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서나 사람들은 만난다. 중요한 것은 늘 일어나는 이런 만남들 이후에 이어지는 일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p.9)
사강의 <엎드리는 개>는 처음에는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장 우그롱의 소설을 영화화하려다 이를 거절당하자 그 작품의 모티프들을 기반으로 사강이 새롭게 써낸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노라면 영화를 보듯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중에는 작품 제목이기도 한 ‘엎드리는 개 le chien couchant’의 이미지도 있다.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개는 주인에게 복종적이다. 복종의 의미로 엎드리기도 하고 배를 뒤집어 보이기도 한다. 고양이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자세이다. 그렇게 복종했을 때 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행위에 따르는 여러 형태의 보상일 것이다. 그 보상은 먹을 것일 수도 있고 칭찬이나 관심, 애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행동에 주인이 만족스러워하면서 개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해주면 개는 그다음부터 이 자세를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다. 또 한 번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이 작품의 주인공 ‘게레’는 그 엎드리는 개의 이미지와 닮았다. 그런데 그 개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래서 조금은 거만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떠돌이 개라고나 해야 할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러므로 관심도 따스한 눈길도 애정도 받아본 적 없는 떠돌이 개. 그런 개와 닮았다. 애정과 관심은커녕 발길질에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개일수록 그게 누구든 인간의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되면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 사람에게 계속 다가가 기꺼이 복종한다. 제 스스로 주인으로 삼기로 선택한 자의 시선을 살피며,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언제든 기회를 엿본다. 애정을, 사랑을, 보상을 받을 그때를. 그런데 그 시선이 사라진다면, 시선을 주는 자의 손길이 사라진다면 이 개는 견딜 수 있을까? 아니면 곧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날까? <엎드리는 개>는 복종하는 개의 이미지를 빌려와 사랑의 속성-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에는 존재하기 마련인 ‘시선’과 그 시선이 사라졌을 때의 고통을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어느 소도시의 탄광회사 회계과에 근무하는 스물일곱의 청년 게레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보다 더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집안도 자라온 환경도 평범하다 못해 비루하기 짝이 없고 성격 또한 소심하기 짝이 없어서 회사에서도 종종 상사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비굴하게 응수할 수밖에 없는 꽤 답답한 인간이다. 헌데 이런 그에게도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우연히 엄청난 고가의 보석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후미진 곳에 버려진 보석이 틀림없는데도 이 소심한 청년은 누가 볼까 두려워 여러 번 망설이다 겨우 이 보석을 하숙집으로 가져오고, 이 보석으로 무엇을 할까 꿈에 부푼다. 이제 나는 부자다!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런 보석이 그냥 우연히 길거리에 떨어져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알고 보니 이 보석은 살인 사건과 관련된 장물이었다.
이 사실을 안 순간부터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 게레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누가 나를 살인자로 보지는 않을까, 나는 단지 보석을 주웠을 뿐인데.... 하숙집 주인인 비롱 부인, 그러니까 저 늙은 마리아가 내 방을 뒤져서 보석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한다. 그런데 사태는 뜻밖으로 흐른다. 비롱 부인, 그러니까 이제 쉰을 다 넘긴 마리아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해진 것이다. 그렇다. 저 여자는 알고 있다. 내 보석을, 내 보석의 존재를.... 어떡하지? 나는 살인자가 아닌데 살인자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저 여자는 왜 나를 전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저 여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나를 주목하는 눈길이, 어쩐지 나를 강한 남자처럼 쳐다보는 저 시선이 싫지 않다...... 왠지 저 여자의 눈길에 전에 없던 자신감이 생겨난다. 왜일까.
게레는 마리아가 자신의 보석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그녀의 입을 막을 생각으로 함께 잠자리를 갖는다. 자신을 경찰에 고발할지도 모를 여자와 한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은 게레에게 씻을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이 늙은 여자, 엄마뻘인 하숙집 주인에게 철저히 사로잡히는 형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참 기묘하다. 전에 없던 활력이 샘솟는다. 보석으로 부자가 될 것이기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마리아의 저 시선, 시선 때문일까? 게레는 마리아가 자신을 강한 남자로 보게 되자 전과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도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또래 여자들조차 게레를 달리 인식한다. 어쩐지 멋있어 보이고 어쩐지 잘생겨 보이고 어쩐지 자신감 넘치는 게레는 주변 인물들에게도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헌데 마리아는 대체 왜 그를 전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일까? 단지 그의 보석이 탐이 나서? 보석의 지분을 차지하려고?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작품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만들 의도를 가진 적이 없다 해도, 우리 운명을 가로질렀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모든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우리 속에 만들어낸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 Le Desert de l’amour> p.68)
게레는 마리아의 시선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 무심한 눈빛, 어찌 보면 차갑다고도 할 수 있는 눈빛 안에서만 머물고 싶다. 그 시선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나이랑 외모가 다인 세상’에서 이 젊은 청년은 쉰을 넘긴 과묵하고 무뚝뚝한 마리아에게 푹 빠져서는 헤어 나올 줄 모른다. 아무리 소심해서 못난 남자라고 해도 게레 그가 마리아보다 훨씬 더 젊다. 외모도 더 낫다. 그러나 이런 특권, 이런 우위는 ‘마리아의 시선이 떠나는 순간, 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온 세상이 젊고 아름다운, 쾌활하고 햇볕에 잘 그을린 육체를 지닌 부유한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게레의 머릿속에는 마리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뜨거운 육체, 충격받은 듯 외면하는 얼굴, 퉁명스럽고 귀찮아하면서도 결국엔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 서두르라고 닦달하는, 그러나 실제론 그의 오랜 외로움과 불안, 의심의 날들을 종식시킨 그 목소리’ 안에서만 게레는 자신이 고독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깨닫는다. 제 또래인 니콜은 게레를 ‘자기’, ‘서방님’, ‘귀염둥이’ 등등의 바보 같은 애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예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마리아만이 자신을 웃게 만들어주기에 그녀의 안개처럼 희미한 시선에만 매달린다. 이 나쁜 여자를 향해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잠 못 들게 하고, 사흘 밤낮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던 이 나쁜 년을 향해서…. 아무리 나쁜 주인이라도 늘 엎드려 복종하기를 멈추지 않는 개의 모습과도 같다.
누군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와 함께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어져. 그리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전망이 불투명해지면 불안과 욕구불만에 빠지게 되지. (<사랑의 사막>, p.137)
“사랑에 빠지면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면 난 화가 나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지요. 오늘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은 끔찍하게도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요.” (<사랑의 사막>, pp.221~222)
마리아의 시선, 게레를 다시 태어나게 했던 그 시선은 영원히 게레를 향해 머무를 수 있을까? 또 게레는 그 시선이 영원히 자기만 바라보기를 희망할까? 그러나 그 어떤 사랑도 한 번 피어난 시선이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거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엎드리는 개>는 그 사랑의 속성을 처절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