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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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제목만 봤을 때는 엔도 슈사쿠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엔도 슈사쿠가 사무라이 이야기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사무라이 이야기 속에서 종교, 그러니까 예수와 그리스도 신자 이야기를 하겠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예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무라이>는 기리시탄(에도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 ‘사무라이’의 이야기이다. 무사인 사무라이와 그리스도 신자라니 그 조합이 참으로 의아한데,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1600년대 초, 일본 동북부 센다이의 작은 항구 쓰키노우라에서 새로 만든 웅장한 갤리언선 한 척이 출항 준비 중이다. 배에는 일본인 100여 명과 스페인 선원 40여 명이 탈 예정이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페인 식민지인 멕시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와 가까운 곳에 새 무역항을 만들어 멕시코와 직접 무역을 바란다. 그런 쇼군의 의향을 읽은 정치인들은 사절을 보내는 데 앞장선다. 때문에 이 배에는 일본인 상인들을 비롯해 사절 임무를 맡은 사무라이들, ‘하세쿠라 로쿠에몬’, ‘니시 규스케’, ‘마쓰키 주사쿠’, ‘다나카 다로자에몬’ 이 네 사람이 탔으며 통역으로 스페인인 신부 ‘벨라스코’가 동행한다.

막중한 임무를 띤 한 나라의 사절이라고 하니 그 신분이 화려할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영주의 명을 받은 하급 사무라이들로 자신들이 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이 되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특히 이중 궁벽한 골짜기에서 농사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지내던 ‘하세쿠라’는 자신이 선발된 이유가 더 의아하기만 하다. 그의 집안은 ‘메시다시슈’라고 불리는 토착 무사에 속하고 영주의 아버지 대부터 봉공을 해왔지만 특별한 일을 해왔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 자신은 달변가이기는커녕 남다른 재능도 없다. 묵묵하게 아버지나 숙부에 순종하면서 살아왔다는 것, 무슨 일이든 거스르지 않고 농민들처럼 인내하는 것만이 유일한 재능이다. 게다가 넓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커녕 야심도 없어서 이 골짜기를 떠나기가 꺼려지기만 한다. 그러나 숙부의 오랜 꿈(공을 세워 이 궁벽한 땅 대신 기름진 봉토를 받고자 하는)을 실현하고자 주군인 영주의 명령을 받들어 하인을 이끌고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된다.

통역을 자청한 신부 ‘벨라스코’는 어떤 이유로 이 배에 선뜻 올라탄 것일까? 프란치스코회 소속 신부인 그는 일본에서 열정적으로 포교 활동 중인 선교사로 자신들보다 앞서 일본에 선교하러 들어온 예수회 소속 신부들을 제치고 두드러진 공을 세워 일본에서 주교가 되기를 꿈꾸는 대단한 야심가이다. 그는 현세적 이익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난 일본인의 속성을 간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바라는 것-멕시코와의 무역-을 이용해 자신의 공을 세울 기회를 노린다. 포교를 위해 일본인의 탐욕을 이용하는 것이다. ‘포교도 외교처럼 술책을 부리고 흥정하고 위협하고 때로는 타협도 해야 한다.’(176쪽)는 생각을 가진 이 대단한 야심가의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은 저 어수룩한 사무라이들을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간다.

힘겨운 바다 여행을 마치고 멕시코에 도착한 그들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리라 기대하지만 정세는 급변한다. 게다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고자 다른 이들을 도구로 쓰기 마다하지 않는 벨라스코 신부의 계략으로 이 사무라이들의 여행은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로마로 속절없이 길어지기만 한다. 그 여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이들의 임무가 결코 쉽사리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행여 그렇다한들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 앞에 화려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사무라이를 포함한 그의 종자 ‘요조’ 등 일본인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멕시코에서 무역을 손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리시탄이 된 일본인 상인들은 현세적 이익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하인 요조는 조금 특이하다. 그는 이 배에 오른 이들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 계급에 속한다. 그저 자기의 주인인 ‘하세쿠라’를 묵묵히 따를 뿐,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내놓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그가 벨라스코의 설교에 감화 받아 그리스도의 삶에 관심을 갖고 마침내 기리시탄이 되는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한다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그 평등한 모습에 마음을 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세쿠라도 인상 깊다. 그는  임무 때문이기는 하지만 기리시탄이 되기를 누구보다 꺼린다. 우연히 손에 넣은 예수의 형상이 그려진 염주를 보면서도 의아하기만 하다. 힘없이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 사내를 보면 벨라스코를 비롯하여 남만인 모두가 이런 사람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주(主)라고 부르는 사람은 영주뿐이며, 영주는 이렇게 볼품없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그의 눈에 예수는 그저 추하고 비쩍 마른 사내, 위엄도 없고 돋보이지도 않는 초라한 사내일 뿐이다. ‘이용한 후에는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내’(316쪽)이다. 게다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우리 생활이 편해진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기리시탄이 되는 일은 조상과 골짜기의 삶 전체를 배신하는 일이다. 죽은 조상들이 사무라이가 기리시탄이 되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기리시탄이 되기를 선뜻 받아들인 젊은 사무라이 ‘니시’도 있다. 그는 사무라이 일행 중 가장 젊고 순수하기에 거리낌 없이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혹하여 그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일찌감치 그리스도신자가 되었지만, 자기들 손에는 결코 흙을 묻히지 않는, 그저 입으로만 아름다운 소리를 늘어놓는 신부들의 태도에 질려 수도사의 길을 포기한 일본인 수도사도 인상 깊다. 그가 믿는 예수는 금전옥루 같은 교회에 있지 않고, 비참한 인디오 안에 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예수야말로 엔도 슈사쿠가 그의 여러 작품에서 꾸준히 말해온 예수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요조, 하세쿠라, 니시, 일본인 수도사 등은 저마다의 이유로 기리시탄이 되고, 또 저마다의 이유로 그 안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며 상처받는다. 믿음의 깊이 또한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과연 기독교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믿음의 깊이가 얕다. 그러나 나는 이 네 사람이 벨라스코 신부보다 더 예수 가까이 다가간 이들이 아닐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는 이 작품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다. 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는 줄곧 일본인을 폄하하면서 계도와 계몽이 절실한 존재로 본다. 세속적인 이익에 매우 약삭빠른 존재라고 그들을 향한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벨라스코 신부만큼 세속적 욕망에 들끓고, ‘현세적인 이익에 대한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 또 있는가?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 말하듯 일본과 일본인은 그의 ‘포교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며, 다루기 힘든 맹수를 길들이듯이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서슴없이 주님의 가르침으로 일본을 ‘정복’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한다. 때문에 그의 주변 여러 사람이 그에게 신부가 아니라 ‘정치가’나 ‘외교가’가 되는 게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고, 한결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는 끝까지 일본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순교한 그의 삶을 보고 숙연해질지도 모르겠으나 글쎄, 나는 그가 끝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삼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끝까지 자기가 ‘정복’하지 못한 일본 땅에서 순교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자기 방식대로 승리했다고 믿고 죽어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인간이 아닐까. “산에 오르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서로도 길이 있고 남북으로도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오르든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도 그와 같겠지요.”(130쪽)라는 그의 말은 공허하기만 하다. 어쨌든 그의 방식으로는 결코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벨라스코보다는 ‘신은 존재라기보다는 손길이라던’ 오쓰(<깊은 강>)의 깨달음과 맞닿아 있는 그들, 하세쿠라, 요조, 그리고 일본인 수도사 그들이 더 가까이 신에게 다가간 것은 아닐까. 사무라이, 그가 그토록 헤매다 마침내 만난 진정한 왕은 아마도 예수가 아니었을까.


“나는 형식적으로만 기리시탄이 되었다고 생각해왔네.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정치가 뭔지를 알고 나서 이따금 그 사내를 생각해 왜 그 나라들에는 어느 집에나 그 사내의 가련한 상이 놓여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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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14 0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리뷰 보고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잠자냥 2021-09-14 10:30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정치와 종교가 적절히 섞여 있어서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레이스 2021-09-14 10:35   좋아요 3 | URL
여러분들의 리뷰를 읽은 결과 읽는 쪽으로 기울고 있던 중이었어요^^
제가 침묵을 3번 넘게 읽고 논제 만들고 하면서 당시 역사도 조금 봤거든요
엔도 슈사쿠의 글은 왠지 변명이 될것같다는 생각때문에 읽고 싶지 않았는데,,, 리뷰보니 제 예단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잠자냥 2021-09-14 10:40   좋아요 3 | URL
우아, 침묵 3번이나! 전 아직 그 작품만큼은 안 읽고 있다능 ㅎㅎㅎㅎ

새파랑 2021-09-14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으신 분들의 평점이 다 좋네요. 잠자냥님까지 별 다섯~!! 이러면 안읽을 수 없죠 ^^ 저 표지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잠자냥 2021-09-14 10:30   좋아요 3 | URL
네, 다들 평점이 좋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Falstaff 2021-09-14 10:3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안 낚입니다. ㅋㅋㅋㅋ 이제 종교 얘기는 좀 쉬고 싶어요.
게다가 엔도 슈사쿠 덕후께서 격찬을 하셨으니, 디스카운트를 좀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크하하하하... =3=3=3=3

그레이스 2021-09-14 10:3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잠자냥 2021-09-14 10:3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두고 봐야지 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9-14 12:40   좋아요 2 | URL
저는 주문했습니다
알라딘은 너무 빨라서 오늘 보내준대요.
다시 생각할 겨를도 없네요. ㅋ

수이 2021-09-14 1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안 낚이시겠다고 하신다니까 갑자기 급궁금해지는 이 심리란 ㅋㅋㅋㅋ 잠자냥님이 읽어봐봐 하면 저 이제 읽어보려구요. 잘 했죠? 하지만 아직 사지 않았다는...... 엔도 슈사쿠는 팬층이 정해져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한 권도 읽은 작품이 없어요.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겠죠?

잠자냥 2021-09-14 14:29   좋아요 2 | URL
ㅎㅎㅎ 엔도 슈사쿠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계속 읽어보게 되더라고요. 아주 강렬한 매력이 있다고는 말하기 뭐한데 참 묘한 작가입니다. 처음 시작하신다면 이 책도 괜찮지만 그보다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깊은 강>을 추천합니다!

mini74 2021-09-1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에 이어 사무라이 ~ 침묵이 던지는 물음들이 무겁고 어려웠어요. 쉽게 읽히지만 쉽지 않은 ㅎㅎ 사무라이도 담아갑니다 ~~

잠자냥 2021-09-14 16:12   좋아요 1 | URL
쉽게 선뜻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툭 던지는 게 엔도 슈사쿠 작품의 매력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