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의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는 1940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잊힌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어로 다수의 문학 작품을 발표했고, 친일 어용문예지에 여러 소설을 발표했으며,  1943~44년 사이에는 전향하여 친일 소설을 쓰기도 했던 김사량. 게다가 하필이면 그의 형 김시명은 그 시절 조선총독부 사상 유일한 조선인으로 전매국장 자리까지 올랐기에 김사량은 더 쉽게 친일 작가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그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김사량의 고향은 평양이다)했기에, 남한에서는 월북 작가로 규정되었다. 그렇기에 김사량의 이름이 이 땅에서 지워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사량을 단지 그렇게만 규정할 수 있을까? 그의 작품 <천마>의 혐오스러운 인물 ‘현룡’(친일 문학가 김문집을 모델로 하고 있다)처럼 진짜 친일 작가인가? 그가 일본어로 쓴 <빛 속으로>는 일본문학일까 한국문학일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니 일본문학으로 봐야 할까? 그러나 그 작품 면면을 보면 김사량을, 그의 문학을 그런 굴레 안에만 가둬두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

<빛 속으로>는 식민지 시절 일본 동경에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김사량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나’, 그러니까 남(南) 선생이 화자인데, 그는 동경제대에 재학 중인 조선인으로 아직 학생 신분이지만 빈민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조선인이므로 당연히 ‘남(南)’ 선생이라고 불려야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그를 ‘미나미(南)’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 자신도 굳이 자기 이름이 ‘남’이라고 정정하지 않는다. 일본인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남 선생을 유독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학생 ‘야마다 하루오’가 있다. 이 녀석은 남 선생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염탐하는 재주가 특기인데 그를 좋아하면서도 표현 방법을 몰라 괴롭히는 것으로 관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 같다. 하루오는 남 선생의 정체를 알고 그를 조선인이라 비하하면서 비웃는데,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동경제대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신기하게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야마다 하루오가 절반은 일본인이지만, 절반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루오의 어머니가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하루오는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엄마는 물론 남 선생에게 이중적으로 굴었던 것이다.

하루오의 엄마 또한 자신이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되도록 숨기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남 선생이 미나미 선생으로 불리면서도 굳이 바로잡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동경제대에 다니는 학생, 어떤 면에선 선택받은 처지에 있는 그조차도 온갖 그럴듯한 핑계로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비굴하게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데, 하층민으로 살아가며 일본인 남편에게 온갖 학대를 당하고,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에게조차 모진 대접을 받는 하루오의 엄마 ‘야마다 정순’이 조선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 물론 여기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반전이 있다. 일본인인 줄로만 알고 있던 하루오의 아버지 ‘한베에’조차 그 절반은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루오는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조선인의 정체성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자기 안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조선인임이 틀림없는 제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한다. 이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남 선생에게도 똑같이 투영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하루오를 보면서 자기 안의 비굴한 마음, 굳이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 비굴한 면모를 직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이들, 식민지 시대의 지배받는 민족 출신으로 조선도 아닌 일본 땅에서 살아가며 온갖 차별과 배제를 감내해야 하는 그들에게 왜 조선인이라고 당당히 밝히지 못하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비굴할 수가 있느냐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너는 네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섣불리 비난하기에는 그들이 지닌 삶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워 보인다.


머리색이 다른 터키인의 아이조차 이곳 아이들과 씨름을 하며 순진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왜 조선인의 피를 받은 하루오만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마다 무장해야 했다. 그렇다, 분명히 나는 혼자만의 진흙탕 같은 연극에 지쳤던 것이다.  (<빛 속으로>, 42쪽)


<빛 속으로>을 읽다 보니 예전에 읽은 <패싱>이 떠오른다. 두 작품 모두 ‘정체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빛 속으로>가 민족 정체성을 다루고 있다면 <패싱>은 인종 정체성을 다룬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언뜻 보기에 외모가 거의 흡사하기에 굳이 자신이 남(南)이라고 성(姓)을 밝히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그가 미나미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이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닮은 민족끼리는 출신을 숨기는 것이 손쉬울 수 있다. 그러나 흑인이 과연 백인 행세(White passing)를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은데,  가능하기도 하다. <패싱>의 주인공 ‘아이린’과 ‘클레어’, 이 두 사람은 흑인이다. 1%의 흑인 피가 섞여도 흑인이라면 그들은 흑인이다. 그러나 선조 대대로 백인의 피가 종종 섞였기 때문인지 현재 그들은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피부색이 밝다. 아일린은 이탈리아 사람이나 스페인 또는 멕시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친구인 이 두 사람은 뉴욕의 ‘백인 전용’ 호텔에서 12년 만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흑인이면서도 백인으로 살아가도 아무런 무리가 없을 만큼 하얀 피부색을 갖고 있는 이 두 사람. 그런데 비슷해 보이면서도 이 둘의 삶은 조금 다르다. 아이린은 피부색이 짙은 흑인과 결혼해 흑인 복지연맹에서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클레어는 흑인의 정체성을 숨긴 채 하필이면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살아가고 있다. 둘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클레어는 흑인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며 아이린의 삶에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늘 평온한 삶을 꿈꾸던 아이린은 일상이 깨질까 두려워 클레어를 밀어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패싱>은 흑백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 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넬라 라슨의 내밀한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으로, 흑인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동성애자의 은유로도 읽힌다.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이 차례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패싱>, 23쪽)


아이린은 백인 전용 호텔에서 백인으로 행세하면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응시한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 뭔가 안다는 듯한 그 시선에 점차 불쾌해진다. 아이린은 그 시선 앞에 불안해 진다. ‘저 여자가 여기 드레이튼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로 자신의 눈앞에 흑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알 수 있었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하면서 당황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백인들은 그런 면에서는 허술하다고, 그들이 구별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들이라고, 그러니까 ‘손톱, 손바닥, 귀의 생김새나 치아, 그리고 다른 기준 역시 어리석은 헛소리들이긴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자신이 흑인인지 알아볼 리가 없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정체성이 발각될까봐 너무나 두려워하는 아이린의 이 모습은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성소수자가 누군가에 의해 아우팅 당할까봐,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볼까봐 극심하게 두려워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억압적인 체제 아래 게이로서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두 청년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며 그 사회를 벗어나길 바라지만 자신이 속한 체제가 가장 완벽하다고 믿는 다른 한 청년은 그 체제에 속한 채, 그곳에서 성공하며 살아가길 꿈꾼다. 자신의 성정체성 하나쯤 숨기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게이이면서도 이성애자로 위장한 채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도 알 수 없기에 그 체제를 벗어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남는다. 그러나 거기,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 남기를 선택한, 이성애자로 ‘패싱’하면서 살아갈 그에게 너는 네 정체성을 숨긴 비겁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기에,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인물들, <빛 속으로>의 남(南) 선생이나, 야마다 하루오, 야마다 정순, <패싱>의 클레어와 아일린, 그리고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의 루드비크와 야누시 이들에게 너희는 비겁하다고 양심을, 자신을 속인 채 거짓으로 살아간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민족이나 인종, 성정체성 때문에 그들이 속한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내쫓아버리는 이 인간 사회가 비난받아 마땅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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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17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성껏 써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빛 속으로>를 읽어보고 싶네요. <파친코>하고 같이 읽어볼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8-17 21:52   좋아요 2 | URL
네~ <파친코>와 함께 읽어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빛 속으로>는 짧아서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Falstaff 2021-08-1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씨. 그럼 패싱, 읽었잖아요. 후딱 백자평이나 리뷰 올려주세요!!! 전 11월? 이때쯤이나. ㅋㅋㅋ
얼핏 보면 <재즈>하고 비스무리할 거 같기도 한데 말입지요.

잠자냥 2021-08-18 22:04   좋아요 0 | URL
안 알려쥬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8-19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이제야 읽었는데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어보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결이 되네요.
‘혼자만의 진흙탕같은 연극‘에 지쳤다는 문장이 참 그 외로움 고통이 느껴집니다.

잠자냥 2021-08-19 09:21   좋아요 1 | URL
네, 역시 쿨캣 님! 제 글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셨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1-08-19 11:53   좋아요 1 | URL
앗~감사합니다 ㅎㅎ

독서괭 2021-08-20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주제로 세권을 묶어주신 이 페이퍼, 정말 좋아요! 출근길 듣는 팟캐스트에서 <마이너 필링스> 광고가 나왔는데, <패싱>이 생각났어요. 함께 읽어보고 싶네요~ 김사량은 생전 첨 들어봐요. 생전 첨 들어보는 작가 왜 이리 많니.. OTL

잠자냥 2021-08-20 12:50   좋아요 1 | URL
김사량은 처음 듣는 것도 무리가 아니실 거예요.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문학사에서 거의 지워진 이름이라서요. ㅎㅎ

- 2021-08-20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패싱… 버틀러 해설 책에서 나왔다리요 (긁적긁적)!!!

잠자냥 2021-08-20 16:38   좋아요 1 | URL
오 역시 똑똑한 쟝쟝! 제대로 읽었군요. 꼼꼼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