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선정되었다고 여기 저기서 축하하는 사이 그 이면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파괴는 까마득하게 잊었지고 있다. 화려한 환상 속에 살도록 부추기는 매체의 노예가 되어, 관광객 유치로 이어지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말이다. 환상을 넘어 실재의 모습은 세계 7대 자연 경관이라는 거창한 표어와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항공카메라로 잡는 그 프레임 너머에 존재한다. 구럼비(강정마을 앞 바위)의 파괴가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먼 곳의 일이기 때문에 관심 또한 그 거리만큼 멀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이라고 기꺼이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강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앞에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부안처럼 용산처럼 또 다른 무엇처럼 그렇게 또 그렇게 말이다. 사건은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사건의 촉발에 즉각 반응하는 신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의 정치에 귀기울이고 그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안팎의 경계에 설정하고 밖이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경계를 허물 수 있을까? 너무 늦게 반응하면 그만큼 고통은 크고 아픈데도 말이다.

<잼 다큐 강정>은 안과 밖의 소통을 위해 10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8명의 감독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다급한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물론 다큐이지만 기획된 프레임은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도 또 다른 환상(고통스럽고 안타까운 환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본에 포섭된 화려한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이와 같은 또 다른 환상을 통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를 '환상의 부정성'이라고 하면 어떨까? 환상의 부정을 통해 결국 그 환상조차 넘어서야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부정을 말이다. 어쨌든 이 다큐는 자본에 포섭된 매체의 화려한 환상 너머 실재를 또 다른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 환상에 사로잡혀 함께 안타까워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환상 너머 실재를 우리가 직접 발견하고 꿋꿋히 확인해야할 것이다. 

어떻게든 경험하자. 실재(환상)를...그리고 그 너머를... 

그리고 변화하는 나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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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성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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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기적 포토 보기  

엔리케 듀셀의 최근 책 <<1492년, 타자의 은폐>>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타자의 발견(discover)은 발견되는 즉시 은폐(cover)되는 주체의 동일화 전략이라고 한다. 즉,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예로 들어 내가 만든 틀 속에서 나 밑에 위치시키며 내가 만든 구조 속에서 강제적으로 따라 하게 만드는 그런 동일화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체의 동일화 전략 속에는 위계 서열화가 구조화되어 있고 그 위계 서열화를 특권화할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관계라고 하는 수사를 통해 특권화를 숨기며 배제되는 타자를 지속적으로 은폐한다. 이런 타자의 은폐는 역사적으로 차별이며 배제이며 절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듀셀이 '긍정'하는 진정한 타자의 발견은 무엇인가? 이는 은폐(cover)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 타자성을 나와 동일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타자성을 간직한채 차별과 배제 없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로의 기적은 보는 주체의 입장에서 은폐된 타자의 발견이며 또한 말하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은폐되었던 타자를 스스로 등장시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동일화 전략에 온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성장한 나의 몸 때문에 이러한 타자의 등장이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기도 하겠지만 그 몸을 변화시켜야 하며 또한 타자의 등장을 즐겁게 받아들일 몸으로의 전환을 기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은폐된 타자의 발견 아니 타자의 등장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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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자본-국가-민족(국민)의 삼위일체에 의해 운용되며 그 생명력이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쪽이 위기에 처해지면 다른 쪽이 보완하는 형태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독립된 하나(자본 또는 국가 또는 민족)만을 문제삼아 극복하는 것은 잘못된 대응이라고 하며 그 대안을 어소시에이션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이 책의 결말이며 대안적 실천의 장인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정리글이다.  

어소시에이션은 3가지 교환양식 중 자본주의와 관련이 있는 상품교환을 중지시키기 위한 호수 또는 호혜를 기반으로 하는 교환양식이 중심인 공간이다. 특히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서와 같이 고진은 단순한 어소시에이션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호혜적 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과 함께 그런 공동체간의 호혜적 교환이 지속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품교환을 중지시키는 호수적(호혜적) 교환의 어소시에이션에 대해 고진은 생산자협동조합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우리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이 둘의 연결을 주장하며 생산자협동조합뿐만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도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동체의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을까? 즉, 맑스가 말한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며 이럴 경우 자본주의에 의한 상품교환은 숨이 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생산자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을 확대 강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진은 프루동과 맑스의 경험을 통해 이에 대한 해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고진의 주장을 되돌아보면 알다시피 3가지 교환양식 중 또 문제가 되는 교환양식이 국가에 의한 약탈-재분배양식이다. 이 양식은 상품교환양식과 병행하여 서로 의존하고 있다. 서로 기대어 부양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상품교환양식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약탈-재분배양식도 중지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도되었던 것이 우선 프루동과 같이 생산자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을 국가가 조장해야한다는 주장과 혁명을 통한 국가를 어소시에이션이 대체해야 한다는 맑스의 주장이다. 경제혁명과 함께 정치혁명이 동시에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맑스는 정치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국가의 소멸이 진정한 해방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고진은 강조한다. 즉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해서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 투쟁을 통해 국가를 해체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던 파리 꼬뮨과 소비에트를 생각하면 이점은 충분이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혁명 이후에 해체되어야할, 맑스의 표현으로 보면 어소시에이션에 의해 대체되어야할 국가가 오히려 강화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 지점이 고진의 독창적인 주장이며 이 지점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즉, 국가들을 제어할 수 있는 세계공화국의 건설을 주장한다.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상품교환이 중지되는 경제혁명 또한 내부적인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 때문이다. 화폐도 또한 국내적 유통에 사용되지만 이를 넘어서 국제적 결재수단이다. 어소시에이션 안에서의 대체화폐 또는 신용화폐만으로는 자본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고진은 맑스를 넘어서고 있는 듯 보인다.

자! 이제 고진의 최종 결론을 정리해 보자.

고진의 결론은 조금 허망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하면 그걸 만들 수 있는지는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국가와 자본의 공생관계를 끝장내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지점에서 실패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우리들에게 실패를 딛고 또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의 해결은 경제 및 정치혁명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운동만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운동(“국가들을 ‘위로부터’ 封함으로써”)을 통한 글로벌 커뮤니티의 실현이다. 그 단초는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한 ‘국가연맹’ 구상에 기초하고 있이다. 이미 역사 속에서 2차례 전개된 예가 있다. 1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국제연맹이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국제연합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칸트에게서도 현실주의적 타협안에 지나지 않았기에 현실적으로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들을 위에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여전히 미국을 비롯한 패권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이제 고진의 철학적 기초인 칸트의 평화론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224~225쪽 요약) 현재 인류의 긴급한 과제를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전쟁, 환경파괴, 경제적 격차가 그것이죠.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죠. 더불어 이것들은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일국 단위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에 대항하면 좋을까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게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국가들을 ‘위로부터’ 봉(封)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물론 이 실현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길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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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 사단의 개념사 사전은 개념을 역사적으로 따져 묻는 것인데 그 이유는 개념의 역사철학적 성격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즉 목적론적인 기대지평을 개념이 가지고 있고 이런 개념의 역사를 묻는 것은 현재는 물론 미래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문명과 문화 개념도 이같은 기획 속에 독일에서의 문화가 역사철학적 운동 개념으로 포착된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또한 독일사의 측면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관점에서 문화와 문명을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화 개념은 독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였던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문화 개념은 거의 쓰이지 않고 문명 개념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프랑스어의 독일 진출로 인하여 독일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인 문화와 문명 간의 구별이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보다 더 논쟁적으로 진화되었고 이 과정에 문화와 문명 개념은 동의어에서 반의어로 위치되게 되는 단초가 18~19세기 사상가들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문화와 문명 개념에는 민족주의라든지 인종주의가 개입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개념으로 넘어설 단초는 이 시기 점차 내포하기 시작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일반인에게까지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문화와 문명 개념을 퍼진 것은 아마도 진보 개념과의 결합 이후 20세기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재미난 것은 교양과의 관계인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교양은 문화와 동의어였다는 것이고 이후 구분되고 있는 점이다. 이 장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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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와 19세기 초: 현대적 문화 및 문명 개념의 생성
(외르크 피쉬,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푸른역사, 2010)


1760년대 이래로 ‘문화’라는 개념은 독일에서 폭넓게 확장되는 동시에 대중화되었으며,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는 ‘문명’이라는 신조어가 동일한 기능을 떠맡았고 이 두 개념은 늦어도 1815년에는 일종의 의미의 스펙트럼을 형성했다고 한다.

1. ‘문화’
프랑스: 개념 발전의 중단
프랑스에서 문화 개념은 농업적 의미로부터 비유적인 영역에서는 ‘마음의 가꿈’이라는 전통이 전면에 나서며 이와 연결되어 개인적인 ‘교육’, ‘교양’의 의미가 중심이 되었다. 이어서 이와 같은 개인적인 개념은 “특정 집단, 제 민족들, 심지어 인류에까지” 확장되었다. 한편 ‘문화’는 농업적 의미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가치였으나 교육의 영역으로 옮겨 감에 따라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실천에 대한 비판(예를 들면, ‘좋은 문화’ 또는 ‘해로운 문화’ 등)에도 스스로를 개방했다. 이 때문에 이 개념이 더욱 드물게 사용되었고 ‘문명’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독일: 역사철학적 운동 개념으로의 확장
처음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프랑스처럼 개인적 정신문화와 교양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안에 현대적 문화 개념의 기본 특징들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문화 개념이 널리 확산되고 동시에 내용적 발전을 이룬 이유는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사유 및 역사철학적 사유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역사를 신학적 전통에서 분리시키고 그 흐름에 의미를 채워 넣기 위해서는 인간 특유의 업적을 개념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 개념은 역사철학적 기획에 종속되어 그것을 위한 일종의 공명체가 되었고 여기서 운동 개념의 특수한 성격이 드러나는데, 즉 인간의 문화 업적들을 단순히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시각 안에 세워 놓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 개념의 대상은 그 고유한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되려면 개념의 확장이 필요한데, 우선 개인에서 집단으로, 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어서 농업, 교육, 학문들과 같은 개별적인 능력 또는 영역들로부터 인간의 모든 생산물들로 이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 혹은 그 환경의 교양화라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그 결과물(교양화된 인간과 문화 생산물들)에 이르는 이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범위는 독일에서 이미 포괄적인 문화 개념에 도달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정에 집중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이어빙, 헤르더
문화 개념을 가장 일찍 주제화한 것은 이어빙(“인류 전체의 문화에 관한 시론”)이며 그는 여전히 ‘문화’를 교양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미 결과의 요소도 담고 있다. 문화 개념의 폭넓은 확장과 전파는 뒤이은 헤르더(<<이념>>)를 통해서다. 헤르더는 이 책에서 문화의 전통적 의미인 농업적 의미를 자주 사용하면서 정신문화와 교양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넘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또한 한 민족을 문화의 담당자로 보며 역사화한다. 따라서 그에게 한 민족의 역사는 동시에 그 민족의 문화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의 복수성을 강조하거나 보편적 통일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개별 민족의 문화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역사라고 하더라도 인류 진보의 정도는 회의적이다. 한편 헤르더는 문화를 유/무로 개념화한 전통 및 미래와 달리 문화는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곳에서는 가장 낮은 단계라도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더불어 그의 문화 개념은 긍정적인 가치(‘참된’ 문화로서의 인간성)를 지닌다. 그리고 그의 문화 개념에는 사회적 요소가 강조되고 국가와 정치는 제외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종속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정치적이라든가 탈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처럼 헤르더의 한 민족의 문화, 즉 ‘국민문화’는 그가 개별 문화의 운동에 집중하는 세계시민이기는 하지만 그 개념을 민족주의적으로 징발하는 중요한 전제 조건을 마련토록 하는 양가적인 유산이었다. 단, ‘국민문화’와 ‘문화민족주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 보편 개념으로의 확대
18세기 말 문화 개념의 진정한 새로움은 개념이 민족사 혹은 인류사 속에 편입된 것이다. 이어빙을 거쳐 아델룽에 의해 문화사가 역사 서술에서 우선권을 부여받는다. 아델룽의 ‘문화’가 본질적으로 ‘교양화’와 ‘교양화된 상태’에 그쳤지만 최초의 보편적인 주장으로 인하여 유사한 표현들을 제치고 개념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1801년 예니쉬였다. 그는 문화를 “발전, 교양, 훈련” 등과 “깨달음과 계몽-완성과 고귀화-그리고 기타 몇몇 비슷한 단어들”을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이어 카루스가 문화를 완전한 현대적 개념 범위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즉 본래의 문화는 결과물들에 한정하였으며, 이에 반해 그 과정들은 교양화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물론 이 정의는 일반인의 어법에 반영되지도 카루스 자신에 의해 항상 지켜지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간명화 및 한정화 시도
카루스에 이르러 ‘문화’가 보편 개념으로 확립된 이후 의미 영역의 확대가 아니라 천박화와 변질화를 겪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를 간명하게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먼저 성과는 없었지만 한정화 시도는 1784년 멘델스존에 의해 문화(‘연마’/‘도덕’으로 구분)와 계몽의 구분을 통해 진행되었다. 이에 반해 1790년대 피히테와 실러는 문화의 자명해진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하고자 했으며 문화 개념은 역사철학 속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개념의 개인화(“자유로의 교화”)와 주관화가 이루어진다. 한편 피히테가 문화 개념을 민족주의로 전환하였다고 하며 ‘문화’가 특수하게 독일적인 것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독일의 우월성이 주장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문화 개념의 세계시민적 성격을 간접적으로 매우 분명하게 인정하였으며 ‘문화’가 민족주의적 여운을 풍기는 일은 단지 산발적으로 발견될 뿐이다. 피히테가 좀 더 상세하게 긍정적인 개념으로 규정하였다면 실러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즉 실러에게 문화는 자연상태로부터 인간을 빠져나오게 할 경우 “문화의 압박과 문화의 해악”으로 운위되고 다시 자연상태로 회귀시키는 문화는 “아름다운 문화” 또는 “미적 문화”로 구상되었다. 문화 개념을 역사철학적 구상 아래 종속시킨 것은 셸링에서 뚜렷해진다.

2. ‘문명’
이탈리아어의 ‘civilta’를 빼고 유럽의 언어들 중 ‘civis’에서 도출된 모든 표현들(‘civilitas, civiliser, civilise, civilite, civility’)이 18세기 중엽에 ‘cultura’보다 근본적으로 제한된 수용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영어는 신조어 ‘문명civilisation’의 길로 갔다.  


프랑스
1756년 미라보 1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단어 ‘문명’은 본질적으로 능동형이었고 이 때문에 ‘문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명화 과정과 문명화(결과)는 철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이미 문명의 현대적 의미, 특히 역사철학적 맥락 속에서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문명’이 ‘문화’와는 달리 민족들 혹은 인류 등 집단과 관련된 점이며, 다음으로 결정적인 것이 진보와 도덕의 이원론으로 ‘문명’은 운동, 변화, 분화를 의미하며 가치중립적이기 해도 미라보에 의하면 부정적인 측면과는 관련이 없었다. 한편 초기 개방성을 제외하고 ‘문명’은 ‘문화’처럼 포괄적이며 나눌 수 없는 개념이 되며 경험적으로 다양한 문명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하나의 문명의 구성 성분들이 되었다. 1770년대 초반 ‘백과전서파’ 안에서 새로운 개념이 이미 널리 퍼졌고, 문명의 진보와 무제한적인 인류의 진보가 일치하고, 도덕은 별도로 주제가 되지 않았다. 자주 사용하면 할수록 ‘문화’와의 유사성이 드러났고 점점 더 일종의 역사 발전의 지표가 되었다. 개념 내부의 구분(‘문명’의 반대는 ‘야만성’과 ‘조야성’)도 애초부터 분명했다. 한편 ‘문명’은 집단과의 관련성이 더 강하기 하였지만 ‘문화’보다 더 정치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독일의 ‘문화’와 프랑스의 ‘문명’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다면 중요한 차이점은 18세기 독일의 ‘문화’는 민족주의적 의미부여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반하여, ‘문명’은 1767년 미라보에게서 그 단초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문화 개념과 프랑스의 문명 개념은 기본 특징에서 폭넓은 부분에서 서로 일치하며 개념이 가리키는 실상들은 비본질적인 점에서만 서로 구분된다. 대신 차이는 오히려 언어적 전제들(‘문화’와 ‘문명’)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
법률적 의미의 ‘civilization’은 영국에서 더 빠른 시기(1704~1710)에 확인되며, 예절로 축소된 ‘civility’는 종종 ‘문명화된 상태’라는 의미를 지녔다. 영국에서 없었던 의미는 오직 문명화라는 역동적 요소뿐이었다. 프랑스와 같은 의미는 1767년 퍼거슨에 의해 발견되는데 이때도 프랑스의 경우보다 집단적인 측면이 더 분명하며 긍정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척도)가 부과되지는 않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 측면인데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에 이 개념의 정치적 편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한층 분명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였다. 1770년대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 미국의 ‘문명’ 개념은 토머스 페인에 의해 정치적 강조가 정점에 다다랐다. 페인은 문명을 정부의 혁명적 전복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문명과 사회는 그 당시 정부와 반대극을 이루었다. 하지만 1797년에는 문명과 정치 생활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독일
1770년대 독일에서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civilisation’이 수용되었고 이때는 이미 ‘문화’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문화’로도 번역되었다. 이 표현은 이후 확산되지 못하다가 1800년경 ‘문화’의 그늘 속이지만 유행하게 된다. 이때 두 가지 의미의 갈래가 형성되는데 그 하나는 ‘문명’과 ‘문화’를 구별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개념이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18세기 ‘civilte’는 ‘civilitas’의 옛 의미들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civilta’가 문명 개념의 기능들 중 일부를 받아들였고 (문명화) 과정의 요소가 빠져 있다는 약점은 ‘civile’라는 형용사와 결합함으로써 지칭할 수 있었다.

3. ‘문화’와 ‘문명’을 구별하려는 시도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문화’와 ‘문명’은 같은 상황, 같은 필요에 의해 도입된 이래 실상을 구별하기 위한 보충이나 대립의 형태로 언어의 구분(이분법)이 필요했다. 특히 독일에서 먼저 두 개념의 구분이 시도된 이유는 특히 프랑스어가 독일어에 미친 영향이 그 역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고, ‘문화’가 신조어 ‘문명’보다 더 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며, 헤르더 이후 문화 개념을 둘러싼 독일에서의 논쟁이 ‘문명’에 관한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의 논의보다 더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정상적이지 않았고 시도들 간의 차이도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들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도 중에 이후의 문화-문명 간의 대립을 규정할 요소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칸트, 훔볼트, 볼프, 페스탈로치
‘civilisation’을 사용한 당대의 저술가를 참조하지 않고 오직 루소를 참조하여 발전시킨 칸트의 ‘문명’ 개념은 ‘문명화Zivilisierung’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의 발전과정을 교양화-문명화-도덕화로 파악한다. 여기서 문화와 문명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은 ‘도덕성’과 사이에 대립한다. 더불어 문화는 도덕성까지 포함된 개념이다. 반면 문명화는 17세기와 18세기의 예절 개념으로 명백히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좀 더 긍정적인 ‘시민 미덕civilitas’이라는 의미를 재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문명화를 낮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문화’와 ‘문명화’ 사이에는 명백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칸트의 ‘문명화’는 ‘civilisation’처럼 능동의 의미로 쓰인다고 해도 이를 수용하거나 독일어화한 것이 아니라 독일어에서 새로운 단어를 채택한 것이다. 물론 이 신조어는 옛 요소들과 새 요소들 사이의 대립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몇십 년이 지난 후 훔볼트에 이르러서야 몇 가지 구조적 일치점이 나타났다. 훔볼트는 종종 두 개념을 나란히 사용한다. 더불어 두 개념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이유는 ‘교양’ 때문이다. 훔볼트의 경우 칸트처럼 ‘문화’와 ‘문명’이 제3의 변수인 ‘교양’과 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양’은 칸트의 윤리적 추구를 실러의 미적 추구와 결합시킨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훔볼트의 ‘문명’에 대한 이해는 사회적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옛 ‘civilitas'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볼프는 고대학을 통해 두 개념의 대립을 전개하였다. 즉 생존 목적과 관계되는 좀 더 낮은 문명과 정신적 혹은 문학적인 좀 더 높은 문화의 대비가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화’는 여전히 상위 개념으로 남아 있고, 문명은 문화의 일종이 된다. 물론 이런 구별은 고대학에 국한된다. 다만 그 영향은 더 폭넓게 미치게 되어 유럽 민족들 간의 구분은 아니지만 유럽과 비유럽간의 구분으로까지 나아간다.
페스탈로치에 이르면 ‘문명’과 ‘문화’의 대립은 거의 최고조의 근본적 논의에 이르며 전체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신적 투쟁으로까지 고양된다. 물론 일반인들의 의식에까지 이런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페스탈로치는 그간 ‘문화’와 ‘문명’의 정반대 극에 있던 ‘야만성’, ‘조야함’, ‘미개함’의 전통을 벗어나 ‘야만성’ 자리에 ‘문명’을 위치지운다. 이제 문명은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 문화와 대립되게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구분의 위험인 특정한 민족들이 더 이상 인가이 아니라 단순히 동물적이고 문명화된 존재로 취급되는 것은 아직 페스탈로치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유럽과 비유럽 간의 대립이 아니라 유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 내부에서 민족적 구분이 나타난다. 어쨌든 늦어도 1835년에는 ‘문화’와 ‘문명’ 간의 날카로운 구별을 위한 제 요소들이 독일에서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페스탈로치에게는 두 개념의 공통된 토대(문명은 교양의 한 형태)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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