게이들의 삶 이야기가 최고의 문학상을 받다’ 등등.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 된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역겨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 게이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읽으면서 역겹다니! 이런 호모포비아적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흥분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역겨움은 주인공인 게이 청년 닉의 사랑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그가 속한 영국 상류층의 속물스러움과 허위와 가식,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했지만 그 속은 저열하기 짝이 없는, 비열한 민낯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데에서 기인한다.

닉은 이제 막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학벌 좋고 집안도 좋은, 상류층 게이의 러브스토리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이 예상과 다르다. 사실, 닉의 집안은 아주 평범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흔해빠진 부모의 흔해빠진 아들’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상류층에 진입했을까? <아름다움의 선>은 상류층에 머물면서도 거기에 속하지 않은 주인공 ‘닉’의 부유하는 듯한, 겉돌 수밖에 없는 위치와 시선이 작품을 밀도 있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닉이 만일 완벽한 상류층이었다면 이 작품은 영국 상류사회의 위선과 허위, 가식을 그토록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파헤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쯤 깊이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그 일원은 될 수 없는, 되고 싶어도 절대 될 수 없는 위치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를 둔 관찰자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

마거릿 대처가 재집권에 성공한 1983년 여름, 옥스퍼드를 졸업한 닉 게스트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그의 옥스퍼드 동기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토비 페든의 집에 ‘게스트’로 머물게 된다. 친구 집에서 하숙을 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하필이면 이 친구 집이 정계와 재계 인사들이 안방처럼 드나드는 그야말로 상류층 집안인 것이다. 노팅힐의 부유한 저택에 사는 토비의 아버지 제럴드는 전도유망한 보수당 초선의원이며, 어머니 레이철은 부유한 은행가 가문 출신이다. 이 집안의 한 가지 골칫거리라면 조울증을 앓고 있는 토비의 여동생 캐서린 정도랄까. 그런 집안에서 네 집처럼 생각하라면서 덜커덕 방 한 칸을 닉에게 내준 것이다.

남몰래 짝사랑해온 토비와 한집에 산다니! 그것만으로도 황홀할 텐데,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이 닉에게 덤으로 주어진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류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회에 젖어 들어가게 된다. 토비의 가족은 너그럽고도 자연스러운 태도로 닉을 친구이자 가족처럼 흔쾌히 받아들인다. 제럴드나 레이철, 토비가 집을 비울 때는 닉이 캐서린의 보호자겸 친구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캐서린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닉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 그가 블라인드 데이트를 나가기 전에 상대의 사진과 편지를 보여주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정도로 닉의 성적기호 앞에 그녀는 허물이 없다.

1983년 대처 시절이 호황기를 누리듯, 닉의 인생 또한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는 페든 가의 일원으로 상류층 인사들의 파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그들처럼’ 지내고, 토비를 비롯해 남몰래 동경하던 옥스퍼드 동기들과 친밀하게 교류한다. 또 그 해에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 ‘리오’도 만난다. 그들은 만난 첫날부터 섹스를 한다. 둘이 마땅히 사랑을 나눌 공간이 없기에 공원 한구석에서 말이다.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는 닉과 리오.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리오의 집은 철저하게 호모포비아적인 어머니가 두 눈 부릅뜨고 계시며, 닉은 방 한 칸을 빌려 쓰고 있는 하숙생일 뿐이다. 어찌하랴? 뜻밖에도 이 관대하시며 한없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신 페든 가의 제럴드와 레이철은 닉의 연애 상대가 남자, 그것도 흑인이라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집으로 언제든 데리고 와도 좋다고 허락하신다. 오, 놀라워라!

그 전까지 닉은 자신의 정체성을 들킬까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했다. 소년 남창과 재규어에 있던 걸 들켜서 사임한 외무부 차관의 스캔들을 페든 가 일원을 비롯해 상류층 사람들이 화제 삼아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스스로를 의식하며 마치 재규어에서 발각된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듯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동성애가 화제에 오르면 종종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페든 집안의 너그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무심히 나왔을지 모르는 말-그냥 감수하면 되는 간접적인 모욕이나 그저 그렇게 웃어넘길 만한 농담’에도 그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그 때문에 닉은 때때로 외로웠으며 자신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런데 이제, 연인을 집에 데려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리오가 거침없이 닉을 찾는 전화를 걸었을 때 제럴드는 순간적으로 ‘동성애자 사이의 실제 통화를 마주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곧 다정하게 전화를 바꾸어줬으며, 레이철은 또 레이철대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은 여기가 닉의 집”이라면서 언제든 리오를 초대하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럴드의 식구들이 집을 비우던 날 드디어, 마침내 닉은 리오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때 리오는 문 앞에서 서성이며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집에 동성애자가 있어도 상관없는 건가? 저 귀족 분들 말이야.”
“물론 전혀.” 닉이 말했다. “절대로 괜찮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대놓고 말만 안하면’이라고 캐서린이 단서를 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느 정도 과장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도 동성애자 친구들 많아. 사실 너를 데려와도 좋다고 하던걸, 달링.”
“아.” 리오가 레이철에 버금갈 미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움의 선>, 243쪽)


리오는 그렇게 닉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집은 절대로 아닌, 그의 방으로 들어서고 그날 그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1983년의 어느 밤이 저물어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1986년과 1987년으로 이어진다. 닉 게스트는 레이철이 말했듯이 페든 가를 그의 집처럼 여기면서 실제 가족의 한 사람처럼 1986년과 87년에도 행복하게 잘 살아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1986년의 닉은 한층 더 상류사회에 젖어 들어있다. 가난한 유색인 애인 리오가 아닌 레바논 출신 부유한 사업가의 귀염둥이 외아들 와니로 갈아탔고, 그가 주는 물질적, 성적 쾌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1986년의 닉 게스트는 그야 말로 성(性)과 코카인, 돈이 주는 안락함에서 비롯된 방종과 탕진으로 이어진 삶을 살아간다.

<아름다움의 선>은 1983년과 1986년, 1, 2부로 나뉜 이야기들이 너무 섬세하고 길게 이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다. 무분별한 성적 난교와 상류층의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속물적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걸까? 가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1987년, 3부를 위해 마련된 장치였음을 곧 알게 된다. 그렇게 써졌어야만 했다. 1,2부의 이야기들이 촘촘히 모아져서 3부에서 드디어 폭발하는데, 가히 탄성을 자아낼 정도이다. 그러니 만일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1,2부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꾹 참고 읽어나가시라. 그리하면 마침내 3부에서 보상을 받게 될 터이니.

그렇다고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이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부자도 아닌, 그렇다고 외부자도 아닌 닉 게스트의 어정쩡하지만 관찰자일 수밖에 없는 시선으로 그려지는 상류층 이야기들은 진저리가 날만큼 사실적이며, 닉의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 그 틈바구니에서 묘사되는 그 자신의 정체성의 혼돈, 게이라는 정체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 뜻밖의 커밍아웃과 얼마쯤의 안도감, 상대 때문에 숨겨야만 하는 사랑과 연애,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아마도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가 게이로 살면서 느끼고 겪었을 일들이 고스란히 닉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안 해도 되면 좋겠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한 사람에게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와니가 말했다. “그냥 <텔레그래프>에 전면 광고를 하고 말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렇게 함께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한 번도 동성애자가 아닌 척한 적 없어. 그러고 있는 건 너지. 지금은 1986년이야. 세상이 달라졌다고.”
“그래, 동성애자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지.” (<아름다움의 선>, 347쪽)


공포는 마약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수상하게 가까워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이 잠겼다는 사실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특히 의심스러운 일이었고. (<아름다움의 선>, 349쪽)


닉 게스트는 ‘그들’의 말처럼 정말로 진짜 가족을 가질 수 없었기에 제럴드 가족에게 ‘기생’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애초에 하숙생 신분으로 그 안락한 삶에 ‘기생’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1983년의 닉, 리오를 사랑하던 그는 그래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는 페든 가와 거리를 둘 줄 알아 보였다. 그러나 1986년의 닉은 완전히 그 사회에 젖어들어 그들과 함께 거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데, 비극은 ‘그들’은 결코 닉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과 달리 ‘아름다움의 선’을 제대로 보고 음미할 줄 아는 그였지만, 그 재능을 자기 스스로 갉아먹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아름다운 한 시대는 저물어 가고, 이제 그의 앞에 놓인 삶은 ‘현실’ 그 자체이다. 그는 어쨌든 앞으로 살아남아야 할 터이고, 페든 가에서의 한 시절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든 쓰디쓴 약, 성장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길모퉁이도 눈여겨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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