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고, 쓰고 싶어지니 책을 읽을 때 ‘쓰는 관점’에서 보게 된다.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쓰는’ 눈으로 살펴보기에 좋다. 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한강의「작별」을 읽다가 나는 먼저 무릎을 친다.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일찍이 카프카는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는 인물을 생각해냈고, 한강은 거리에서 깜빡 졸았는데, 눈사람이 되고 마는 사람을 창조했다. 물론 벌레가 되고 눈사람이 된다는 아이디어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더욱이「작별」은 어찌나 슬픈지. 눈사람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삶, 그 소멸해 가는 삶이, 다가오는 죽음이, 그로인한 세상 모든 것과의 이별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에 더욱 마음을 흔든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로 시작하는「작별」은 아들과 연인을 두고 이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한 여인의 삶이 안타깝고 슬퍼서 처음에는 눈물이 나지만, 그 슬픔의 근원을 헤아리다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눈사람과도 같은 건 아닐까 싶어서 문득 한없이 쓸쓸해진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눈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눈사람’과도 같은 존재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날 문자로 사직 통고를 받은 그녀. 그런데도 그녀는 문자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출근한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뜻밖의 실직 앞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갈 날을 헤아리며 ‘자신의 삶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지 궁금’해한다. 눈사람이 되었을 때나 사람일 때나 똑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다. 오직 그녀 스스로 ‘최악의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한다. 해고당한 뒤 회사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눈 내리는 날 아이들이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 뒤 골목 어귀에 쓸쓸하게 선 채로 곧 잊히고 마는, 그러다 볕이라도 들면 녹아서 사라지고 마는 눈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현수’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그만 둔 뒤 받지 못한 월급을 받기 위해 사장 방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사장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도 현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는 회사에 나타나 ‘마치 낯익은 정물이 된 것처럼 사장의 방 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현수를 지켜보면서 나무늘보의 발톱을 떠올리지만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서, 해고당한 뒤의 그녀처럼 어느 응달진 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눈사람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녹고 말, 곧 소멸해버리고 말 존재들. 겨우내 가까스로 존재하지만 봄이 오면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듯이 마땅히 사라지고 말 존재들.
그녀의 아들은 온기에 녹고 마는 엄마를 위해 냉동고 같은 곳에 들어가면 어떨까 제안한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어쩌면 이미 냉동고와도 같은 게 아닐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주 커다란 냉동고. 그래서 눈사람처럼 곧 사라질 존재들이 겨우겨우 녹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이 세계는 냉동고이므로 눈사람과도 같은 이 냉동고 속 사람들은 하루하루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본다.
그런 차디찬 곳이므로 이 세계에서 온기는 치명적이다. 따스함을 지닌 사람 또한 그렇다. 다른 이들이 모두 외면한 현수에게 그녀만이 말을 건넨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고, 그 냉정한 세계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온기가 이제는 그녀를 부스러뜨리고 있다. 타인을 껴안는 것도 위험하고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된다. 심장이 세차게 뛸수록 그 언저리가 녹아든다. 따뜻함이, 온기가 그녀 존재의 소멸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따뜻한 사람이 살아남기에 힘든 공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차가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할 뿐이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한파가 필요’할 뿐이다.
아들을 생각한다면 살아남고 싶기도 하련만, 뜻밖에도 그녀는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게 피곤하다고, 지쳐버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렇듯「작별」은 냉동고와도 같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눈사람처럼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기에 서로 온기를 나누는 일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프카의 <변신>이 노동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면 한강의「작별」은 눈사람처럼 쓸쓸히 소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함께 온기를 나눌수록 살아남기 힘든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전하는 듯하다. 때문에 그저 눈사람이 된 엄마와 아들, 눈사람이 된 연인과 헤어지는 남자. 그들의 작별만을 눈여겨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그칠 수만은 없다.
권여선의「희박한 마음」과 김혜진의「동네 사람」, 정이현의「언니」도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한국 문학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다룬 퀴어 문학이 여럿 선을 보이고 있다.「희박한 마음」과「동네 사람」에도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단 한 번도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희박한 마음」의 데런과 디엔,「동네 사람」의 ‘나’와 ‘너’는 누가 보기에도 동성커플이다.「동네 사람」에는 그런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과 지나친 호기심이 오싹하고도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폭력은「희박한 마음」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데런과 디엔에게 담배(사실은 그들의 사랑)를 끄라고 명령하는 낯선 남자의 존재가 그러하다. 그와는 조금 다른 종류이기는 하지만 커플 내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심리적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인 그녀들은 다수인 그들에 비해, 또 약자는 강자에 비해 눈사람처럼 서서히 부셔져갈 존재임이 틀림없다. 교수에게 착취당하고 결국 그 이유로 배제당한 채 우두커니 교정 한 구석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인회’(「언니」)의 모습에서도 또 다른 눈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 또한 눈사람일 뿐이야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단지 이 세계가 너무나 가혹하고 차디찬 냉동고이기 때문에 날마다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 걸 모를 뿐이지. 오늘 내가 사는 곳은 어떤 세계인가. 책을 덮을 때는 쓸쓸한 마음이 든다. 이런 세상에서 바스라지지 않으려면 나만의 ‘벙커’가 필요하다. ‘인회’의 엄마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안온하게 숨이라도 쉴 수 있는 작은 공간. 문학은, 그리고 한강의「작별」같은 작품은 이 세계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