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읽고 싶어진 것은 순전히 동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때문이다.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제야 만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관심 없던 원작이 무척 궁금해질 정도로 훌륭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두 남녀의 정사 장면을 보여준다(그래서 훌륭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들의 정사가 조금 남다르다면, 섹스를 마친 후 여자는 자신이 쓰고 있는 드라마 이야기를 남자에게 들려주는데, 완성작은 아닌지 남자도 여자의 이야기에 자신의 상상을 덧붙인다. 인생의 주름이 희미하게 자리잡은 얼굴, 중년에 접어든 남자와 여자는 누가 봐도 부러울 만큼 다정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것 같다. 드라마 작가인 여자와 유명한 연극 연출가인 남자, 그리고 그들이 함께 지내는 집의 크기나 구조 등을 보건대,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그러니까 어느 모로 보나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한 커플이다.

 

남자의 이름은 가후쿠, 여자의 이름은 오토- 이 남부러울 것 없는 커플을 지켜보노라니 함께 지낸 세월에 비해 너무 다정해서 두 사람은 결코 부부가 아니라, 아마도 나이 들어 만난 연인인가 싶은데.... 놀랍게도 그들은 부부가 아닌가. 이런 설정에 문득, 영화가(또는 하루키의 원작이)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닌가 싶어진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현실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가후쿠는 국제 연극제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로 출장을 떠나게 된다. 그날 아침 완전 다정하게 아내와 작별인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신나게, ‘마이 카를 타고 도착하니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러시아에 눈이 심하게 내려 연극제 일정이 미뤄졌으니 공항 근처 숙소에서 머물거나 하는 등 출발을 미루라는 문자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조금 전 헤어진 아내가 보고 싶은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빨간색 앙증맞은 마이카에 올라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순간 내 심장은 두근두근. 왠지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 집에 가면 왠지 에, 그러니까 아내가 다른 남자랑 신나게 한판 놀고 있을 것만 같다..... 드디어 도착한 집, 가후쿠는 주차를 하고 집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연다. 들려오는 음악소리.... 그리고 그 음악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 그렇다 그것은 아내의 신음소리이다. , 그러니까 집으로 오지 말고 공항 근처 숙소에서 머물라니까!! 아내와 웬 남자가 가후쿠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 정사에 몰입해 있는 게 아닌가. 가후쿠는 잠시 얼어붙지만 조용히 문을 닫고 집을 나온다. 그러고는 마이 카를 타고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아내나 남편 또는 연인의 불륜(그것도 정사)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면 대부분 어떻게 행동할까? 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머리끄덩이를 붙잡거나 물건을 던져버리거나 등등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테고, 가후쿠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라면 아마도 일단 그 자리를 떠날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그 후 상대에게 모든 걸 봤노라 따지고 묻고 헤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길로 공항 근처에 호텔을 잡고 하룻밤을 보내고, 그 늦은 밤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영상 통화로 받을 때도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에 무사히 도착한 척 연기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러시아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다정히 아내를 끌어안고,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정사를 벌인다. 아내는 아내대로 정사를 마치고 나서는 늘 그렇듯이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이 부부는 계속 이렇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저런 관계가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뜻밖에도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가후쿠는 홀로 남는다. 하루키 원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려 있는데, 가후쿠 역시 여자 없는 남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내 없이 덤덤히 살아가던 그는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받아 작품 연출을 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고 무언가 말 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미사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드라이브 마이 카>, 여자 없는 남자들, 37)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예요. 상대가 어떤 여자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가후쿠 씨만의 고유한 맹점이 아닐 거예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죠. (<드라이브 마이 카>, 여자 없는 남자들, 50)





그토록 아끼는 '마이 카'를 과연 미사키에게 맡길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어느 정도 하루키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전반부가 그러한데, 영화 중후반부를 지날 때쯤에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다시 읽고 싶어지는 생각이 들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가후쿠는 연극 연출가로서 직접 연기도 한다. 그는 아내가 죽고 난 뒤 <바냐 아저씨>바냐역을 맡아 무대에 서는데 그의 대사(즉 체호프의 대사)에 지나치게 몰입해 바냐 역할을 할 때면 심적으로 몹시 힘겨워한다. 종종 바냐역을 맡았던 그는 아내가 바냐의 대사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를 녹음한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며 연기 연습을 하기에 이 바냐 아저씨와 체호프의 대사는 그에게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그가 연출을 맡아 무대 위에 올리게 되는 작품도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이다. 이 연극은 좀 특별한데, 아시아 각국의 배우를 초청해 대사를 그 역할을 맡은 배우의 모국어로 연기한다는 점에 있다. 옐레나 역을 맡은 대만 출신 배우는 옐레나의 대사를 중국어(만다린어), 바냐 역할을 맡은 일본 출신 배우는 일본어로, 아스트로프 역할을 맡은 한국 출신 배우는 한국어로, 심지어 소냐는 한국어 수어로 대사를 한다. 이게 가능한가 싶은데 놀랍게도 가능하다. 세상살이에 지친 바냐가 절망에 빠져 비탄에 잠겨 있을 때 그런 바냐에게 그래도 살아야한다고 용기를 주는, 소냐의 대사는 수어로 구현됐을 때 더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건 아마도 소냐(이자 극중 이유나’) 역을 맡은 한국 배우 박유림의 연기도 크게 한몫한 것 같다.

 

'바냐 아저씨'를 저마다의 언어로 연습하는 배우들



한국 수어로 소냐의 대사를 전달하는 박유림 배우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공교롭게도 <바냐 아저씨>를 다시 읽었던 터라, 영화 속에서 전해지는 체호프의 대사가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바냐 아저씨>바냐는 죽은 누이의 남편인 세레브랴코프를 위해 그의 영지를 관리하며 반평생 헌신한다. 이제 교수직을 은퇴하고 돌아온 세레브랴코프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 옐레나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바냐의 가족들- 바냐는 자기도 모르게 매부의 새 아내에게 반하고 그 옆에서 매부의 허울뿐인 실체를 보며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깊이 회의감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매부가 죽은 누이의 소유였고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시골 영지를 팔아 별장을 사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고, 이 제안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 든 바냐는 분노에 미쳐 급기야 세레브랴코프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바냐는 그런 자신의 거짓과도 같은 인생에 회의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읊조린다. “과거는 하찮은 일에 바보같이 닳아 버렸다. 현재도 무섭도록 허망하다. 바로 이게 나의 삶이고 나의 사랑입니다. 그걸 어디로 치우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내 감정은 구멍으로 기어든, 햇빛처럼 헛되이 사라집니다. 나 자신도 사라집니다.” (<바냐 아저씨>, 171, <벚꽃동산>) 영화 속 연극에서 바냐 역할을 맡게 되는 가후쿠도 줄곧 바냐의 대사를 읊조리곤 한다. 그 대사들은 가후쿠의 거짓된 삶,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 바냐에게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 연극 장면



영화에서 소냐는 이 대사를 수어로 말한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바냐 아저씨>의 힘인지, 체호프의 힘인지, 수어로 이 모든 감정을 절절히 전달한 연기자 박유나의 힘인지, 이 영화를 연출한 하마구치 류스케 힘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힘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문학과 영화가 빚어낸 이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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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3-29 15:3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제가 쓰지 못하고 넘어가 마음에 늘 걸려있던 페이퍼를 보니 넘 반가워요. 이 영화 저는 작년말에 보았어요. 하루키의 책은 몇 년전에 읽었고 체호프 희곡선집 시공사 것으로 바냐아저씨 읽었고. 연극도 오 년 전인가 혜화동 체호프 전용관에서 보았거든요. 뭔가 여러가지로 합체되는 좋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막 그려졌어요. 누구나 다하지 못하고 삼켜둔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하루키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훨씬 풍부하게 잘 살려낸 케이스랄까. 아무튼 영화 좋았어요. 제대로 화를 냈어야 했었다고 주인공이 눈물 흘릴 때 어느새 저도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원래는 노란 차인데 영화에서 붉은색으로 나와 강렬한 인상을 준 것도 나쁘지 않았고 다국어 연극 참 인상적이었어요. 말씀대로 특히 수어를 하는 박유림 배우 좋았습니다. 그 남편 역의 배우도요. 이 페이퍼 좋아요 열 번 누르고 싶네요.

잠자냥 2022-03-29 15:05   좋아요 5 | URL
아니, 왜 안 쓰고 지나가셨어요! 영화 깊이 읽으시는 프레이야 님의 페이퍼였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ㅎㅎㅎ 전 코로나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봤는데 극장 가서 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하루키의 단편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냈다는 말씀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 하루키의 원작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이 작품은 원작에 체호프에 영화가 빚어낸 앙상블이 정말 최고입니다!

새파랑 2022-03-29 1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 좋았는데 영화가 나왔군요 ㅋ 제가 상상한 남주 보다는 좀 많이 젊어 보이네요 ㅋ 영화가 아주 좋았나 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책도 좋고 <벚꽃동산>도 아주 좋았어요 ^^

잠자냥 2022-03-29 17:01   좋아요 3 | URL
네, 좋은 작품들이 만나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유부만두 2022-03-29 17: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보다 말았어요. 한국 출신의 남자 배우/연출가? 의 집에서 저녁 식사 장면까지 봤는데 영 따라가기 힘들더라고요. 책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도 안나고요. 잠자냥 님 페이퍼를 읽었으니 다시 도전해 볼까요?

잠자냥 2022-03-29 20:16   좋아요 1 | URL
거기까지 보셨으면 많이 보셨는데요?! 영화는 한번 끝을 보시죠~ ㅎㅎ

햇살과함께 2022-03-29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오늘 체호프 단편선 꺼내다가 몇년 전에 벚꽃동산이랑 갈매기 연극 봤던 생각나서,, 갑자기 연극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바냐 아저씨도 찾아봐야겠어요!

잠자냥 2022-03-29 20:17   좋아요 1 | URL
바냐 아저씨도 연극으로 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mini74 2022-03-29 17: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만 읽었어요. 일본에선 이 영화 성공이 좋으면서도 하루키 원작이라 우익들이 대놓고 자랑질도 못하는 묘한 상황이란 기사 봤어요 ㅎㅎ 체호프 읽고 영화를 봐야겠어요. 자냥님. 그래서 훌륭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는 쓰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ㅎㅎㅎ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

잠자냥 2022-03-29 20:1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하루키 단편 여러 개를 좀 참고한 거 같더라고요. 영화는 정말 그래서 훌륭한 건 아닙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