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토요일인 오늘, 나는 회사에 나와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꼭 이렇게 토요일에도 근무한다. 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친네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라 어쩔 수가 없다. 임시공휴일도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토요일은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 종종 있어서 회사는 평일보다 한적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보다 마음이 편하기는 하다.

점심시간이 다 됐을 무렵 상무님이 내 자리로 슬며시 오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산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하신다. 이건 사장님께서 점심을 사주신다는 신호다. 모든 직장인이 그러할 터인데, 윗사람과 함께 먹는 점심을 좋아할 직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의 직장인은 점심때만이라도 자유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렇다. 게다가 오늘은 대충 때울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김밥 두 줄을 사왔는데, 이걸 고스란히 다시 갖고 갈 생각을 하니 살짝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저, 점심 싸왔는데…….” 중얼거려도 소용없는 항의.

나 말고 다른 직원 한 사람까지 더해서 상무님과 우리 세 사람은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걷는다. 사장님은 이미 그곳에 가 계신 모양이다. 머릿속으로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장님은 뭔가 특별한 일을 시킬 때 이렇게 미리 밥을 사주시곤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비가 퍼붓는 구질구질한 장마. 습도도 높고 내리는 비에 바지가 젖는다. 그래도 상무님은 계속 앞서 걸으신다.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길 건너에 재래시장이 보인다. 여기까지 오니 동료는 목적지가 어디인 줄 알아차렸는지, 아아, 한다. “국숫집 가나 봐요.” 사장님과 나는 이쪽까지 온 적이 없는데, 이 직원은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가 보다.

재래시장에 들어서니 사장님이 보인다. 노인은 우산을 쓰고 어느 과일 가게 앞에서 과일을 열심히 고르고 있다. 과일 가게 주인은 포도 상자를 포장 중이다. 그러더니 한 상자씩 우리에게 건넨다. 집까지 들고 가기 쉬우라고 커다란 검은 비닐에 그 포도 상자를 넣어준다. 동료가 먼저 받고, 나도 한 상자 받고, 상무님도 한 상자 받는다. “포도가 너무 맛있게 생겼어.” 사장님이 말씀하신다. 동료는 나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아, 저 오늘 약속 있는데…….”하며 커다란 검은 봉지를 난처한 듯 바라본다. 노인은 종종 이렇게 상자째 뭔가를 덥석 안겨준다. 기프티콘을 모르는 분이라 크리스마스 때는 케이크 상자를 안겨주고, 때로는 수입과자점에 대뜸 끌고 가서 과자를 한아름 사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포도 한 상자다.

과일 가게를 지나 국숫집으로 향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았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다들 포도 상자가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망연히 서 있는데, 사장님이 대뜸 “냉면 좋아하지?”하더니 성큼성큼 앞서 걸으신다.

도착한 곳은 함흥냉면집. 전쟁 이후부터 줄곧 그 자리에 있었던 냉면집으로 꽤 유명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십대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대학생이던 그때, 친구와 그 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왔던 곳이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그 냉면집. 사장님은 회냉면 4개를 주문하고는 당신 나름의 추억에 잠긴다. “여기 와본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지.” 소년 시절부터 고생고생해가며 자수성가한 이 노인은 굶주렸던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때 처음 먹은 냉면 맛을 예찬한다. 포도도 참외도 모양은 하나같이 예전보다 다 예쁜데 맛은 왜 그때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며 비 온다고 포도 상자 내버리지 말고 집까지 잘 가져가서 엄마랑 먹으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냉면집을 휘 둘러본다. 스무 살 즈음에 왔던 이곳- 그때는 다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 앉아서 냉면을 먹었다. 어쩌다 친구 부모님과 이 냉면집까지 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냉면이 먹고 싶다 하셨고, 그 바람에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나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이 냉면집을 찾았던 것 같다. 친구 어머니는 그때 신장이 안 좋아서 일주일에 한번은 꼭 투석을 받았다. 엄마가 아프니까 외출을 자주 못했던 친구 집에 내가 종종 놀러가곤 했던 그 시절. 그러다 보니 그 애 부모님과 나는 뜻하지 않게 많은 식사를 함께 했던 것 같다. 그날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차에 옮기고, 다시 휠체어에 태우는 방법으로 냉면집까지 갔다. 그렇게 힘들게 가서 냉면 한 그릇을 참으로 맛나게 싹싹 비우던 그 애 어머니.

그분은 몇 년 뒤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오늘처럼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엄마가 너 예뻐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 볼래?”라던 친구의 말에 얼떨결에 “응”하고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그분의 마지막, 아니 죽음 후의 첫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게 지금까지도 내가 유일하게 본 죽은 사람의 모습이다. 빨갛게 얹힌 양념 위에 잘 버무려진 명태회 몇 점. 식초와 겨자를 곁들여 새콤달콤한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자꾸만 그분을 떠올린다. 어느새 그릇이 비었다. 냉면 가게를 휘 한 번 더 둘러본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쳤다. 또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 내가 이 냉면집에 우연히 다시 온다면 그때도 그분을 떠올릴까, 아니면 오늘 포도 상자를 안겨준 이 노인을 떠올리게 될까.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쟝쟝 2020-08-01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따수운 글이어서 댓글 남기고 가요. 고즈넉한 오후 보내세요.

잠자냥 2020-08-01 16:20   좋아요 0 | URL
네~ 비오는 휴일 오후 편안하게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08-01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짝 빡친 건,
점심을 사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오전 근무로 알았는데... 토욜날!
점심까지 멕이고 무언가 일을 더
시키겠더라는. 삐삐삐삐삐 ~~~

잠자냥 2020-08-01 17:59   좋아요 0 | URL
하하하, 토요일도 저희는 점심 지나서까지 일합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0-08-0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공감되는 글 잘 보았습니다. ^^

잠자냥 2020-08-01 2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리제 2020-08-0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따뜻해요. 비 살짝 맞은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지 더 좋아요^^

잠자냥 2020-08-01 21:26   좋아요 0 | URL
비가 내려서 그런지 글이 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20-08-1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로 보면 이렇게 놓치는 글이 생겨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서재는 이름찍고 한 번씩 정기적 방문을 해줘야 합니다. 그랬기에 이 글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저는 냉면에 얽힌 추억이라고 하면 아름답기보다 뜨거운 것이어서 여기에 풀기는 좀 거시기하고요, 그러나 잠자냥 님의 고운 추억만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0-08-10 11:07   좋아요 0 | URL
휴가인데 당연히 북플이고 알라딘이고 컴퓨터고 멀리 해야죠. ㅎㅎ 이제 일상으로 복귀하셨군요.
저도 지난주 중반부터 휴가였는데, 코로나에 기록적 폭우에 어디 여행 꿈도 못 꾸고 그저 방콕한 휴가였어요.
다락방 님은 그래도 여행도 잘 다녀오신 것 같아 흐뭇합니다.
그나저나 냉면에 얽힌 뜨거운 추억 궁금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