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올리는 영화에 대한 저 개인의 후기는 영화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이 점에 유의하여 후기를 읽어주길 바랍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정은 복잡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떤 감정인지 미세한 떨림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슬픔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자후tv 속의 절규와 외침에 난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마 어떤 실재와의 만남으로 인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재의 목도는 그렇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철학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침묵으로, 말더듬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나타난다고.
그런데 실재를 직시해야한다는 그 철학자의 주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곤 했던 내가 이 장면에서 이상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실재의 목도 이후를 생각할 수 없어서일까? 정확하게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압도적 국가폭력 앞의 ‘두려움’이었을 테고 ‘분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이 장면 또한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큐라고 하지만 영화는 실재의 재현인 상징적 세계이며 또한 영화 속의 사자후tv 또한 상징적 세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실재를 가장한 환상이다. 이렇게 용산이라고 하는 사건의 실재는 렌즈 저 멀리 존재한다. 겨우 재현의 재현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올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국가폭력을 들춰내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왜 나는 재현의 재현에 실재의 목도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 것일까?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실재를 보고 느낀 감정이 아닌 것은 아닌가? 오히려 실재를 가장한 환상 효과는 아닌가? 왜 나는 이 장면에서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그러다 문뜩 예전에 읽었던 홀거 하이데의 두려움과 분노에 대한 글(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이 생각이 났다. 국가폭력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한 우리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문제는 두려움을 통해 국가(자본)권력이 우리들에게 복종심, 경쟁심, 폭력성을 배우도록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가는 폭력을 항상 가시적으로 상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의도(어떤 의도인지 모른다)와는 달리 국가폭력을 순응하도록 하는 효과로도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감독은 국가폭력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그럼 또 다른 측면에서 느낀 저항의 긍정적 감정인 분노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분노는 최근 월스트리트의 점령과 더불어 저항을 위한 긍정적 감정(정념, 정동)으로 주목받고 있다(분노하라!). 하지만 또 다시 하이데는 분노나 대중 심리 또한 대개 불의에 토대하기 때문에 결국은 정의롭고 합리적인 해결책(국가자본권력의 합리적 지속)으로 결론이 나버린다고 한다. 근원적인 치유가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덮어버리는 봉합이다. 더군다나 만약 이 저항이 ‘패배’하는 경우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또 다시 적응하면서 현실로 복귀해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 문제해결은 요원하다. 하이데가 말하는 근본적 문제해결은 폭력을 상연하는 권력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벤야민의 내리치는 ‘신의 폭력’이 이에 해당될 것이며, 아감벤의 ‘세속화’ 또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나는 순수 수단(국가와 자본의 폭력 중단)으로써의 ‘신의 폭력’과 ‘세속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어쨌든 문제의 해결은 압도적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과 일시적으로 자극된 분노가 아닌 지속가능한 분노와 저항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마지막 국가폭력의 재현 장면이 아니라 감독이 그렇게 공을 들였던 앞의 장면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영화가 왜 철거민(특히 용산 철거민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철거민,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우리 모두)은 망루에 올라가야했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용산참사’에 참여한 철거민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우리에게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에 대해 끝끝내 납득할만한 설명과 묘사를 보여주지 못했다. 근원적으로는 이 땅에서 우리는 왜 길거리로 내려앉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건 한국사에서 언제나 항상 유리걸식하는 민들의 모습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영화에서 철거민들이 매번 상투적으로 얘기하는 자본권력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자행하는 구조적 폭력은 또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 국가로부터 폭력단체라고 명명되며 이 사건의 주범처럼 인식되고 있는 철거민이 우리와 결코 다른지 않다는 주장. 그들은 결코 범죄자도 폭력조직도 아니라는 주장. 누구나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 압도적 폭력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 등이 이 영화에 드러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어쩐지 설득의 실패를 폭력의 실체를 통한 분노로 연결시키는 ‘감정의 정치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감정의 정치학’은 국가와 자본이 너무도 잘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점이다. 만약 단순히 제목처럼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망루를 둘러싼 공권력의 폭력적 행동을 사자후tv 등의 당시 촬영분을 통해 재구성하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런 점에서 망루의 폭력에 대한 진실 공방은 또 다른 용산 영화인 <두 개의 문>에서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설득의 실패로 말미암아 어쩌면 국가폭력의 교육적 효과와 결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