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츠 단편집 지만지 고전선집
모리츠 지그몬드 지음, 유진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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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화려한 것도, 이야기가 말할 수 없이 흥미진진한 것도, 또 그렇다고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라거나 상징이 오묘하고 헤아릴 수 없이 깊어서 무릎을 칠 만큼 기막힌 것도 아닌, 그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데도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이 있다. 담백하게 써내려갔는데 그것이 그대로 삶인 그런 글, 내게는 체호프의 단편들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 읽고 있노라니 문득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모리츠 지그몬드. 모리츠는 1879년에 헝가리 동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려 아홉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고, 이렇게 어린 시절에 겪은 비참했던 삶은 그의 생애에 걸쳐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특히 그는 민요를 수집하고자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을 바탕 삼아 헝가리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들과 주변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담은 자연주의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모리츠 단편집》에도 그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10편 실려 있다. 초기작부터 중기,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실려 있어 작가로서 변화의 과정을 엿볼 수도 있다. 처음 읽는 작가의 경우 첫인상이 중요하다. <유디트와 에스테르>가 내게는 모리츠를 첫인상을 결정짓는 작품이었는데 한 두 페이지 읽었는데도, 어쩐지 이 작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유디트’와 ‘에스테르’ 두 가정주부로, 두 사람은 친척관계이다. 화자는 유디트의 어린 아들로 이 소년의 눈으로 두 여인의 심리가 절묘하게 그려진다. 상류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소년의 집안은 몰락을 겪어 이제는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생활을 하고 있다. 살던 곳을 떠나야만 했을 때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소년의 아버지는 그래도 친척이 살고 있는 고장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이곳, 그러니까 ‘빈체’ 아저씨가 살고 있는 마을로 숨어든다. 그러나 이 선택은 소년은 물론 소년의 어머니인 유디트에게 큰 상처를 준다. 남부럽지 않게 살던 소년의 가족을 늘 시기하던 빈체 아저씨와 그의 아내 에스테르는 이제 몰락해 찾아온 그들을 종처럼 대한다. 특히 에스테르는 유디트를 더 못마땅하게 여기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마부 출신인데 비해 유디트는 집안사람들이 대부분 남작, 백작인 그야말로 진짜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다. 자존심이 센 유디트는 유디트대로 아무리 궁핍해도 에스테르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어린 아들을 위해 비굴하게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우유 때문이다.

소년은 우유를 무척 좋아하는데, 가난한 이 집에는 우유를 얻을 젖소가 한 마리도 없다. 돈이 생길 때만 겨우 우유를 구할 수 있는데 그런 일도 극히 드물다. 그에 비해  에스테르의 집에는 젖소가 얼마나 많은가! 소년은 가난하면서도 예쁘고 자존심 센 엄마가 원망스럽다. 자존심을 버리고 동네 여인들과 말이라도 섞으면 우유를 얻기 쉬울 텐데, 엄마는 요지부동이다. 소년은 엄마의 눈치를 보다가 어느 날, 빈체 아저씨네 집, 그러니까 에스테르에게 우유를 얻으러 가겠다고 말하고, 엄마는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년은 빈체 아저씨네 집에 갔다가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고는 빈손으로 돌아온다. 우유를 얻지 못했다고 힘없이 말하는 아들의 모습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유디트. 그런데 뜻밖에도 며칠 후 에스테르가 유디트의 집에 우유를 들고 찾아온다. 에스테르는 왜 제 발로 우유를 들고 찾아왔을까? 소년이 제 엄마에게 자신이 본 일을 고자질 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은 에스테르의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나는 별것 아닌 듯한 사건을 다룬 이 소박한 작품의 끝부분을 읽다가 유디트의 어떤 행동 때문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는데, 이윽고 그녀가 왜 그랬는지, 그리고 또 그 이후의 또 다른 행동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가난하고 몰락했어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또 그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고..... <유디트와 에스테르>는 이렇게 가난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는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어린 소년의 눈으로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양 구유> 또한 가난한 가정의 이야기이다. 한 농부가 늙은 아내와 다 성장한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아들들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한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에 최소한 한 끼는 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집구석에도 아버지가 뭔가를 남겼는지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유산을 나눌 시간이 다가온다. 죽은 아버지에게 숨겨둔 땅이라도 있는가 싶어 궁금증이 커질 즈음, 그 유산이라는 게 다 낡아빠진 배낭과 부츠 등등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잡동사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헛웃음이 절로난다. 그러나 아들들을 비롯해 노파는 유산을 나누는 데 사뭇 진지하다. 누가 더 좋은 걸 갖고 갈까 싶어 전전긍긍이다. 형제 사이도, 어머니와 자식 사이도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잡동사니 유산 분배 앞에서는 자칫 잘못하다가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다. 태어나서 뭔가를 나눈다는 생소한 경험을 하면서 그들은 ‘소유’라는 개념 앞에서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 허름한 이 집 잡동사니 사이에서 자랐지만 물건을 선택하거나 어떤 것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 주변의 가족 공동체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가구와 옷 그리고 심지어는 멍에에 박을 녹슨 못 하나까지도 각자의 것으로 바뀌어버렸고, 지금까지는 그들이 알지 못했던 개인 소유라는 것이 극도로 끔찍한 고통과 저주를 동반한 채 그들 사이에 등장했으며 그들이 계속해서 뒤지고 있던 못쓰게 된 자질구레한 소지품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수도 있었다.(<양구유>, 《모리츠 단편집》, 43쪽)


노파는 한술 더 떠 아들들이 제발 각자 떠나주길 바라고 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식들 중 누군가가 그녀와 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계속되는 가난을 혐오했고 어떻게든 이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치를 떨며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머슴살이 하는 아들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편히 살기를 바라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싶을 텐데, 사실 이 집안은 이제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상태이다. 다행히 노파는 목사의 부인으로부터 목사관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남은 평생을 살라고 제안을 받은 상태이다. 그 집안은 얼마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가! 노파는 아들들을 당장 떼어버리고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모님의 부엌으로 가기만을 고대’(38쪽)한다. 노파의 이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그동안 너무나 빈곤하게 살아서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득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눈에 불을 켜고 탐욕을 부리는 인간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 노파와 아들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얼마나 가난한 삶이 고되기에 저렇게까지 할까 싶어서 한 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가난하고 척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린 작품은 그밖에도 여럿 있다. 버림받은 고아가 세상으로부터 냉대받는 현실을 담담히 묘사한 <아르바츠커>, 이웃에 동냥하며 떠돌이 삶을 사는 한 거짓말쟁이 소년의 이야기인 <거짓말쟁이>, 마찬가지로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끝내 궁핍으로 말미암아 몸을 팔아야 할 상황까지 내몰리는 소녀의 이야기 <치베> 등등 이 책 속 주인공들은 거의가 가난한 이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들의 삶이 척박하고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런 와중에도 소녀는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차게 주장하기도 하며(‘치베’), 비록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꼬마이지만 그 거짓말은 늘 남을 웃기거나  상대를 위하려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다(‘거짓말쟁이’). 이렇게 순수함과 선함을 잃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 비해 가진 자들의 행태는 ‘선함’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도리어 무엇을 위한 선함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픈 아이를 미신만 믿고 방치한다고 나무라는 귀족 부인의 모습(‘돼지치기의 가장 더러운 셔츠’)이나, 딸의 가난한 학급 친구에게 매일 밥을 먹여주는 대신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일을 도와야한다는 조건을 달고, 장작을 패러 온 그에게 일장 연설을 하는 박사의 모습(‘이해할 수 없는 일’) 등을 통해 작가는 제 아무리 선한 의도로 가진 자가 없는 사람을 돕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상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아주 잘했다. 그럼 아빠 성함은 어떻게 되니?”
“아빠요.”
펀니커가 대답했다.
“넌 그렇게 부르겠지. 하지만 남들은 어떻게 부르니?”
“당신이요.”
펀니거카 말했다.
“아빠의 성함을 모르니? 버르거 야노시라든가? 아니면 코바치 미하이? 뭔가 다른 이름이 있을 게다. 자! 그 다른 이름이 뭐지?”
“모르겠어요.”
“에이, 네 아빠는 아직 그것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나 보구나....”
“사람들이 널 뭐라고 부르지?”
자기의 딸을 바라보았다.
“벌리커요.”
벌리커가 대답했다.
“그래그래, 그럼 사람들이 날 뭐라고 부르지?”
“아빠라고요.”
“아이, 바보! 멍텅구리!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부르냐고?” (<이해할 수 없는 일>, 《모리츠 단편집》, 91쪽)


밥을 먹으러 온 딸의 친구에게 박사는 그 아이 아버지의 성함을 묻는데, 천진한 소녀의 대답은 ‘아빠’이다. 이 장면에서는 크게 웃음이 나온다. 이 책에 실린 10편 모두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의 처참한 삶을 그리고 있어 전체 분위기는 어둡지만 그런 중에도 위의 장면처럼 큭큭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이 가진 자나 귀족 앞에서 마냥 비굴하게 굴지 않고 자기 할 말은 확실히 하는 장면들이 많아 그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비록 방법이 조금 어긋나 그 선의의 빛이 바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 속의 가진 자들 또한 저마다 나름대로 선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 이 단편집에서는 진정한 악인은 만나 볼 수 없다. 그런 점 또한 《모리츠 단편집》의 매력이 아닐까. 결국 작가는 인간의 선함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구나 싶어 책을 내려놓을 때쯤이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작가의 다른 책을 더 찾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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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19 10:3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가 잠자냥님이 헝가리 체호프라고 알려주셔서 이 책은 새책으로 바로 구매했습니다~! 오늘 도착한다고 하던데 완전완전 기대됩니다. 별이 다섯개라니~! (리뷰는 실눈 뜨고 읽었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2-01-19 10:45   좋아요 4 | URL
책 읽기 전 실눈 뜨고 리뷰 읽는 거 공감입니다. ㅋㅋㅋ 저도 그렇거든요.
새파랑님이 읽으실 때도 체호프스러움이 느껴지길 바라겠습니다!

다락방 2022-01-19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읽기 전이라도 실눈 뜨고 읽지 않고 크게 눈 뜨고 읽습니다. 그러다 스포를 만나면 그도 다 어쩔 수 없는 일.
저도 이 책 사겠습니다. (읽겠습니다를 못쓰는 이 마음..)

잠자냥 2022-01-19 12:28   좋아요 2 | URL
와, 역시 담대한 다부장~ 전 제가 읽으려고 마음 먹은 책 (특히 문학은) 줄거리 부분은 거의 넘어가는 편이에요.

다락방 2022-01-19 1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지수는 얼마 안되는데 책값은 왜이래요? ㅜㅜ

잠자냥 2022-01-19 12:2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지만지 책 가격 정말 사악하죠. ㅎㅎㅎ ㅠㅠ

잠자냥 2022-01-19 12:32   좋아요 3 | URL
지만지책은 적립금이 아닌 내 돈 다주고 사려면 교보에서 사세요. 그나마 교보가 10%로 할인 가장 많이 함... 예스24는 할인 0% 알라딘은 5%입니다.

아니면 전자책을 노리는 방법도 있는데, 이 책은 찾아보니 교보에서 전자책 출간되어서.... 최종 10,660원에 살 수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2-01-19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헝가리 체호프!
가난한 삶 속에서 웃음이 터지는 장면!
왠지 알것 같음요
디미트리 베르휠스트의 <사물의 안타까움성> 생각나요

잠자냥 2022-01-19 21:59   좋아요 2 | URL
오호, 저는 그 책은 못 읽었는데 궁금해지네요.

mini74 2022-02-10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리옵니다 ~~

그레이스 2022-02-10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도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2-10 18: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적립금 잔고는 마르지 않는군요~!! 축하드립니다 ^^

독서괭 2022-02-10 2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를 안 읽어서 댓글을 못 달았던 이 리뷰가 당선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