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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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청춘을 호명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이십대가 아닌, 서른을 넘긴 나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주로 떠올리는 청춘의 기억은 설익고 치기어린, 그렇지만 그래서 뜨거웠을 어느 한 시기일 것이다. 때문에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오고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무렵을 떠올리느라 밤잠을 설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H전집’에 얽힌 ‘그들’의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의 20대, 정확히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제목으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라는 말. 그 앞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생략되었으리라. 그런데 어떤 말이 생략되었을지는 감으로 헤아릴 수 있다. 어리석고 치기어리고 부족하고 미숙하고 실수투성이에 엉터리 같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었고, ‘그래도’ 청춘이었다는.

헌책방에서 H전집을 발견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후미오. 후미오의 약혼녀인 세쓰코는 그 책에 찍혀 있는 옛 소유자의 장서인이 낯익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그 책은 세쓰코가 대학 때 알고 지낸, 도쿄대 역사연구회 회원이었던 사노의 것이었다. 후미오는 세쓰코의 부탁으로 사노의 행적을 좇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후미오와 세쓰코, 거기에 사노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이 책을 읽노라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미오나 세쓰코보다 사노가 더 깊이 인상에 남는다. 사노의 절박함과 절망이 담긴 편지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사노는 한때 지하 군사조직에 참가할 정도로 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렇지만 1955년 무장투쟁을 지향하던 일본 공산당이 이른바 ‘육전협(제6회 전국협의회) 결의’ 이후 평화혁명으로 노선을 바꾸자, 학교로 돌아와 정치투쟁과 선을 그은 채 평범한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겉보기엔 육전협이 노선을 바꿈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 그가 그토록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더더욱 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배신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배신은 치명적이어서 그는 학생운동에 뜨겁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소시민성과 그걸 비판하는 양심 사이의 모순’을 겪으면서 그저 조용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사노의 모습에서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전혀 낯선 풍경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운동권 끝자락이 존재해서 나보다 학번이 훨씬 높은 선배들 가운데는 여전히 거리 투쟁을 벌이고, 그 때문에 수배를 받고 학교에서 숨어 지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사노처럼 마르크시즘에 열렬히 경도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선배가 그랬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 또한 몇 번은 거리에 서기도 했는데, 그것조차 나는 곧 시들해져서, 그들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그 세계를 떠났다. 그때 그 선배는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그 또한 언젠가는 그 세계를 떠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학창 시절의 운동은 홍역 같은 거야. 시간이 지나 취직하면…….” 하는 말을 한다. 지금은 대기업에 적을 둔 나는 겉으로 보기에 아마 전형적인 인물이겠지.(<그래도 우리의 나날>, 70쪽)


이 구절을 읽는데,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노처럼 소시민으로 살면서 주말에는 명동, 광화문, 종로, 대학로 등지에서 쇼핑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면서 살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나는 어느 날 그 선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그는 을지로, 광화문, 종로, 대학로에서 여전히 그 누군가를 위해 ‘투쟁’중이었다. 어느 해 5월 1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명동 거리를 걷다가 노동절 시위 무리에 있는 그 선배를 보기도 했고, 용산 참사 진실 규명을 외치는 시위 무리에서도 그를 보았으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그를 보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시위할 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때조차도 시위 현장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몇 년에 한번쯤은 그런 그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렸구나. 그는 여전하구나. 그를 우연히 마주친 날이면 이렇게 평범하게 소시민적으로 사는 내가 비겁해 보이고, 한심스러웠다. 그는 어떻게 그런 삶이 여전히 가능한 걸까? ‘혁명가이고 싶었지만 혁명가가 되지 못한 사노’와 달리 그 선배는 지금도 생활 속 작은 혁명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선배는 죽는 순간에 떠올릴 만한 확실한 ‘어떤 것’을 가졌으리라.

H전집의 옛 주인인 사노의 편지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라는 엄청나고도 무서운 질문을 평범하게 살아가던 후미오와 세쓰코에게 던진다. 이 책을 읽는 이들도 이 질문을 마주하고 문득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벼운 충격 같은 것을 느끼리라. 세쓰코는 자신이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갖고 있을 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약혼한 사이지만 후미오와의 생활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生)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해한다. 그런 세쓰코를 지켜보는 후미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과 죽음이 있다. (...) 나는 머잖아 어학 강사가 되어 강사로 살고, 두세 권의 역서라도 내서 잠깐 행복해지다, 끝내는 어학 강사로 늙어가려고 마음먹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이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 99쪽)


후미오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노의 편지가 불러온 파문은 그리 잔잔하지만은 않다. 세쓰코는 세쓰코대로, 후미오는 후미오대로 저마다 과거를 환기하고, 자기가 지금 밟고 선 세계를 되돌아본다. 이런 현상은 세쓰코 쪽이 한층 심하다. 그녀는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아? 죽을 때 아무것도 떠올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죽는다는 건 외로운 일이야. 하지만 외롭다는 것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일이 무(無)가 되어버리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야.” 말하며 자신의 공허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쓰려고 한다.

그에 비해 후미오는 과거를 돌아보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을 크게 조정하지는 않는다. 진폭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후미오는 사노나 세쓰코, 또 세쓰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노세 등 다른 인물에 비해 너무나도 덤덤하고 관조적인,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늙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도 그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걸까? 후미오에게는 조금 반감이 들기도 한다. 사노나 노세, 세쓰코에게는 ‘그래도’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시절이 있는데, 후미오에게는 딱히 그럴 만한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공허함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닐까.

후미오의 그런 모습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세쓰코나 유코)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주변에 여자는 넘쳐나고 후미오는 아쉬울 것 없이 여자를 만나고 떠나보낸다. 세쓰코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애초부터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후미오는 하루키 작품에서 곧잘 등장하는, 아닌 척 하지만 실은 왕자병 기질의 남주인공(<상실의 시대> ‘와타나베’ 같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가 유코와 세쓰코를 대하는 방식에는 전형적인 여성의 대상화가 엿보이는데, 특히 유코, 세쓰코와 처음으로 섹스를 나누게 되는 순간의 묘사나 그때 그녀들의 심리 상태 등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F교수가 가즈코에게 하는 짓거리 또한 그렇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닐걸? 하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결점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이 작품에서 남자들은 사노를 비롯해 노세는 물론 사노가 ‘자신의 또 다른 눈’이라고 지칭한 소네 등 모두 하나 같이 젊은 날 어떤 이상이나 사상에 경도되어 거기에 열정적으로 빠지거나 그런 상황 속의 자기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세쓰코나 유코, 가즈코 같은 여자들은 어떤가. 그저 그녀들이 한다는 일은 그런 남자들을 지켜보며 ‘사랑’에 빠지거나 그들의 열정에 감동해 그 열정을 좇을 뿐이다. 스물 한 살 유코에게 가장 절실한 고민이 고작 그 나이에도 ‘남자에게 안기거나 키스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을 ‘추하다고’ 여기는 일이라니, 실소가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남자에게는 ‘인생 소설’이 될 수는 있어도 여자에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현실에 머무는 후미오에 비해 자기 삶을 바꾸고자 용감하게 결단을 내린 세쓰코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이와 같은 결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도’ 이 작품은 지금 한 순간,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착각으로 지탱된 날들’일지라도 ‘거기에는 인생과 미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기쁨과 관능에 넘쳤던 날들을 떠올리는 세쓰코의 기억에서 우리가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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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활 속 작은 혁명가인 그런 선배가 있기에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걸어볼 비빌 언덕을 찾게 되는 건 아닐까 싶네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게 되는 책인데 이참에 저도 펼쳐봐야겠어요. ^^
잠자냥님 덕분에 <어느 하루>도 도서관에서 대여해왔는데 이걸 다 언제 읽을지....ㅋㅋㅋㅋ

잠자냥 2019-01-05 17: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렇게 쌓여가는 거죠. ㅋㅋㅋㅋㅋ

케이 2019-01-07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이 소설 제가 너무 싫어하는 일본 남자 작가들의 여자 묘사가 있을 거 같아서 읽기 싫어지네요. 모든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또 떠날때는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떠나주는 일본 소설 속 무수한 여자 주인공들에 대해 읽는 거 너무 싫었거든요. (대부분 또 얼굴도 예쁨 ㅋㅋ)
가만 보면 이 정도면 절대 존엄이다 생각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그려졌던 거 같아요. 남자처럼 분노하고 질투하고 주도적이고, 어쩌면 남자보다 더 강한 면도 가지고 있는.
역시 아무나 대단한 소설가 되는 거 아니란 생각 다시 하게 됩니다.

잠자냥 2019-01-07 14: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거랍니다!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하루키 작품이 거의 그렇잖아요? 근데 이 작품 남주인공이 어떤 면에서는 하루키 작품 남주인공스럽다능. ㅋㅋ 가끔 보면 몇몇 일본 남자작가들은 현실에서 자기가 못 이룬 꿈을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나 싶기도 해요. 이 작품은 좀 애매하네요.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뭐한...

케이 2019-01-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이가 자기 열등감이나 한없이 찌질한 모습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쓰면 오히려 작가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글쓴이가 자기 글을 통해 대리만족하거나 멋져 보이고 싶어하는 게 은연중 보이면 오히려 글쓴이가 참 딱하게 느껴지니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자신의 은밀하고 추한 모습까지 다 고백한 작가의 용기에 더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잠자냥님!

잠자냥 2019-01-07 16: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늘도 케이 님 댓글에서 여러 가지 배웁니다.
케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