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바로 이게 내게 닥친 불행입니다” 사랑이 불행일 수도 있음을 아는 이들에게 투르게네프의 이 문장은 치명적이다. 사랑과 연애 또는 결혼….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항목처럼 따라다니는 조항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행복이 솟구치기는커녕 불행과 절망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기도 한다. 물론 행복이 치솟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또는 자신의 사랑이 응답받는 순간 등등. 그렇지만 서로 다른 두 존재의 마음이 늘 같은 크기이거나 같은 깊이일 수는 없으므로 그 마음의 크기가 어긋나는 순간부터 고통과 불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더는 같은 곳을 바라보거나 꼭 같지는 않더라도 도무지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 버리면 함께 하던 두 존재는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한때 찬란히 빛나던 사랑은 이제 지옥을 헤맬 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여기 러시아에도 그런 청년이 있다. ‘그리고리 리트비노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 러시아의 귀족들이 하릴없이 여유로움 또는 잉여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모여든 휴양지 바덴, 리트비노프는 이곳에서 약혼녀 타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곳 사교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리트비노프. 그럼에도 그는 귀족과 지식인들이 모여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뜨겁게 토론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는 한다. 왜냐하면 그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러시아의 새 질서에 적응하며 타냐와 결혼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 앞에 이 바덴에서 갑자기 “길가의 가벼운 먼지를 흩어버리듯” “그 모든 목적과 계획을 날려버린 사건”(p.71)이 일어나고 만다. 인생, 참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덴의 사교계에서 얼핏 본 한 여자. 그 여자의 뒷모습이 너무나 그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설마…. 그러나 설마는 빗나가지 않는다. 그 여자는 바로 한때 리트비노프를 열망에 들떠, 환희에 젖어, 사랑에 빠져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던, 행복의 절정에 이르게 해주었던 여자, 리트비노프의 첫사랑 ‘이리나’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생 시절 너무나 사랑했던 이름 ‘이리나’- 그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한 생애에서 되풀이될 수 없고, 또 되풀이되어서도 안 되는 수난”과 같은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이곳 바덴에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고, 리트비노프는 다른 여자, 그러니까 타냐라는 이름의 다른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리나도 리트비노프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리트비노프를 차갑게 대하던 그 여자, 이리나- 타고난 밀당의 재주꾼인 그녀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리트비노프를 쥐락펴락 괴롭히더니 어느 날 마음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둘 사이에는 불길이 확 타오르듯, 뇌우가 몰려오듯 사랑이 덮친다. 달콤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곧 결혼을 약속한다. 이리나는 섬세하면서도 연약한 리트비노프를 쥐락펴락. 자신을 향한 사랑의 노예로 만든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결혼하여 쑥쑥 애도 여럿 낳고 살아가는 게 행복(?)한 결말일 텐데, 어쩌다가 바덴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곁에 둔 채 재회하게 되었을까.
배신- 두 마음이 같은 곳을 바라보다 한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그들 사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배신당한 처지였던 리트비노프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이리나를 미워했다. 증오했다. 이제 겨우 그 상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데 다시 그녀, 자신을 절망으로 추락시켰던 그 여자가 나타나다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정상적인 사고의 회로를 따른다면 리트비노프는 그녀를 외면해야 했다. 이리나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리트비노프를 외면했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사랑이 하는 일일까? 운명의 장난일까? 이리나가 리트비노프에게 손짓을 한다. 예전처럼 그를 다시 쥐락펴락해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배신에 대해 사과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이리나의 이름은 리트비노프에게는 불가항력이다. 그는 이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도무지 저항할 수가 없다. 다시 그녀를 만나고는 예전처럼 강렬한, 예전보다 더 강력한 사랑을 느낀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사람이니 어찌 그 사랑이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으랴. 그렇지만 예전과 다른 점들이 있다. 리트비노프는 전처럼 자유롭게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그를 만나러 저 멀리서 약혼녀가 오고 있는 중이다. 이리나 또한 다른 남자의 아내가 아닌가. 어쩌면 이 장벽들이 그들의 사랑을 더 불타오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성이 선량하고 연약한 리트비노프는 괴롭기 짝이 없다. 사랑스러운 타냐, 아무것도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약혼자에게 달려오고 있을 타냐를 어이할까!
행복이 아닌 고통과 괴로움이 솟구친다. 그는 자신이 못마땅하다. 룰렛 게임에서 돈을 잃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기분이다. 자신을 달래보기도 한다. 너는 타냐의 약혼자이다, 너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진중한 어른으로서 호기심의 부추김이나 추억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내면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를 다그친다. 이리나는 예전처럼 교태를 부리는 것일 뿐이야. 일시적인 기분이고 변덕일 뿐이야…. 결혼한 삶이 따분하고 모든 것에 싫증이 나서 날 낚아챈 거야, 미식가가 갑자기 흑빵이 먹고 싶은 거지. 아무리 자신을 달래고 다그쳐보아도 그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기를 멈추지 못한다. 도무지 그녀를 경멸하고 미워할 수가 없다. 한때 자신을 그토록 절망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던 그 나쁜 여자를. 리트비노프는 머릿속에서 이리나의 형상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이제 그는 타냐의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그를 설득하는 이도 있다. 그 여자는 악마처럼 교만하다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진실할 수도 있지만 사교계 부인들은 아무리 훌륭하다 칭송받아도 뼛속까지 썩었다고. 물론 이리나에게도 좋은 자질, 이를테면 무척 선하고 선심을 잘 쓰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고, 그렇지만 그녀가 베푸는 선심이란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남들에게 줘버리는”(p.145) 수준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당신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자는 강하며 우연은 전능”하기 때문에 “단조로운 삶에 만족하기는 어렵고, 자신을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 아름다움과 공감이 있고 따스함과 빛”이 있으니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느냐고 . 그렇지만 그 빛을 향해 달려가 보았자 “그다음에 냉담, 어둠, 공허가 찾아”올 것이라고. “결국엔 모든 것과 멀어지게 되고,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처음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테고, 나중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p.146) 것이라고.
리트비노프는 그렇게 이리나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위로도 희망도 없는 환희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찢어놓는다. 불면의 밤이 깊어간다. 그는 중얼거린다. “비록 나중에 죽는다 할지라도” ‘필시 사랑을 두 번 할 수는 없다’ 그는 생각한다. ‘다른 삶이 네 안에 들어왔고, 네가 그것을 들여보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 끈을 끊을 수 없다.'(p.177)고 생각한다. 스스로 독이라고 칭하는 사랑, 그 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랑.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타냐에게로 가는 삶과 이리나에게로 가는 삶이 얼마나 다를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옳고 잘 정리된 미래를 스스로 놓아버린 패배자이다. 그는 심연 속으로 자신이 무턱대고 뛰어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절규한다. 자기 자신도, 타냐도 잃어버렸노라 절규한다. 모든 것이 망가졌노라고,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노라고, 거기로 당신을 끌고 가고 싶지 않다고, 나를 구해달라고 타냐에게 울부짖기도 한다. 이전의 모든 것, 소중했던 모든 것, 지금껏 그가 의지하고 살아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노라,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끊어졌노라 절망한다. “무섭고 저항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이 급류처럼” 자신을 덮쳤노라(p.215) 울먹이는 리트비노프.
그는 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어스름 속에서 그만 헤매고 싶다. 그처럼 순진하거나 적극적인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투르게네프는 말한다. “열정은 그들의 삶의 의미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p.217) 그렇지만 리트비노프가 다시 찾은 사랑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리나가 그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도, 그렇게 운명이 그를 이끈 이유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불가항력적으로 또 한 번 첫사랑 여인과 사랑에 빠진 리트비노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투르게네프는 말한다. 모든 선택에는 어떤 의미로든 불행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다. 모든 것이 급히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풍향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똑같이 지칠 줄 모르는,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가 다시 시작된다.”(p.259) 사랑도 어쩌면 이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덧없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