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정확히 혼자는 아니었다. 그 무렵 좋아하던 사람과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도심 속의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또 다른 타인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었으므로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완벽한 고독이 내게 주어졌다. 그때 그 사람이 다른 나라로 한 달 가까이 출장을 떠나면서 그 공간에 오롯이 나 혼자만 머물게 된 것이다. 어느 밤 13층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문득 외로웠다. 도심에 위치했기에 그곳은 늦은 새벽에도 결코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다. 쉼 없이 오가는 자동차 소리, 사이렌 소리, 오토바이 소리, 아직 잠들지 않은 곳곳의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빛, 빛, 빛…. 도심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데 묘하게도 고독해지는 것. 그때 처음 느꼈다.
복층에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는데, 거기 누워서 내려다 본 도시는 더 외로웠다. 그때 그 계절이 딱 지금 이맘때와 같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창 아래로 보이던 그 풍경. 비라도 오고 난 이튿날이면 차도 인도 가릴 것 없이 노란 잎이 내렸고, 그건 외로움을 덮어주는 듯했다. 늘 복작대던 가족과 살던 나에게 창을 닫으면 나의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던 그 한 달 동안의 고독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완벽한 호사였다. 아니, 그때도 이미 알았다. 처음 혼자 지내게 됐을 때는 주말에는 당장 집에 가서 가족들하고 보내야지, 했는데 결국 나는 가지 않았다. 그 한 달 내내 그랬다. 그때 그 사람은 시차가 정반대인 곳으로 출장을 갔던 터라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만 잠깐 했었는데, 어느 순간은 메신저도 좀 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했던 것도 아니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글을 썼다. 지금 읽어보면 형편없기 짝이 없는 단편이지만 그렇게 앉아서 끼적거렸다. 혼자 보는 창밖 풍경이 새롭고 남달라서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고, 연필로 서툴게 스케치를 해보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즈음에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못할, 나의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 그 외로움의 공간이 아쉽기도 했다. 그곳에선 1년밖에 살지 않았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소음이 어느 순간 못 견딜 정도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아주 가끔 그곳을 지날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그 오피스텔의 13층을 바라보며 그때 그 혼자 있던 때를 생각하곤 한다. 창밖으로 홀로 지켜보던 그 노란 은행나무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답던 은행나무….
이 가을, 문득 그 은행나무가 생각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의 삶을 다룬 두 편의 에세이를 연달아 읽어서일까.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이 두 책은 가을의 고독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두 권 모두 제목부터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이 깊이 배어 나온다. 고닉의 글이 자신의 내면을 파헤치고, 그와 얽혔거나 스쳐 지나간 타인들을 돌아보면서 관계에서의 고독과 외로움을 통찰하고 있다면 랭의 에세이는 거대 도시 뉴욕, 그 도시에서 자랐거나 생활하면서 예술을 꽃피운 몇몇 이들의 삶을 추적하며 도시의 외로움과 고독을 탐구한다. ‘한밤에 빌딩 6층이나 17층, 아니면 43층 창가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랭의 문장은 내 기억 속의 그 은행나무를 일깨운다. 그리고 그때 혼자 있음으로 해서 무언가를, 그러니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빠졌던 그때의 나, 고독한 창조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랭이 언급한 예술가들 중에는 데이비드 호퍼나 앤디 워홀처럼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알 법한 이도 있으며 그보다는 조금 낯선 이들도 있다. 랭도 지적했듯이 호퍼의 그림은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외로움과 고독을 절절히 보여준다. 호퍼는 어쩌다 그토록 철저하게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을까? 랭은 호퍼의 삶을 추적한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호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외로운 시절을 보냈고 타인(그의 아내)을 지독히도 외롭게 했고 때로는 착취했으며 그런 배경 아래 그 누구도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쳐다보지 않는 인물들로 가득한 그림을 빚어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외로웠고 그 때문에 어쩌면 계속 똑같은 대상을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앤디 워홀, 평생 골방에서 자기만의 예술의 성(城)을 구축한 헨리 다거, 너무나 처절하게 소외당해 왔기에 자기의 상처를 감추듯이 무표정한 얼굴의 랭보라는 가면을 선택한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이 고독한 예술가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고독이 얼마나 한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지 참으로 처절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들이 인간을 창작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는 역설을 깨닫게 된다. 랭 그조차도 연인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어서야 ‘외롭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에 천착하다 보니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써 내려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랭은 ‘고독이란 사람들이 그 속에 머무는 장소임’을 깨닫는다. 그에 따르면 이 도시, 맨해튼 또는 서울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공간에 거주할 때 어떤 사람이든 처음에는 길을” 잃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정신적 지도, 각자 좋아하는 방향과 더 잘 가는 노선들이 개발되어 하나의 컬렉션을 구성”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짜 맞춰진 고독의 지도”(21쪽)가 바로 그것이다. 랭이 생각하기에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고독은 ‘집단적이고 하나의 도시’이다. 그 속에 거주하려면 “규칙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지는 의무를 짓밟지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뿐”(323쪽)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독은 가치 없는 체험이 결코” 아님을, 이 “외로운 도시에서 경이적인 것이 수도 없이 탄생”했음을, “고독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고독을 다시 구원하는 것들”(22쪽) 탄생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결국 비비언 고닉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얽히면서도 때로 지독히도 외로워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그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고닉은 뉴욕이라는 무대 위를 지나는 모든 사람, 낯설기도 하고 친밀하기도 한 그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추억,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조그맣고 빈틈없는 세계’에서 ‘훌륭하게 작동하는 방법’(다시 말해 무례한 모욕을 피하고 어디까지 굴복할지 한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익힌다.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독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떨쳐버려야 할 그 무엇이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고 혼자 있는 것은 무언가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랭과 고닉조차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심지어 고닉은 ‘외로움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고독은 인간에게 부정적이기만 할까. 도리어 타인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순간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고닉이 말했듯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는 존재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은 가장 나쁜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을 억누르고 희망을 질식’시키는 게 아닐까(<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216쪽). 고닉의 말대로 인간은 ‘사실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쉬운’ 존재는 아닐까.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비로소 랭이 말한 “고독을 다시 구원하는 것들”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완벽하게 혼자 지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각각이 서로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두 내 목 아래쪽에 가볍지만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게 마법 같은 따스한 연결감을 불어넣어 주는 구슬”(<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15쪽) 같은 느슨한 관계,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함께 있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그런 관계 속에서 홀로 오롯이 설 수 있을 때,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이 두 책은 보여준다. 그 어느 때 보았던 것보다 아름답던 그 시절의 은행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