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의 삶을 다룬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을 읽은 다음 곧바로 레즈비언의 삶을 그린 구묘진의 <몽마르트르 유서>를 읽었다. 책을 덮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같은 성소수자, LGBT의 삶을 담고 있어도 그 안에서도 더 약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영장 도서관>의 게이 ‘윌리엄’과 ‘찰스’는 영국의 백인 남성이다. 둘 다 귀족 집안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고 옥스퍼드를 나와 한 사람, 특히 윌리엄은 거의 한량처럼 지내며 섹스에만 탐닉하고 있다. 물론 그런 와중에 스킨헤드족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동성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와중에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는 등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겪을 일이 없는 사건을 겪으며 자기가 속한 세계의 모순을 깨닫고 어떤 변화를 겪지만 그 변화는 그렇게까지 혁명적이지 않다. 그는 전보다는 성장하지만 그래도 소설의 결말은 그가 다시 눈부신 매력을 뽐내는 어린 청년에게 눈길을 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아무리 린치를 당하고, 자신의 조부가 동성애자를 학대하는 일에 앞장섰고 그로 인해 큰 이익을 얻었던 사람임에도 귀족 출신이며, 옥스퍼드를 나온 여유로운 집안의 백인 남성으로서의 지위는 변함없이 확고하게 그의 배경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에 비해 <몽마르트르 유서>의 레즈비언 ‘조에’의 삶을 보자면 첫 장부터 그리 녹록치 않다. 우선 <수영장 도서관>이라는 다소 발랄한 제목에 비해 ‘유서’라는 비극적인 단어가 들어간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마르트르 유서>의 레즈비언 ‘조에’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몰아갔을까. 이 작품의 대부분은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조에는 백인 남성은커녕 백인 여성도 아닌, 동양 여성으로 타이베이 출신이다. 유학생 신분의 그녀는 3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연인 ‘솜’으로부터 결별당한 채 그들 사이의 자식과도 같았던 반려 동물 ‘토토’마저 잃고 철저히 고독과 외로움에 휩싸인, 파리에서의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몽마르트르 유서>는 그런 처지의 조에가 헤어진 연인 솜을 그리워하며 절절히 써 내려간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글에서 조에는 때로는 솜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며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책 끝부분에 실린 솜의 편지들을 읽노라면 솜 또한 조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왜 조에와 헤어져야만 했을까? 조에의 편지를 통해 솜은 조에보다는 레즈비언으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삶을 버거워 했음을, 특히 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압박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둘의 사랑은 물론 결별에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 누가 솜의 배신을 배신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선택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여느 이성애 커플과 똑같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 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다시 <수영장 도서관>의 ‘윌리엄’이 떠오른다. 옥스퍼드를 나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아파트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파트너가 있음에도 그의 눈을 피해 일회성 만남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그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그저 쾌락만 좇는 삶,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위협도 없는 너무나 안온하기 짝이 없는 세계로 보인다. 늙은 게이 ‘찰스’의 삶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사는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다. 심지어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겠다고 윌리엄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백인 남성의 게이 섹스라이프는 회고록으로도 남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에, 이 동양인인 데다가 레즈비언 여성은 유학생 신분으로 ‘나는 예술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탁월한 예술을 완성하는 일이다’(76쪽) 말하며 글로써 자신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여러 번 다짐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세상의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 모순을 견디다 못해 결국 삶을 스스로 마감하게 된다. 고작 스물 몇을 넘긴 나이에……. ‘조에’와 ‘솜’은 왜 ‘윌리엄’이나 ‘찰스’처럼, 그 백인 남성들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그들처럼 여전히 당당하게 사랑을, 쾌락을 좆으며 살아갈 수 없었을까.
소설 속 인물인 ‘조에’와 ‘윌리엄’이 완전히 소설 속 인물로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몽마르트르 유서>의 ‘조에’는 작가 자신 그러니까 ‘구묘진’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묘진은 스물다섯 살이었던 1994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여성학을 전공하며 예술가로서의 꿈을 꾸며 살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유작인 <몽마르트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자살은 소설 속 ‘조에’의 삶이 그러하듯이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던 인습과 차별, 억압으로 가득한 세계와의 싸움에서 결국 패배하고 만, 아니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것이다. <수영장 도서관>의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 역시 성소수자, 게이이다. 백인 남성으로 ‘윌리엄’처럼 옥스퍼드대를 나왔고 게이의 삶을 다룬 소설 <아름다움의 선>으로 2004년에는 맨부커상을 받으며 작가로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성소수자로서의 삶이 소설의 재료가 되어 그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데, 왜 같은 성소수자인데도 한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저 대만 퀴어문학의 전설과도 같은 별로 남아야만 했을까. 전설과도 같은 별이 아니라, 지금도 태양처럼 빛나며 작품 활동을 할 수는 없었을까. 차별 속의 차별, 억압 속의 억압이라는 말이 <몽마르트르 유서>를 읽고 난 뒤 내내 떠나지 않는다. 구묘진, 아니 ‘조에’가 만일 동양인 여성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었다면 아무리 연인을 잃었다 한들 스스로 세상을 등졌을까. 어쩌면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연인을 잃어버리는 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에의 죽음을 지켜보며 모든 차별 속의 차별들, 억압 속의 억압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