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 문화동역학 라이브러리 3
정병욱.이타가키 류타 엮음 / 소명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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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푸코의 책<<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2)을 읽어서일까?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소명출판, 2013)는 일기 등 에고도큐멘트가 이른바 권력에 의한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품행' 지도는 물론이고 도리어 그에 대항하는 '대항품행'의 형성까지 생성시키는 이중적인 것임을 잘 드러내준다. 일단 이 책은 서구 역사학에서 최근 들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에고도큐멘트에 관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에고도큐멘트는 '자기증언'이라는 실천적 행위의 글들을 수집하여 연구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증언의 자료란 일기를 비롯한 자서전(소설 포함), 편지 등 개인이 쓴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간 역사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이용되던 지극히 일반적인 인물들의 개인적인 기록물들이 이른바 민중사로부터 시작된 아래(밑)으로부터의 역사 및 미시사의 영향아래 새로운 역사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기는 근대 이전에도 쓰여지긴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적이지 않은 공공성을 지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일기를 썼고 이를 가족이 모두 열람하는 등 전혀 사적이지 않았다. 반면 근대에는 프라이버시 탄생과 함께 일기는 숨겨야하는 지극히 사적인 것을 표방하며 대중적으로 폭넓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부모와 선생을 통한 국가권력의 검열을 당하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근대의 일기는 사적이면서도 근대 이전과 다른 의미에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연구에서 근대적 개인(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일기쓰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기는 근대적 개인의 주체성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장치로 사용이 되었다고 해서 단순히 자아성찰이나 개인의 일상을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집단기억을 드러내주는 창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고도큐멘트라는 지위를 획득하며 일기쓰기와 일기의 내용은 주체를 형성하는 측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일기와 같은 자기증언은 그러한 국가권력이 인도하고 지도하는 품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에 대한 대항품행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개별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니시카와 유코의 <근대에 일기를 쓴다는 것의 의미>에서는 국민교육장치로써의 일기와 그로부터의 일탈의 예를 동시에 제기하는데 후자의 예가 나카이 히데오의 반전일기와 전쟁 직전 농민들을 봉기시켜 자치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여성 아나키즘 운동가인 야기 아키코의 일기이다. 둘다 국가권력에 의한 품행의 내면화된 신체로부터 일탈된 모습을 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편, 김무용의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유족의 자서전 분석>에서는 일기는 아니지만 민간인 학살 유가족의 그간 생활과 달리 자서전 쓰기가 국가에 충성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문제삼아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대항품행을 형성하였다는 실례를 그/그녀들의 자서전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학살 이후 권력에 의해 강요된 삶(반공투사)을 자선전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 형성과 대항품행의 장을 열고 있음은 주목할만 하다. 이처럼 이 책은 일기와 같은 자기증언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권력과 개인과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읽고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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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최근 번역된 그의 책 <<리퀴드 러브>>(새물결, 2013)의 <'네 이웃을 사랑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는 문명화된 삶의 기본 수칙 중 하나인데 자기 이익과 행복의 추구라는 논리에 가장 반하는 말이기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로 오히려 자기애와 타자애는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의미있는 글귀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하나하나의 인간 존재의 인간-임에서 기인하는 삶의 존엄함과 그에 대한 존중은 다른 가치들 - 그것이 얼마나 양적으로 많고 엄청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 에 의해서도 능가되거나 보상될 수 없는 지고의 가치와 결합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가치들 또한 오직 인간의 존엄성에 기여하고 그러한 대의를 진작시킬 때만 가치일 수 있다...다른 인간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생존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고 살아남으려는 것이다."(195쪽)

 

바우만이 위와 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단 한 사람을 굶겨 죽이거나 죽도록 만드는 것은, 아무리 그러한 대가를 치르게 할 합리적이고 심지어 고상한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합당하게 치를 만한 대가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임/됨의 삶이란 존엄성이지 숨쉬는 것은 아니라고 어린이를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 유대계 교육자 헨릭 골드슈미트(코작)의 예를 들어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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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지음, 오트리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 2012, 난장

 

9. 영혼의 사목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의 이동

9장에서 푸코는 영혼의 사목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 이동한다. 먼저, 영혼의 사목제도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의 이행의 일반적 맥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 번째, 16세기 사목의 위기와 품행상의 저항, 반란, 봉기라는 거대한 일반적 풍토가 있었다. 두 번째, 종교적 사목제도의 재조직화로서 상이한 개신교공동체의 형태로 이뤄진 재조직화와 반종교개혁이라는 형태로 이뤄진 가톨릭의 재조직화가 있었다. 이들은 대항품행의 전형적 요소를 상당수 재통합한 셈이다. 세 번째, 사목에 대한 봉기를 활성화하고, 지지하고, 연장시킨 거대한 사회적 투쟁인 농민전쟁이 있었다. 네 번째, 봉건적 구조가 이제 더 이상 충분하고 유효한 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새로운 경제적 관계들, 따라서 정치적이기도 한 관계들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종교적 주권의 거대한 두 극(제국과 교회)이 소멸했다.

그러나 사목은 16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 푸코는 주목한다. 우선, 영적 차원과 세속적 외연(물질적 일상적 세속적 삶)에서의 종교적 사목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또한 교회의 권위 바깥에서도 인간을 인도하는 일이 발전했다. , 사적인 영역에서도 철학적 실천의 범주이자 형식인 인도와 자기 인도의 문제가 재등장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훗날 정치적 영역)에서도 인도의 문제(영혼의 인도라는 주권자의 임무)가 등장한다. 이렇듯 16세기와 더불어 인간은 품행의 시대, 인도의 시대, 통치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리고 품행 문제가 폭증함으로써 과도하게 부과되고 규정된 문제가 이 시기 아동교육의 문제이며 이 문제는 인도의 문제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근본적인 유토피아, 결정, 프리즘이다.(아동의 탄생?)

이제 인간의 통치로 넘어가 보자. 주권자의 인간 통치는 사목적 합리성과 다른 통치합리성인 통치이성에 의해 근거해야 하는데 이에 관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푸코는 살펴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군주의 통치는 주권의 행사에 비해 특유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통치의 유비를 통해 왕은 신, 자연, 목자 및 가부장과의 유비와 연속(우주론적-신학적 연속체)체라고 한다. , 주권자가 자신의 주권을 확대하고 중단 없이 행사하면서 통치할 수 있고, 통치해야 한다면, 그것은 왕이 신에서부터 시작해 자연이나 목자를 거쳐 가부장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연속체의 일부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이 거대한 연속체는 깨지고 일종의 교착, 일종의 근본적 교차가 일어난다. , 새로운 앎의 배치가 가져온 효과 중 하나로 근본적으로 신이 총체적 법, 불변적 법, 보편적 법, 단순하고 인지가능한 법, 계측과 수학적 분석의 형태로, 박물학의 경우에는 분류적 분석의 형태로, 일반문법의 경우에는 논리적 분석의 형태로 접근가능한 법을 통해서만 지배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사목의 방식(구원의 체계, 복종의 체계, 진실의 체계)으로 세계를 통치하지 않고 여러 원칙을 통해서 세계에 주권적으로 군림한다는 것(우주 또는 세계의 탈통치화)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에게 신이나 자연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없는 주권과 관련해 일종의 보충물, 사목과 관련해 차별성과 이타성이 요청되는데 통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주권 이상의 것, 주권과 관련한 보충물, 사목과는 다른 것, 모델을 갖지 않는 어떤 것, 모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어떤 것이 통치술이다. 그렇다면 통치술이란 한편에는 자연이 통치적 주제로부터 단절된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성의 지배만을 받아들이는 자연, 즉 자연원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에 대한 주권(통치이성, 즉 국가이성)이 있다. 그리고 조반니 보테로에 와서 자연원칙과 국가이성, 자연과 국가라는 근대 서구인에게 부여됐던 지식과 기술의 두 거대한 참조물이 결국 구성되거나 결국 분리됐다.

이어서 국가이성에 대해 살펴보자. 국가이성은 16세기 말~17세기 초의 모든 사람이 뭔가 완전히 새로운 현실, 혹은 완전히 새로운 무엇,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심지어 일종의 혁신이자 추문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고 푸코는 국가이성을 둘러싼 논쟁의 요점을 마키아벨리, 정치, 국가를 통해 확인한다. 먼저 마키아벨리이다. 이미 4강에서 푸코는 마키아벨리가 구출하고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대상과 군주의 관계였고, 군주가 구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영토, 인구와 자신이 맺는 권력관계로서의 공국이었기 때문에 통치술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도 마키아벨리는 다양한 가치, 때로는 부정적이고 때로는 거꾸로 긍정적이었던 가치를 지니며 논쟁의 핵심에 있었다. , 통치술을 정의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지만, 그가 말한 바를 통해 통치술이 탐구된 것이다. 국가이성의 반대자들은 마키아벨리를 통해 합리적이고, 만인의 선을 위한 것이고, 신의 법이나 자연의 법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통치술은 실상 존재하지 않고 근거도 없으며 기껏해야 찾는다면 군주의 변덕과 이해관계(이익)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 국가이성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은 마키아벨리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마키아벨리주의자를 거부한다고 강변한다.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양쪽 모두에게서 거부당한다. 그러나 국가이성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논고>>의 마키아벨리를 통해 적어도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관계라는 불가피성, [도시]국가에 본질적인 이 내재적 불가피성을 일체의 자연적 모델과 신학적 토대 밖에서 포착하려고 한다.

두 번째, ‘정치라는 단어다. 국가이성을 공격하는 모든 문헌에서 정치라는 단어는 늘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어떤 사람, 정치가들을 지칭한다. 이처럼 16~17세기 서구에 먼저 등장한 것으로 영역으로서의 정치도, 특정한 목적/의도의 집합으로서의 정치도, 직업이나 소명으로서의 정치도 아닌 바로 정치가들이었다. 정치라는 것, 즉 영역이나 행동 유형으로서 이해되는 정치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이제 정치는 제도, 실천, 행동방식의 수준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주권체계 내부에 확실히 통합되고, 실질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영역이 된다. 이처럼 특수성을 갖는 국가이성을 주권의 일반 형식(주권과 통치의 봉합) 속으로 집어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14세였다. 그런데 이때 정치는 성서에서 이끌어내진 셈(보쉬에). 결국 종교적 사목과의 화해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종교적 사목과의 일정한 관계양상이 확립됐다. 이를 통해 국가이성이 교회에 대항해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마지막은 국가이다(10장 참고). 간략하게 정리하면, 국가라는 제도의 총체는 1580~1650년경에 생겼다. 거대한 군대와 재정과 사법부 등 국가에 필요한/국가를 이루는 모든 기구가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 기억해야할 것, 실질적이고 특수하고 억누를 수 있는 역사적 현상은 국가라는 이 무엇이 인간의 숙고된 실천 속으로 확실히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다. 요컨대 다시 파악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인간의 실천과 사유 속에 들어왔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고 국가는 시민사회를 위로부터 위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역사 속에서 부단히 계속 자라나고 발전해온 냉혹한 괴물 같은 것이 아니기에 시민사회, 혹은 차라리 통치화된 사회일 뿐인 것이 어떻게 16세기부터 이른바 국가라고 불리는 허약한 듯하면서도 집요하기도 한 무엇인가를 구축해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통치의 돌발사건에 불과하다. 국가의 도구가 통치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통치성의 돌발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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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2)

 

5강, 통치의 기원 사목권력

통치한다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 개념이 포괄하는 유형의 권력이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통치성을 왜 연구해야하는가? 이는 곧 국가와 인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168). 하지만 국가와 인구라는 개념도 모호한 영역인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왜 통치성이라는 또 다른 모호한 개념을 통해 접근해야하는가? 이는 규율을 언급할 때 제기 했던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외부로 나가려고 시도했던 것을 상기하면 될 것 같다. 먼저 제도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테크놀로지의 각도에서 분석하고(정신병원의 예), 기능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전략적 분석 안에서 재검토하는 관점을 취하며(감옥의 예), 대상의 특권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지식의 영업·분야·대상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그 위치를 재설정했다(172). 외부로의 이동이라는 이 삼중의 운동이 규율과 관련해 진행됐다면, 좀 더 근본적으로 그 가능성을 국가와 연관시켜 탐구하면, 당연히 국가로 귀결된다. , 규율메커니즘은 그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감옥, 작업장, 군대 같은 장소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 그러니 규율메커니즘을 전반적이거나 국부적으로 적용하는 책임은 최종심급에서 결국 국가에 있는 것이다. 결국 제도외적, 비기능적, 비대상적인 일반성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전체화하는 제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173). 그렇다면 정신의학에서의 격리기술, 형벌체계에서의 규율기술, 의학제도에서의 생명관리정치처럼 국가와 통치성의 관계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가 이 강의 논점이다(175).

이제 다시 통치 개념을 돌아가서 16세기 이후 완전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 전까지 통치하다라는 말은 자신이나 타인, 타인의 신체, 더 나아가 그 영혼이나 행동방식에 행사될 수 있는 지배를 지칭하기도 하고 교류, 개인들끼리의 순환과정이나 교환과정도 지칭한다. 이 모든 의미에는 국가와 영토, 그리고 정치구조가 통치된다는 의미는 없고 인간만이 통치의 대상이 된다(178). 그런데 인간이 통치된다는 관념은 그리스·로마적인 것(배로 은유되는 도시국가가 통치대상)은 아니다. 그런 관념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이전과 이후의 동방에서 찾아봐야 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통치는 두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목적 유형의 권력이라는 관념과 조직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양심지도나 영혼지도라는 형태이다.

첫 번째 사목권력의 관념과 조직을 살펴보면, ··수장이 인간과 관련해 목자이고, 인간은 목자와 관련해 무리라는 것은 지중해의 동방 전역에서 매우 빈번히 발견되는 주제이다. 이집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당연히 히브리인들에게도 이 주제가 발견된다(180,181). 이런 관계는 종교적 관계이기에 본질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것이 그리스와 다른 특수한 것이다(183). 그럼 이 목자의 권력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목자의 권력은 영토에 행사되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상 무리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거나 운동하고 있는 무리에게 행사되는 권력이다(184). 둘째, 근본적으로 사목권력은 善行하는 권력이다. 선행을 자신의 기능, 목적, 정당화로 삼지 않는 권력은 없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전적으로 선행하는 즉, 선행을 위해 선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목권력의 핵심목표는 무리의 구제이다. 구제를 위해 식량 등 부양의 의무와 책무에 열정, 헌신, 부단한 전념을 기울인다. 더불어 불침번을 서는 등 모두 타인을 위해 배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목권력이 그 자체로는 언제나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85~188). 셋째, 사목권력은 개인화하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목자는 모든 가축 무리와 한 마리의 양을 동시에 보살핀다. , 전체와 각자를 동시에 주시하는데 전체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라고 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목과 관련된 권력기술, 그리고 푸코가 언급한 인구테크놀로지에서 재정비되는 이른바 근대의 권력기술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가축 무리와의 관계에서 목자가 희생한다는 문제, 즉 가축 무리 전체를 위해 목자가 희생하고 각각의 양을 위해 가축 무리 전체가 희생한다는 문제 속에서 목동의 역설이 더욱 강렬해지는 두 번째 형태가 있다(모세의 예). 결국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하고 하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기, 바로 이 역설이 사목의 그리스도교적 문제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사목권력의 관념은 그리스-로마의 사유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어쨌든 매우 이질적인 사목권력 관념이 서구 세계에 도입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해서였다. 모든 문명 가운데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은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정복욕이 강하며, 가장 오만하고, 가장 잔인한 문명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서구의 인간은 그리스인이라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 즉 자기 자신을 양떼 속의 한 마리 양으로 여기는 법을 수천 년 동안 배워왔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줄 목자의 구원을 갈구하도록 수천 년 동안이나 배워온 것이 푸코가 강조하고 싶은 역설이며 이런 가장 독특한 권력형태는 다시 말하면 양떼치기 문제로 간주된 정치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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