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할 책들이 산재하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함께 살펴야할 것이 일본과 중국의 지금-여기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3국의 근대를 살펴볼 수 있는 '근대의 갈림길 동아시아'는 반갑다. 일단 한겨레의 서평만을 스크랩해둔다. 

 

[한겨레 2009.3.25] 

 

 

 

 

 

 

  

 

 

 

 

 

 

 

 

“일본 성공적 근대화엔 조선·중국 영향도 컸다” 

‘근대의 갈림길 동아시아’ 출간
“일, 강화도조약등으로 발전”
조선·청나라 ‘실패론’ 틀 벗어

‘근대이행기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기간 이 지역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을 사로잡아온 핵심 주제였다. ‘중화체제’라는 견고한 지역질서 아래 오랜 기간 공존해온 세 나라가 불과 60여년 새 제국과 반식민지, 식민지로 운명이 엇갈린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최근 발간된 창비의 ‘기획강좌-근대의 갈림길 동아시아’ 시리즈(전 4권)는 일본·중국·한국을 각각 성공·반실패·실패로 규정한 전통적 이행론을 비판하면서, ‘동아시아사’라는 거시 구도 안에서 근대를 향한 세 나라의 발자취를 되짚어 비교한다. 미야자와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 박훈 국민대 교수와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제4권)를 함께 쓴 백영서 연세대 교수는 “기존 연구는 대부분 일본의 성공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결국 일본의 성공 요인이 한국·중국에는 없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논리로 귀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성공적 근대화에 미친 조선과 중국의 구실이다. 특히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강화도 조약이 일본을 세계체제의 반주변부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백 교수의 분석인데, 이로써 일본은 조선 쌀과 금을 수탈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산업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반도와 주변에서 벌어진 청일·러일전쟁의 영향도 컸다. 전쟁을 거치며 조공 질서로 유지된 중화체제가 결정적으로 붕괴하고 일본은 독점자본이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두 전쟁 모두 조선의 지배권 문제가 핵심이었다”면서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틈새에서 조선은 자주독립 노선을 내세우면서 중립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보호국으로 전락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러일전쟁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보인 반응이다. 백 교수는 “윤치호 등 일부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을 한국 지배의 쟁탈전이자 인종전쟁으로 봤다”며 “이 때문에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려는 일본을 증오하면서도 황인종의 명예를 지킨 일본을 존경하는 모순적 태도를 나타냈다”고 소개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중립화 정책에 대해서는 “세력균형론과 주변 국제관계에 대한 나름의 판단에 기반해 국익을 실현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비밀 황실외교를 통해 특정국가와 일회적으로 추진한 점은 결정적 한계”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경험한 내재적 근대화의 좌절과 대안적 가능성을 성찰한 1권 <근대와 식민의 서곡>은 김동노 연세대 교수가, 중국편인 2권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는 강진아 경북대 교수, 일본이 거둔 제국주의 경쟁의 승리와 그 이면에 드리운 억압과 팽창의 그늘을 파헤친 3권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은 함동주 이화여대 교수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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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과 4.3항쟁이 결과적으로 '순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결과에 따라 여순사건과 4.3항쟁을 이승만정권의 '대한민국 만들기'로만 제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서가 나온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크랩해둔다. 

 

[한겨레신문 2009.6.17] 

 

 

 

 

 

 

 

 

‘빨갱이’ 몰아 민간인 죽인 여순사건
지배권력 위기때마다 반대세력 매도
“생각 다르면 좌빨…반공 내면화 결과”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학교 운동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주민 수천 명이 양쪽으로 패를 나눠 앉아 있다. 두 무리를 나눈 폭 3미터 남짓한 중간지대에는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담장 뒤편 시가지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주민들이 맞닥뜨릴 운명의 가혹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됐지만, 실은 여수 진압 직후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이다. 오른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부역 혐의자들로, 사진 촬영 직후 89명이 학교 뒤편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됐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중간지대는 양민과 혐의자의 편의적 구분선이 아닌, 삶과 죽음의 절대적 경계선이었다.

“진압군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빨갱이’를 골라내는 일이었습니다. 경찰 생존자와 우익 인사들이 대열을 훑고 다니다 ‘저놈’ 하고 지목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것을 ‘손가락 총질’이라고 불렀어요.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자비한 몽둥이질과 총살, 참수형이었습니다.”

<‘빨갱이’의 탄생>을 펴낸 김득중(44)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여순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에서 찾는다. 출범 두 달을 갓 넘긴 이승만 정부에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국민’으로 승인하는 것은 항상 ‘국민이 아닌 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동반하는데, 이승만 정부한테 ‘비국민’은 ‘빨갱이’였다.

“빨갱이란 말은 일제 때부터 있었고, 해방공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하게 사용됐어요. 그런데 여순사건을 거치며 그 의미가 변합니다.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악마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죠. 부역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 학교 운동장은 양민과 빨갱이,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준별하는 공간이었던 겁니다.”

물론 우익의 ‘빨갱이 사냥’은 봉기 기간 좌익이 벌인 학살행위가 빌미가 됐다. 실제 반군이 장악했던 여러 지역에서 반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대량으로 살해됐다. 하지만 글쓴이는 좌·우익의 살상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살의 규모나 대상, 지속 기간에서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전체 희생자 1만여명 가운데 95%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죽었습니다. 지방 좌익과 반군이 죽인 사람은 500명 정도예요.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좌익의 학살은 표적이 분명했습니다. 친일 경찰과 한민당 세력,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청년단원들이었지요. 그런데 우익은 달랐어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반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남로당원뿐 아니라 그들에게 밥 해준 사람,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 반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변변한 자기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살해당했습니다.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기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실제 희생자 중에는 평소 경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검사,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여중 교장 등 우익 명망가도 있었다. 이들은 반군에 협조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심증만으로 잡혀가 처형됐다. 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초토화 진압작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된 경우였다.

이런 ‘빨갱이 만들기’에는 언론과 문인들의 구실이 컸다는 게 글쓴이의 분석이다. 실제 신문들은 정보 획득의 통로가 제한된 상황에서 정부와 진압군의 발표 내용,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을 여과 없이 보도했고, 시찰단 자격으로 현지를 방문한 시인과 소설가들 역시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적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글을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통해 ‘빨갱이’란 기표에 담긴 ‘살인마’ ‘비인간’의 이미지는 국민의 의식회로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려면 반공의식을 내면화해야 했고, 이렇게 내면화한 반공논리는 대한민국 60년사를 통해 지배권력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빨갱이라는 유령을 어김없이 불러냈다.

“인터넷에서 ‘좌빨’(좌익빨갱이)이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누리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고 집회·시위와 사상의 자유, 노동자의 파업권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드는 이들의 사고 구조에는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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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푸코를 읽어야할 이유가 있어 스크랩해둔다. 특히 그의 강의록 중 아래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주의 3부작'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영토,인구>, <생명정치의 탄생>은 반드시 읽어야할 저서다.  

 

[한겨레 2009.7.8]

미셸 푸코(1926~1984)가 돌아왔다. 최신 사조에 목마른 계간지들이 연이어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는 가운데, 대중들을 상대로 한 ‘푸코 강좌’도 성업 중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지식시장은 25년전 에이즈로 사망한 이방의 철학자를 다시금 주목하는가.

개인의 인간형 자체를 바꾸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통찰력에
‘생명권력’ 등 후기담론 새 빛

푸코에 관한 최근의 논의들은 계간 <문화과학>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임동근 문화과학 편집위원과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가 2008년 여름호와 2009년 봄호에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관한 분석글을 잇따라 실었다. 철학아카데미와 다중지성의 정원, 문화사회연구소 같은 강의·연구모임도 지난 겨울부터 푸코 세미나와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출판계는 또 어떤가. 김영사가 최근 지식인마을 총서로 푸코를 다룬 데 이어, 하반기에는 <푸코, 인간의 초상>(폴 벤느, 산책자),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돌베개) 등의 연구서와 <미셸 푸코의 파르헤지아>(사계절), <안전, 영토, 인구> <생명정치의 탄생>(난장) 같은 푸코 강의록들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말 그대로 ‘푸코의 재림’이다.

기실 한국에서 푸코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승하던 80년대 한국에서 푸코는 비주류요 이단자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감시와 처벌>(1989년), <성의 역사 1·2·3>(1990년) 같은 대표작들이 잇따라 번역되기는 했지만 90년대 후반 질 들뢰즈,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재기발랄한 후학들이 무섭게 치고 들어오자, 그 역시 한때의 유행을 선도한 서구 사상가의 한 명으로 지식의 최전선에서 쓸쓸히 퇴역해야 했다.

반전은 2000년대 중반 ‘생명권력’ ‘생명정치’와 관련된 푸코의 후기 담론들이 뒤늦게 주목받으면서 찾아왔다. 여기엔 권력의 새로운 지배구조와 그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을 통해 해명한 네그리·하트의 <제국>과, 생명정치라는 틀에서 서양 정치구조를 해부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의 영향이 컸다. 

최근의 ‘푸코 르네상스’는 생명정치와 함께 후기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통치성’이란 주제와 관련된다. 푸코가 통치성이란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0년대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들이다. 여기서 푸코는 18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등장한 새로운 권력관계(통치)의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의 핵심은 “행동방식 혹은 행실에 대한 통솔”이다.

통치는 법이나 규범을 통해 특정 행위를 ‘금지’하거나, 감시·처벌·훈육을 통해 개인의 신체를 ‘규율’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의 건강과 가계의 부를 관리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유사하게, 근대 국가의 통치는 생명을 가진 주민 전체(인구)에게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면서 그들의 건강과 안전,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개인적·집단적 수준의 행동과 실천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통치를 위한 기술적 수단이 ‘폴리스’로 불리는 행정관리 기구들이며, 여기에 수반되는 지식이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정치경제학(고전경제학)이라는 게 푸코의 분석이다.

푸코가 말하는 이 새로운 통치성의 다른 이름이 ‘자유주의’다. 주목할 만한 점은 푸코가 1978~79년 강의록인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신자유주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코에게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또다른 형태다. 자유주의가 ‘인구에 대한 통치방식’을 고안하고 실천했다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간형 자체’를 변형하는 데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푸코가 볼 때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신체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를 ‘자본’으로 다루는 기업가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이른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이다. 이런 푸코의 분석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무엇인가.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역사적 시점부터 조성된 불가역적 현실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론 같은 학술 담론뿐 아니라, 일상의 자기계발 담론이나 노동자의 책임과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생산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경영담론까지 포괄하는, 사회를 통치하고 삶을 조직하는 방식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다.”(서동진 교수)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계급성’ 넘어 ‘통치성’


‘생명권력’ ‘생명정치’ 담은 푸코 강의록 8권 출간
프랑스 라발 등 사회과학 전 분야로 확대·적용


“최근 사회과학 논문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통치성’이란 단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의 열쇳말로 자리잡았다. 푸코는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에 취임한 뒤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강의했다. ‘푸코 르네상스’의 진원지는 그의 제자들이 푸코가 남긴 메모와 녹취 테이프를 편집해 1997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강의록들이다.

14권으로 예정된 푸코의 강의록은 지금까지 8권이 출간됐는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자유주의 3부작’으로 불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5~76년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1977~78년), <생명정치의 탄생>(1978~79년)이다. 여기서 푸코는 ‘생명권력’과 ‘통치성’이란 주제에 매진하면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예견적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말년의 푸코가 천착했던 통치성이란 주제에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니콜라스 로즈, 피터 밀러, 콜린 고든 등 영국의 사회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푸코 효과>(1991년)라는 책에서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처음 소개한 데 이어, 영국 사회과학 저널인 <경제와 사회>를 통해 통치성 이론을 경제·사회·정치·사회심리학·행정학·생명공학 등의 분야로 확대했다.

최근엔 프랑스 사회학자 크리스티안 라발의 작업이 돋보인다. 그는 푸코의 통치성 이론과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지성사적으로 분석한 <경제적 인간-신자유주의의 뿌리에 관하여>를 2007년 출간했고, 올해는 철학자 피에르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 사회의 형성과 구조를 분석한 <새로운 세계이성-신자유주의 사회에 관한 시론>을 냈다.

라발은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의 경제학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정치·행정·교육·문화 등 자본주의 사회의 전 분야를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합리성’이며, 인간을 경쟁을 통해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로 호명하는 ‘새로운 주체 형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확산되던 ‘신자유주의 종언론’이 최근 세계경제의 완만한 회복세와 더불어 빠르게 위축되고 있는 현실은 ‘푸코 학파’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담긴 의미가 녹록지 않음을 실감케 한다. 이세영 기자

도움말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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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일본인사회에 대한 연구는 그간 한국사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 이유는 역사학 자체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근대적 한계 때문이며 특히 민족사적 측면에서 한국사는 한국인에 의한 역사여야 한다는 또 다른(?) ‘주체 사관’이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는 알다시피 언제나 큰타자 또는 대타자에 의해 위치지워 진다는 근대 주체에 대한 논의를 세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근대 역사학의 한계인 민족 또는 국가라는 시야에서 벗어나야하는 당면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역사는 특히 한국사는 한국인이라는 주체뿐만 아니라 주체가 활동하는 과거의 시공간에 대한 연구이며 또한 현재의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사회는 한국사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일제시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는 일본인사회가 식민지 조선을 규정짓는 주체의 위지지움과 식민권력과 식민정책 등 일본제국주의의 성격과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두 가지 측면 즉, 근대성과 식민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시기 일본인사회에 대한 연구는 어느 식민지기 연구만큼이나 중요한 연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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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들을 발명해내기(에릭 홈스봄)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용어는 광범위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확하지는 않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발명되고 구성되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전통들’은 물론이요, 그 기원을 쉽게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추정은 가능한 시기-대략 수년 사이-에 등장해 급속하게 확립된 ‘전통들’이 모두 포함된다.

‘만들어진 전통’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통상 공인된 규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의례나 상징적 성격을 갖는 일련의 관행들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들은 특정한 가치와 행위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즉 전통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반응인데도 불구하고 예전 상황들에 준거하는 형식을 띠거나, 아니면 거의 강제적인 반복을 통해 제 나름의 과거를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이른바 ‘전통적’ 사회들을 지배하는 ‘관습’과 명백히 구별해야만 한다. 전통들이 준거하는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든 발명된 것이든 늘 반복되어 고착된 (보통 공식화된) 관행들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반면, 관습이 하는 일은 선례와 사회적 연속성 그리고 역사에 표출된 자연법에 비추어 바람직하다고 간주된 어떤 변화(혹은 혁신에 대한 저항)를 승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습’은 법관들이 하는 일이며, 그 반면에 ‘전통’(만들어진 전통)은 법관들의 실질적인 행위를 감싸고 있는 것들, 이를 테면 머리장식이나, 법복, 기타 공식적인 장식과 의례화된 관행들이다. ‘관습’이 쇠퇴하면 관습과 상습적으로 뒤얽혀있는 ‘전통’도 불가피하게 변화하게 마련이다.

‘관습’과의 차이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구별해 두어야 할 두 번째 차이는 그 자체 어떠한 중요한 의례나 상징적 기능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부수적인 의미만 있을 뿐인 인습이나 관례와의 차이이다. 어떤 사회적 관행은, 반복적으로 수행될 필요가 있는 한, 그 편의성과 효율성 때문에라도 일련의 인습과 관례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습망과 관례망은 ‘만들어진 전통들’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기능과 거기서 유래하는 정당화 양식이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전통’과 실용적인 인습 및 관례는 길항관계)

전통을 발명해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가정하듯이 과거에 준거함을 특징으로 하면서 다만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공식화되고 의례화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의 발명은 사회가 급속히 변형됨으로써 ‘낡은’ 전통이 기반하고 있던 사회적 패턴들이 약화되거나 파괴되어 그 결과 낡은 전통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때나, 아니면 낡은 전통과 그것들을 제도적으로 매개하고 보급하는 수단이 더 이상 융통성 있게 적응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을 때 더 자주 일어난다. 그런 변화들은 특히 지난 200년 사이에 중요했다. 이러한 것은 이른바 ‘전통적’ 사회들에만 국한되어 발생한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형태의 ‘근대적’ 사회들에서도 발생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적응은 새로운 상황에 처해 낡은 것들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목적을 위해 낡은 모델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한 법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상당히 새로운 목적을 겨냥한 새로운 유형의 만들어진 전통들을 구성하는 데 낡은 재료들을 이용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통들이 어느 정도까지 낡은 재료들을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 새로운 언어와 고안품들을 발명하거나 낡은 상징적 어휘의 한계를 확장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적 운동 및 집단-아닌 게 아니라 민족주의에서-이 너무도 전례 없는 것들이라, 즉각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연속성을 발명해야만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예 고대적인 과거를 창조해 버린 경우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상징과 고안물들이 민족운동과 민족국가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또한 진정한 고대성을 내포하는 전통적인 ‘상투어들’에서조차 종종 드러나는 연속성의 단절을 무심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전통이 발명되는 것은 종종 낡은 방식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거나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낡은 방식을 의도적으로 활용 또는 적용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서로 중첩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첫째, 특정한 집단들, 실재하는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공동체들의 사회 통합이나 소속감을 구축하거나 상징화하는 것들이다. 둘째, 제도, 지위, 권위관계를 구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들이다. 셋째, 그 주요 목표가 사회화나 혹은 신념, 가치체계, 행위규범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둘째, 셋째 유형의 전통들은 확실히 고안된 것이다(영국령 인도에서 권위에의 복종을 상징하는 것들처럼). 그 반면에 가설이기는 하지만, 세 유형들 중 첫째 유형이 우세했고, 따라서 그 밖의 다른 기능들은 모두 특정한 ‘공동체’ 그리고(혹은) 그 공동체를 대표하고 표현하며 상징하는 제도들-가령 ‘민족’처럼-과의 일체감에 내재해 있거나, 적어도 그런 일체감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난점은 그런 대규모 사회적 실체들이 실은 ‘공동사회’이기는커녕 공인된 관등체제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유동성과 엄연한 계급 갈등의 현실 그리고 우세한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전통과 공식 위계(가령, 군대)들 내부의 현격한 불평등을 두루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한편, 만들어진 전통들은 실제로 지위를 계약의 세계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를 법적으로 동등한 자들의 세계로 밀어넣기도 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즉 만들어진 전통들은 사실상 불평등한 사회조직에 대한 공식적인 상징적 동의를 통해 은밀하게 도입될 수 있었다.

일단 ‘공동체주의적인’ 만들어진 전통들이 기본유형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통상 특정 집단의 전통들의 경우에는 통과의례들이 두드러지는 반면에(입회.승진.은퇴.죽음), 포괄적인 유사 공동체들(민족.나라)을 위해 고안된 전통들의 경우에는 보통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낡은 관행은 특정하고도 강한 구속력을 갖는 사회적 관행들이었던 반면에, 만들어진 관행은 그것들이 주입하는 집단적 가치와 권리와 의무, 즉 ‘애국주의’ ‘충성’ ‘사명’ ‘정정당당함’ ‘단결심’ 등과 관련해 어지간히 불특정하고 모호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는 관행들은 사실상 강제적이다.

두 번째로 관찰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수많은 발명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통들이 낡은 전통과 관습이 점진적으로 쇠퇴함으로써 생긴 수많은 공백 중 극히 미미한 부분만을 메운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반적 결론은 시민의 공적 삶이라고 할 만한 영역(얼마간은 대중매체와 같은 사적인 형태들과는 구별되는, 학교와 같은 공적인 사회화 형태들까지 포함해)에는 적용될 수 없다. 기실 사람들이 시민권 자체를 의식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상징 및 준의례적 관행들(이를 테면, 선거)과 만날 때인데, 그 대부분이 실은 국기.이미지.기념식.음악처럼 역사적으로 새롭고 대개는 발명된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들은 전통의 발명을 연구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챙길 수 있는가

무엇보다 만들어진 전통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마땅히 감지할 도리가 없는 문제들과 다른 방법으로는 확인하고 그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발전들을 가르키는 중요한 징후요, 따라서 지표라는 점을 말할 수 있겠다. 만들어진 전통들은 요컨대 증거인 것이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전통들은 인간이 과거와 맺는 관계에 대해, 그러므로 역사가와 주제와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왜냐 하면 일체의 만들어진 전통들에서 역사는 가능한 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제와 집단을 통합하는 접착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문적인 연구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공적 영역에도 속하는 과거의 이미지들을 창출하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한, 모든 역사가들은 그들의 목표야 어찌되었든 필연적으로 그런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

근현대사가들이 ‘만들어진 전통들’에 대해 갖는 한 가지 특정한 관심

그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적 혁신물인 ‘민족’과 그것에 부수된 현상들, 예컨대 민족주의.민족국가.민족적 상징들.민족사 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민족적 현상은 ‘전통의 발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조사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전통의 발명에 대한 연구는 학제적이며 학제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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