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킨스 프리먼의 단편집 《뉴잉글랜드 수녀》에서는 표제작인 ‘뉴잉글랜드 수녀’ 못지않게 좋은 작품을 여럿 읽을 수 있었다. ‘뉴잉글랜드 수녀’는 다시 읽어도 그 혼자만의 고즈넉한 삶, 정갈한 삶을 선택한 루이자의 선택에 흐뭇해진다. 루이자처럼 혼자 있기를 선택하거나 또는 연인이 있든, 결혼을 했든 나이가 많든 어리든 중년이든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단편집에서 이번에 읽으면서 완전히 반한 작품은 ‘노파 마군(Old Woman Magoun)’이다. 이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끝을 알지 못해서 아, 성질 괴팍한 할머니랑 착한 손녀가 외진 산골에서 서로 의지해 살아가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뭔가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아아아........ 나는 이 작품 마지막에 약간 눈물을 찔끔 흘렸다. 지금도 마음이 너무 서늘하다....... 그러고 나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은 더 읽었다. 읽을수록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앞서 이야기했듯, 늙은 마군은 손녀딸 릴리와 함께 아주 작은 마을인 배리스 포드에서 살고 있다. 배리스 포드는 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이 마을 초입에는 물살이 거칠어도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볼품없기는 하지만 이 강을 건널 다리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이 늙은 여인 마군이다. 노파는 위스키나 담배 등을 파는 작은 식료품 잡화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서 그녀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사내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아 잔소리를 늘어놓곤 한다. “저 다리는 올여름에는 꼭 놓아야 해.”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남자였다면 말이야. 지금 바로 나가서 가장 먼저 통나무를 놓겠어. 내가 아무리 빈둥빈둥 게으름 피는 남자들 무리에 있더라도 난 평생 한번은 뭐라도 시작해 봤을 거야“ ”저놈들은 꼭 그래야만 기운을 차릴 수 있는지, 술을 마시고 담배를 씹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단 말이야” 잔소리를 해댄다. 노파의 지적대로 이 마을 남자들은 대체로 게으르고 형편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마군의 이런 잔소리를 들으면 다들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는 하는데 단 한 사람 ‘넬슨 배리’만은 예외이다. 그는 노파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로, 마을 사람들은 그 앞에서는 왠지 주눅이 든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오만한 남자를 마치 ‘사악한 신神’이라도 되는 듯이 우러러본다. 그런데 노파 마군은 넬슨 배리에게조차 굴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마군이 어떻게 그에게도 그처럼 당당히 굴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노파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손녀 릴리. 릴리는 이제 열네 살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릴리를 마을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지 못하게 한다. 그런 틈틈이 마군은 아이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 주로 영적인 성장을 돕는 것들을 가르쳤다. 거짓말을 해서도 훔쳐서도, 할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게으름은 금물이다. 그런 릴리는 열네 살인데도 늘 낡은 헝겊 인형을 꼭 끌어안고 다닌다. 작은 체구도 체구이지만 이렇게 인형을 안고 다니기 때문에 더 어린 아이로 보인다. 이웃 여자는 마군의 교육 방침에 문제가 있다는 듯 혀를 찬다. 아직도 애를 인형을 들고 다니게 하느냐, 저 또래 여자애들은 헝겊 인형 대신 남자친구를 생각한다 등등. 거기에 마군은 화가 나서 항변한다. “릴리는 또래에 비해 크지도 않고 나이가 어려서 그래. 나는 릴리를 서둘러 결혼시킬 생각이 전혀 없어. 튼튼하지도 않은 애를.” 이웃은 다시 말한다. 언제쯤이면 저 애를 자라게 할 것이냐고. 마치 늙은 할머니가 아이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그러나 마군은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다 때가 되면 자랄 거”라고 답할 뿐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어쩐지 슬픔이 깃들어 있다.
왜 노파 마군은 손녀 릴리가 아이일 뿐이라고,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때가 되면 다 자랄 것이라면서 손녀가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일까? 그리고 왜 마을 사람 모두가 경원해하는 넬슨 배리에게 혼자만이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여기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마군의 딸, 그러니까 릴리의 엄마는 열여섯 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딸이 결혼한 상대는 다름 아닌 그 문제의 ‘넬슨 배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군의 말에 따르면 그와 결혼했지만 그가 딸을 버렸고, 그 때문에 딸은 어머니의 집, 즉 마군의 집에서 살았으며 릴리도 거기서 태어났다. 헌데 릴리가 태어나고 얼마 뒤에 딸은 세상을 뜬 것이다. 이로써 마군과 릴리, 넬슨 배리의 관계가 설명이 된다. 마군이 손녀딸 릴리가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짐작이 간다.
이 작품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날 마군은 릴리를 심부름 보내는데, 하필이면 심부름을 보낸 곳에서 릴리는 넬슨 배리, 그리고 또 다른 남자(릴리가 보기에는 젊고 잘생긴)를 마주치게 된다. 그때까지는 딸을 나 몰라라 했던 이 무심한 아비란 작자는 딸과 마주치고, 딸이 제법 성장한 것을 보고 놀라워한다. “내가 이렇게 작고 예쁜 딸이 있는 축복을 받았는지 그동안 몰랐었구나.” 씨부렁거리면서 모자 아래로 드러난 릴리의 분홍빛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 손 치워!!!!) 나이를 물어보고는 열네 살이란 말에 놀라면서도 감탄한다. 그는 자기가 릴리의 엄마와 결혼했던 나이를 잊지 않고 있다! 넬슨 배리와 같이 있던 남자의 눈길도 예사롭지 않다. 그 나이에 인형을 안고 다니느냐면서 인형을 버리라면서 ‘사탕’을 사준다.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릴리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이 이야기를 들은 노파 마군은 ‘오랫동안 예상해 온 어떤 재난이 마침내 닥쳐온 것에 타격을 입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아니나 다를까, 일은 마군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마군이 보기에는 ‘술에 취한 돼지 떼’와 같은 놈들, 그놈들이 릴리를 탐하기 시작한다. 이제껏 나 몰라라 하던 애비란 놈이 느닷없이 마군을 찾아와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자신의 딸이라고 윽박지른다. 그는 왜 난데없이 딸을 데려가겠다는 것일까? 없던 부성애가 인형을 끌어안은 릴리를 보더니 갑자기 퐁퐁퐁 솟아난 것일까? 그는 노파를 협박한다. 릴리를 자신이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당신이 아기처럼 만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는 미인인 데다 아가씨가 다 됐다”고 협박한다. 노파여, 당신은 “영원히 사실 수도 없다”고. 그러면서 아이를 데리러 올 날짜까지 통보한다. 옷가지나 잘 싸두라는 싸가지 없는 소리와 함께. 마군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열여섯 살에 결혼한 딸을 잃은 노파 마군, 열네 살 손녀가 자라고 있다. 그 나이에 이르려고 한다. 그러기도 전에 이놈 저놈이 아이를 탐한다. 늙은 마군은 영원히 살 수도 없고, 아이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런 세계에 손녀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던 마군은 이리저리 해결 방안을 찾아 뛰어다닌다. 그리고 릴리에게 약속한다. 릴리가 이제 가게 될 곳은 “아름다운 곳, 꽃들이 높게 자라는 곳.”이며 릴리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꽃들이 피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 푸른 꽃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꽃이 지는 일도 결코 없다고. “꺾지만 않는다면 절대 시들지도” 않는다고. “꺾지만 않는”다면…. 늙은 할머니의 이 약속은 끝끝내 마음을 울린다. 너무나도 서늘하게. ‘노파 마군’은 읽을수록 안타깝다. 지금도 어린 소녀들이 차라리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얼마나 많을까. 《뉴잉글랜드 수녀》에는 괴팍한 ‘노파 마군’ 말고도 ‘크리스마스 제니’나 ‘고귀한 존재’의 주인공들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기묘한 인물이지만, 결국에는 손가락질하는 그 보통 사람들보다 숭고한 마음을 지닌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여성들의 이야기에 울었다, 웃었다, 한없이 따뜻해졌다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