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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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가령 오늘 죽었더라면 그는 둘이서 살며 정든 그방에서 계속 살아가리라. 그는 나의 기척이 구석구석 스며 있는 그 거실에서, 매일 아침 커피를 끓이리라. 둘의 몫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몫. 그 커다란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남편은 늘 냉장고에서 꺼낸 병에서 커피 가루를 덜어 필터에 담는다. 그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상상했다. 내가 맛있다고 해서, 남편이 항상 커피를 끓여준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칭찬해 주는 이 하나 없는데도, 그 방에서 그 빛 속에서 음악을 쾅쾅 틀어 놓고 말없이 맛있는 커피를 끓이리라.
그 광경에, 가슴이 메었다.-57쪽

"이 느낌, 아마 아빠가 밖에서 느끼는 기분하고 비슷할 거야. 그래서 서로에게 끌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서로가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부분 때문에 마주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러면, 평소에 쌓아올린 밝은 것,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안정된 것 모두가 환상처럼 여겨지고, 내내 상자 속에 있지 않았나 싶어져. 좋아하니까, 소중하니까, 상자 속에 담아 놓지 않았나 하고 말이야. 왜 아빠 마음속에는 완벽한 아빠가 되기를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을까? 아니, 모두의 마음속에도 있을 거야. 그게 무서워"-75쪽

살다가 느끼는 쓸쓸함이란 그 곰인형의 뒷모습 같은 것이여서 남이 보면 가슴이 메는 듯해도, 곰 인형은 설레는 기분으로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아름다움에 환희를 느꼈을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날 아침 가장 외로웠던 것은 곰 인형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던 내 마음이리라. 부모의 부모가 죽고, 언젠가는 부모도 죽고 자신도 죽는 그런 인생의 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어린애의 꿈의 세계에 살며시 그 살을 맞대어 왔고, 그 기척에 한없는 무엇을 느꼈던 것이리라-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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