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이용주 옮김 / 알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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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분명한 것은 지도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묘사한 기하학적 도식이 아니라 제작자의 의도와 관점을 투영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사실이다." -p305

 

 위의 구절이 이 책의 핵심일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제국주의가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지리학을 학문 분야로 발전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의 대학들은 1874년 지리학과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국의 경우, 대학에서 최초로 지리학자가 임용된 것은 옥스퍼드 대학이 1887년, 케임브리지 대학은 1888년이었다. 1892년 파리에서는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지리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이 시기에 지도는 사회와 경제적 요인들에 관한 제국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바람이나 해류 같은 물리적 힘들에 관해서는 관심을 덜 쏟았다. 지도학은 보다 교훈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지정학이라고 알려지게 될, 지리학과 국가 권력을 연결하는 도구가 되었다." -p148

 

 

 처음에 지도는 뱃길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대륙보다는 바다가 중심이 되었다. 무역의 이점을 위해서 지도의 보안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러다가 신대륙 발견 붐이 일면서 이제는 지도가 국가의 국력이 되었다.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지도를 만들 줄 아는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앞서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대륙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는 국력이 신장됨과 동시에 지도 분야에 있어서도 앞서 나감으로써 지도에 자신의 이해를 투영시킬 수 있었다. 유럽이 윗쪽에 있는 지도, 자신의 대륙을 더욱 두드러지게 그려낸 지도 등이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의 대륙만을 왜곡해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어떤 기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도가 달라지는 문제였고 자신의 국력과 기술을 앞세워 자신의 대륙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기법을 선택할 수 있었기에 지도는 제작자의 의도와 관점을 투영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지도 속의 권력구도랄까, 지정학이랄까 하는 것들이 낯선 분야는 아니었기에 보는데 어려움이 있다던지, 당연한 듯 생각되었던 것이 달리 생각된다던지 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도는 유럽이 아랫쪽에, 아프리카가 윗쪽에 위치할 수도 있다. 또 그러한 지도가 나온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다만, 일찍이 유럽이 이룩한 성과로 인해 현재의 지도가 보편적이고 알아보기 쉽다는 점에 있어서 지도 속의 권력 구도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좋지만 굳이 지도를 뒤바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 나라마다 자신의 나라를 중심으로 한 지도를 만들어서 보급할 수는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지도가 현재 유럽이 윗쪽에 위치한 지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각국이 시간이나 단위 등에 대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 가지 기준을 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도 또한 각 나라가 쓰는 것과는 별개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지도로써 현재의 지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다.

 

 

 지도 속의 권력 구도에 대해 고찰해 본 것과 같이 어떠한 사물이든 현상이든 그 사물이, 현상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자리잡고 또 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작업은 흥미로운 것 같다. 굳이 지도를 바꾸자고 하지는 않겠지만 지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고 앞으로 이러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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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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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리아드를 통해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을 알았다. 이번에는 오뒷세우스를 알아 볼 차례이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통해 트로이를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전쟁을 피하려던 아킬레우스를 참전시키는 꾀를 짜내기도 했다. 여장을 하고 숨어있는 아킬레우스 앞에 상인으로 변장하여 아킬레우스로 하여금 장신구가 아닌 무쇠를 손에 들게 했던 것이다. 이로써 정체가 탄로 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는 그의 뛰어난 지략으로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등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렇게 전쟁에 공을 세운 영웅은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겠지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그는 20년을 떠돌다 거지의 행색으로 귀향하게 된다. 그가 고난을 당하며 떠돌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오뒷세우스에게는 페넬로페라는 아름다운 아내와 출전 당시 갓난아이였던 텔레마코스라는 아들이 있다. 오뒷세우스가 귀향하지 못하고 어느 바닷길, 혹은 어느 이름 모를 섬에서 떠돌다 죽었을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오뒷세우스의 집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주인 없는 집에서 먹고 마시며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처음 구혼자들이 몰려들었을 때, 누군가가 페넬로페에게 지혜를 주었으니, 그녀로 하여금 옷을 한 벌 짓도록 한 것이다. 그녀는 옷을 완성하면 누구든 한 명을 정해 결혼을 하겠다고 했고 구혼자들은 이에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는 3년을 내리 낮에는 옷을 짜고 밤에는 그 실을 풀어버리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윽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어느 여인이 이를 구혼자들에게 고하자 페넬로페는 옷을 다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다 지은 후에도 어린 텔레마코스를 방패삼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페넬로페는 어린 아들이 장성하게 되자 또 다른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구혼자들은 어느 한 사람 정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한 오뒷세우스의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며 그녀에게 결혼할 것을 요구하고, 장성한 아들은 주인 없는 집에서 아버지의 것이자 장차 자신의 것이 될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구혼자들에게 분개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테네가 등장한다. 아테네는 오뒷세우스의 친구인 멘토르로 분해 텔레마코스에게 접근하여 오뒷세우스의 행방을 수소문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오뒷세우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분하더라도 일 년을 더 참고 견딜 것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격식에 맞게 장례식을 치르고, 어머니는 새 남편에게 보낸 후, 구혼자들을 응징할 지략을 궁리해 보라고 한다. 이에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러 떠나게 된다.




 그럼 이 때에 오뒷세우스는 어디에 있었는가. 오뒷세우스 또한 이즈음에는 귀향길과 멀지 않았다. 그는 칼륍소의 동굴에서 탈출한 후,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성대한 대접을 받은 후 많은 선물들과 함께 고향으로 호송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우리는 그동안 오뒷세우스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에 대하여 들을 수 있다.




 오뒷세우스는 파이아케스족에게 트로이아를 떠났을 때 제우스가 오뒷세우스에게 지웠던 고난에 찬 귀향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바람은 오뒷세우스를 일리오스로부터 키코네스족의 나라인 이스마로스로 실어다 주었고, 그 곳에서 이들은 약탈을 하다가 키코네스족에게 제압당해 배마다 전우들을 여섯 명씩 잃었다.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항해를 계속해 도착한 곳은 로토파고이족의 나라였다. 로토파고이 족은 그들에게 로토스를 먹으라고 주었는데 이를 먹은 자는 귀향은 잊어버리고 그 곳에서 로토스를 먹으며 로토파고이족 사이에 머물고 싶어 했다. 오뒷세우스는 이들을 억지로 데려다 배 안에 묶은 후에야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퀴클롭스들의 나라였는데 퀴클롭스는 오뒷세우스의 전우들로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오뒷세우스는 앞이 캄캄했지만 곧 꾀를 내어 기다란 나무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 놓고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여 취하게 한 후, 그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숫양의 배에 매달려 퀴클롭스의 동굴을 탈출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오뒷세우스가 20년을 떠돌게 된 이유이다. 이 퀴클롭스는 다름 아닌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퀴클롭스는 오뒷세우스에게 당한 뒤, 포세이돈에게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포세이돈은 이 기도를 들었다.




 퀴클롭스들의 나라를 떠난 뒤, 오뒷세우스 일행은 아이올로스 섬에서 그들이 신에게 미움 받고 있음을 확인했고, 라모스 왕의 가파른 도시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의 텔레퓔로스에서는 또다시 전우가 점심식사로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급히 길을 떠나 달아날 수는 있었지만 이미 많은 전우들을 잃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아이아이에 섬이었는데 그곳에는 인간의 음성을 가진 무서운 여신, 머리를 곱게 땋은 키르케가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전우들은 돼지로 변하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오뒷세우스는 전우를 찾으러 나섰고 이런 오뒷세우스 앞에 헤르메스가 나타나 키르케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계략을 알려주어 전우들을 되찾고 키르케에게 성대한 대접까지 받게 된다. 그렇게 먹고 마시며 일 년이 지난 뒤, 오뒷세우스 일행은 다시 귀향을 생각했고 키르케에게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지만 키르케는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키르케는 오뒷세우스에게 귀향에 앞서 그들은 하데스의 무서운 페르세포네의 집으로 가 예언자 테바이의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산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여정을 떠났고 그곳에서 테바이의 테이레시아스에게 이미 정해진 그의 힘든 귀향을 예언해 주고 그에게 주의할 점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미 혼백이 된 부모와 전우들과 그 외 이름난 영웅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그들은 키르케에게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주의사항을 듣게 된다. 그것은 주의사항이기도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그들의 전우가 또다시 죽음을 당하게 될 이야기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섯 전우의 희생으로 그들을 길을 계속 갈 수 있다고 하니,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몸의 고난 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고난 또한 심했다고 하겠다. 그들은 먼저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을 호리는 세이렌 자매에게 가게 될 것인데 이때에 전우들의 귀에는 밀랍을 이겨 넣어 귀를 막았고 오뒷세우스 자신은 세이렌 자매의 노래는 듣되, 끌려가지는 않도록 돛대에 꽁꽁 묶였다. 이렇게 세이렌 자매들을 넘어선 그들은 스퀼라에게로 가게 되는데 머리가 여섯 개나 되는 이 괴물은 오뒷세우스의 전우 여섯 명을 물어가 버렸다. 그렇게 희생을 치른 뒤 도착한 트리나키에 섬에서는 또 다른 시험이 오뒷세우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에는 헬리오스의 수많은 암소들과 양떼들이 있는데 일찍이 예언자 테바이의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에게 그 소들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들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오뒷세우스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지만 섬에서의 체류 기간이 한달을 넘어가고 그들이 가져온 양식이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오뒷세우스에게 고난을 주고 싶어하는 어느 신의 계략이었을까. 때마침 오뒷세우스의 눈꺼풀 위로는 잠이 쏟아졌고, 그의 전우들은 나쁜 계략에 빠져 소떼에 손을 댄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잠에서 깨어 울부짖는다. 황급히 그 섬을 떠나기는 했으나 예정된 운명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배는 산산히 조각 났고 전우들은 모두 죽게 되고 오뒷세우스 혼자만이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어느 섬에 도착했으니, 그 섬이 바로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도착하기 직전에 머물러 있던 칼륍소가 살고 있는 섬이었던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들은 파이아케스족은 오뒷세우스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그를 이타케로 호송해 준다. 그 곳에서 오뒷세우스는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거지로 변장을 한 채, 그의 하인들과 아들, 아버지, 아내 등이 자신을 잊지나 않았는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해 본다. 그러한 시험이 끝난 후, 그는 아들과 몇몇 하인과 함께 구혼자들을 처단할 궁리를 하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오뒷세우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여신, 아테네가 함께 했다. 그는 아테네의 후원에 힘입어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자신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




 이 책은 오뒷세우스가 없는 이타케에서의 텔레마코스로부터 시작하여 오뒷세우스의 귀향 직전의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오뒷세우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노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이타케로 돌아와 그가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다시 자신의 지위를 복원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예언과 회상이 적절이 섞여 있어 앞일을 짐작해 보기도 하고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일에 대해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역추적 할 수도 있어 이 책을 읽는 동안 적절한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누린 가장 큰 기쁨은 수식, 표현에 대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이 책에 대한 예의상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것일 뿐이고 지금부터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 한다며 바다로 나아간다고 할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말린다. “왜 쓸데없이 추수할 수 없는 바다 위를 떠돌며 사서 고생을 해요!”

‘추수할 수 없는 바다’라는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확실한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텔레마코스의 항해와 그 고생을 ‘추수할 수 없는’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에 무릎을 쳤다.

 

 그리고 내가 반해버린 문장이 있는데 이는 내가 해석한 문장이어야 내가 반한 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해석한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문장인가 하니,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이라는 구절인데, 환상적이지 않은가!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이라니. 도대체 어떤 빛일까? 대충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이 있긴 한데 그 장면을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이라고 표현하는 것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한참 고취되어 있다가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났으니 전문은 이러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이럴수가. 한 마디로 내가 생각한 것처럼 저 문장은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이 아니라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이 문장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그 때마다 속이 쓰렸다. 흑,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이 더 멋지단 말이오! 호메로스가 살아 있다면 막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번역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하면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어찌됐건 이건 내 식대로 생각하기로 했으니 나는 그냥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을 생각하면서 환상에 젖어 있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의 표현 중에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무슨 이야기나 회의를 하기 전에도 일단 서로 먹고 마시는 일부터 시작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랄까. 하인들이 물을 떠 오고 헌주를 하고 잔을 채우고 빵을 가져다주고 하는 장면이 한참 나오다며 이윽고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누가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그네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손님이 와도 호구조사부터 하고 신분을 제대로 확인 한 후에 들여보낸다든지, 먹을 것을 내온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식탁에 앉혀 먹을 것을 내 온 후 나그네가 허기를 면한 후에야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으니 이제 자기소개를 해 보시오, 하는 것이다. 신은 종종 나그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가 한다. 호메로스가 살던 시절에는 이것이 상식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리스로마신화 뿐만 아니라 예수도 종종 거지 또는 나그네로 등장하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나그네를 대할 때 우선은 대접한 후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던 상식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와 그 경계를 풀 만큼 자기를 증명해 보인 후에야 사람을 대접하는 지금의 상식 사이에서 조금은 씁쓸했다.

 

 또 인상적이었던 표현을 보자면 소녀들을 이야기할 때, ‘이제 처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쾌활한 소녀들’이라는 표현에서 그 소녀들의 나이와 그 소녀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페넬로페가 텔레마코스에게 ‘내 눈의 달콤한 빛’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상대가 아들이 아니라,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하. 내 눈의 달콤한 빛! 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런 남자.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머리가 팽팽 도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하고 나니 괜히 행복해진 기분이다. 일리아스는 전쟁이야기를 하다 보니 괴기한 표현들이 많았지만 오뒷세우스에서는 신선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표현들이 많아서 보기에 좋았고 표현 속에 담긴 그들의 사상 또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라서 읽기에 좋았다. 기회가 되시면 모두들 꼭 한번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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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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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재상이라는 유성룡의 이야기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 때의 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에 임진왜란이 빠질 수 없다.

이 때는 당쟁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동,서인, 남,북인으로 갈리게 된 이야기와 그 당쟁 속에

휘말린 유성룡의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당쟁보다도 임진왜란에 더 주목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지만 유성룡 인생의 키워드는 임진왜란, 이순신, 그리고 선조이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이다. 일찍이 이순신을 알았던 유성룡은 이순신의 기질을 알아보았고 그를 요직에 거듭 추천한다. 이순신의 승진에는 언제나 유성룡이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좌천에는 유성룡의 반대파와 선조가 있었다. 이들이 보여준 세력싸움과 질투심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 앞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했고 사대부들 또한 이 혼란중에도 당쟁을 일삼고 있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중심 잘 잡고 나라를 지켜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유성룡이다.

 

 그는 이순신을 천거한 탓에, 그리고 혼란한 조정을 잘 지켜낸 탓에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순신을 다룬 책에서도 종종 선조의 질투심을 언급하고 있다. 전쟁 중에 도망가기에만 급급했던 왕을 백성들이 따를 리 없다. 선조에게는 백성들의 비난이, 하지만 이순신에게는 백성들이 칭송이 함께함을 알았던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제거했을런지도 모른다. 유성룡이 파직당했음을 전해 듣고 이순신은 자신의 앞날 또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순신의 죽음에는 자살이라는 의문이 따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조에게는 유성룡 또한 질투의 대상이었다. 유성룡은 문인임에도 군사전략에도 눈이 밝아 일찍이 이순신을 발탁하였고 유용한 전술을 생각해 낼 줄도 알았다. 게다가 백성의 입장에서 행정적인 업무 처리를 잘 하였으며 도망가려는 왕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조정을 지켜내었다. 백성들은 안다. 누가 백성들을 위하는 사람인지. 백성들은 선조에게는 비난을, 유성룡에게는 칭송과 신뢰를 보였으니 질투의 화신인 선조 눈 밖에 날 수 밖에.  게다가 선조가 도망가려는 것을 번번히 제지하고 선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번번히 제지한 탓에 그는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토사구팽 당하게 된다.

 

 그는 숱하게 선조에게 버림받았지만 이순신이 백의종군 하던 것과 같이 벼슬 없이도 선조의 피난길을 따르기도 하고 또 선조가 다시 부르면 복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파직 당한 후로는 선조가 아무리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이 점에서 토사구팽 당한 후에 유성룡 또한 선조를 버렸다던가, 관직과 담을 쌓았다던가 하는 것 보다는, 유성룡이 정말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재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선조를 보면서 몇번이고 관직을 벗어 던지고 싶어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쟁 중, 그는 차마 백성과 나라를 버릴 수 없었다. 유성룡이 선조에게 답하지 않은 것은 전쟁 후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전쟁, 그 혼란한 와중에는 개인의 감정보다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 같다는,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 더 우위에 두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유성룡의 일대기를 따라가고 있고 그 속에서 유성룡을 조명하고 있기에 많은 부분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조정, 그리고 이순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유성룡에 대해서, 그리고 임진왜란 중의 나라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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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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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때 나는 정보화 사회에 대해 배우면서 앨빈토플러에 대한 언급을 보았다. 앨빈토플러, 제3의물결, 권력이동 등. 이러한 키워드를 보면서 제3의 물결을 언젠가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읽어보진 않았는데 그것은 처음엔 왠지 좀 어려울 것 같은 느낌때문이었을 것이고 이후엔 굳이 읽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부의 미래를 읽고, 예전에 제3의물결을 읽어보고 싶어했을 때 읽어볼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앨빈 토플러는 말을 괜히 어렵게 하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전달력이 좋은 작가, 선생님이지 않을까. 덕분에 부에 대해서, 부의 심층 기반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다가 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을 읽기가 수월했고 재미도 있었다.




 이 책은 서문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요약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요약문은 부의 미래 출간 당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여지껏 읽지 않고 있던 나에게 흥미를 당겨 주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 서점에서 이 책의서문을 읽어보았는데, 서문만 읽었는데도 이 책이 재밌을 것 같고 또 책 내용이 궁금했었다. 그러니 급기야 이 책을 주문하여 읽게 되지 않았을까.




 여하튼 앨빈토플러는 "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경제, 경영에 대한 기사들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부"에 대한 이야기들은 누락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저자는 이 누락된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변화들에 대해, "오늘날 혁명적인 변화의 성격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착각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세계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부의 심층 기반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를 이루는,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는 부의 심층 기반으로 시간, 공간, 지식을 지목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청소년 때 시험 답안에 정보화사회 내지는 제3의물결을 써 넣었듯이 앞으로의 아이들은 부의 심층 기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간, 공간, 지식이라고 써 넣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시간에 대해서는 동시화와 비동시화라는 언급이 자주 나온다. 속도의 차이인 것이다. 적정한 속도의 차이는 진보와 혁신을 이루어내기도 하지만-모든것이 동시화되어 있다면 정지해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고 함께 퇴화해 갈 수도 있다.-비동시화가 심화되면 경제적인 진보를 제한함은 물론,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기업들의 속도와 정부기관의 속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고 이것의 부의 미래를 발목잡을 지도 모른다. 앨빈토플러는 "창조적인 파괴자가 가장 먼저 찢어 버려야 할 것은 어제의 시간표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빠르게,빠르게만을 외치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생태학적인 발레라는 이야기를 하며 생태계에서 빨리 번식하는 종, 느리게 번식하는 종들이 서로 어우러져 생태계를 이루듯이 모든 비지니스에도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의 생태학이 있으며 이러한 조화를 잘 이루어낼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제2의물결인 대량생산체제에서는 근로자들의 표준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즉, 모든 근로자가 9시 출근 6시 퇴근을 하였다. 하지만 제3의물결에서는 각각의 맞춤시간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점점 더 예측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친구와의 약속을 잡을 때 당연한 듯이 저녁 6시이후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부의 심층 기반으로 시간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시간의 변화로 인해 사소하게는 친구와의 약속 시간도 변화하는데 사회는,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은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기에 시간이 부의 표층을 변화시키는 부의 심층 기반이 되는 것이다.




 공간에 대해서는 지리적인 측면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로 부가 이동하고 있으며 예전 좋았던 시절의 굴둑이 있던 곳들도 현재 다른 지역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러가지 첨단 기술들이 기여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 대한 이야기, 세계화, 글로벌 기업, 화폐의 이동, 황사를 비롯한 세계적인 차원의 환경오염 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간 파트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주에 대한 논의이다. 공간 이동에 대해 지구적 차원에서 부가 이동하는 것, 화폐가 이동하는 것, 그리고 세계화 뿐만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류는 우주라는 공간, 그리고 우주라는 공간을 연구, 탐험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들의 다양한 적용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주는 개척되지 않은 신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다. 시간과 공간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느껴져서 부의 심층 기반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지식에 대해서는 누구나 부의 심층 기반이라고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지식의 특징으로 지식이 비경쟁적(수백명이 사용해도 감소되지 않으며 누구나 똑같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이라는 것, 형태가 없다는 것, 직선적이지 않다는 것, 관계적이라는 것, 다른 지식과 어우러진다는 것, 이동이 편리하다는 것, 상징, 추상적인 개념으로 압축 가능하다는 것, 점점 더 작은 공간에 저장될 수 있다는 것, 밀봉하기 어렵다, 즉 퍼져나간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석유와 지식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보다 석유는 쓸수록 줄어들지만 지식은 사용할수록 더 많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다.

이 지식의 장에서 중요한 용어 하나가 나오는데 바로 "무용지식(obsoledge)"이다. 저자가 만들어낸 신조어인데 무용한과 지식의 결합어라고 한다. 모든 지식에는 한정된 수명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그 수명이 끝난 지식을 무용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현대는 지식에서 무용지식으로의 이동하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지식의 반감기라고도 하는데 경영학은 특히나 그 수명이 더 짧은 것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앨빈 토플러에게 감동하는 것이다. 30년이상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책을 펴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 앨빈 토플러의 이러한 통찰력이 나를 감동시켰다.

지식도 점점 변해가고 있다. 산업시대 원칙의 울타리를 부수고 지식을 재직하며 명확하게 구분된 지식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여러분야에 걸친 지식을 요구하는 직업이 늘어나고 있다. 오로지 전문직을 외치던 시대에서 이제는 천문생물학자, 바이오물리학자, 환경기술자, 법률전문회계사처럼 두 단어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직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또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나의 고민은 언제나 전문성 부족이었다. 애초에 경영학을 선택했을 때, 나는 '전문'이라는 단어를 버렸다. 나는 다양하고 많은 것을 접하고 싶었고 여러분야에 걸쳐 공부하고 싶었다. 각각의 깊이는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크게 그려보고 그 속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경영학을 택한 나는 보통 다시 대학을 가거나 하면 전문적인 걸 하기 마련인데 너는 왜 그러느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경영학과를 갔으며, 복수전공으로는 정치외교를 게다가 교직이수까지 신청했다. 그리고 일본어 공부를 했고, 언어는 앞으로도 5년에 하나씩 새로운 언어를 배워나가고 싶다. 여하튼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공부들이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느 한 가지만을 정해서 오로지 그것만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쩌면 회계사시험을 쳐서 회계사가 되겠다던지, 공무원시험을 쳐서 공무원을 되겠다던지, 마케팅을 전공해서 마케팅업계에서 일하겠다던지 등, 이러한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론은 나는 하고 싶은 걸 다 해야겠고 그것은 우선순위, 어느 것을 먼저 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속에서 선택과 집중은 필요하겠지만 선택과 포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하나하나 해 나가는 공부들이 언젠가는 다 내게 도움이 될 거란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하다 못해 내가 열광하는 드라마, 영화, 책, 만화들도 다 내게 지식이 되어 남을 수도, 영감이 되어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아우르는 일이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모든 역량을 아울러 내가 해 낼수 있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이것은 그러한 일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내가 그렇게 해 나가면 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나는 어떤 일을 하든지 조금 더 잘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직이 요구하는 전문적인 지식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배워보고 싶고 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미래 사회는 여러 분야가 결합되고 여러 분야의 결합된 지식을 요구하는 직업이 많이 생겨날 것이고 그러한 역량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니, 나 혼자만의 자위인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무의미한 일 만은 아닌 것 같아 조금 위로가 되었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시사하는 바는 프로슈밍이다. 프로슈머. 소비생산자. 생산자임과 동시에 소비자인 이들.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프로슈머이다. 가정 주부, 손자들을 돌보아 주는 노인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 영화나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사람들, 이 외에 모든 유용한 정보를 올리는 블로거들 등 모두가 살아가면서 각자 프로슈밍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슈머 경제는 측정되고 있지 않다. 즉 비화폐의 프로슈머 경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측정 불가능한 프로슈머 경제는 실질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경제학에서는 이를 다루고 있지 않다.

가사, 보육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봉사활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프로슈밍이다. 무보수로 우리의 노동력을 제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점차 늘어나게 될 노인층들은 유용한 프로슈머들이 될 수 있다. 또 의료와 교육분야에 있어서 프로슈머의 유용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기본적인 해부학과 생리학,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 일반적이고 간단한 질병과 어떤 질병이 전문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등의 의료지식을 습득함으로써 프로슈머들이 보건의료 분야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업들이 소비자들을 프로슈머로 만들어 자사의 비용절감을 이루어 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은행의 인터넷뱅킹이나 현금입출기등이다. 고객들에게는 고객이 기다리는 시간이 줄었다면 자신들이 그러한 서비스를 행함으로서 가능해 진 일이라며 수수료까지 챙기면서 의기양양해 하고 있지만 인터넷뱅킹고 현금입출기도 어느정도 고객의 수고를 요구한다. 이 대가로 은행은 수납창구 여직원을 줄일 수 있었으며 이는 비용절감으로 이어졌다. 요즘 기업들은 점점 더 고객들을 교육시켜 고객이 자신들의 일을 대신하게끔 하고 있다. 수퍼마켓의 발전도 처음에는 일종의 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직원이 앞에서 주문을 받아 창고에서 찾아서 가져다 주는 시스템이었는데 이제는 소비자가 직접 물건을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일 떠넘기기라고 표현해 놓았다. 물론 이러한 예에는 다른 측면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점점 소비자들이 생산에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프로슈머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요구와 소비자의 요구의 절묘한 조화인지도 모른다. 주문제작 또한 소비자가 색상, 디자인,등 요구사항을 전해주기 때문에 기업에서는 고객의 욕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소비자를 설계에 참여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슈밍은 점점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무료공유 소프트웨어라고 불리는 리눅스가 좋은 예이다.

 

 이 책에서는 프로슈머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러한 프로슈머에 대한 글을 읽고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일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나는 마르크스를 떠올렸다. 경제학적 측면에서 마르크스도 이 책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 경제학적 측면이랄까 자본론 말고 마르크스가 그렸던 유토피아에 대해서 떠올렸다. 낮에는 농부이고 저녁에는 시인이 될 수 있는 세상. 이것을 프로슈머를 통해 이루어 낼 순 없을까?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자면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는 되돌아간다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변형으로서 발전해가는 느낌이다. 화폐경제체제도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경제체제에 속하는 프로슈머 경제의 혜택을 누리거나 또는 프로슈머 경제가 비화페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프로슈밍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직접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것들은 서로 물물교환이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던, 산업시대에 노동력을 팔던 것과는 다른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산업시대에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하는 것을 많이 했을 테지만 이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러한 결과물을 서로 공유, 교환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식으로 사회가 발전하다 보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낮에는 농부이고 저녁에는 시인인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빈곤, 가난, 기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은 이 부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현재에도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1억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초반 프랑스의 전형적인 한끼식사가 1965년 당시 르완다 수준이었던 것, 한때는 가장 잘 사는 나라의 경제 규모도 최빈국의 2배에 불과했던 것 등을 볼 때 현재 인류는 빈곤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이야기 하면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빈곤 국가들에 나타난,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트리클 다운' (낙수효과라고도 하며 부유층의 소비 증가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로 연결 돼 전체적인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효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와 부의 혁명이 이러한 빈곤퇴치에 기여했다고 본다. 중국 또한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를 통해 중국은 내부적으로 양극화와 각 층의 갈등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중국은 빠른 속도로 빈곤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전체적으로 잘 사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양 면의 칼이지 않을까. 애덤 스미스의 덕성은 무시한 채 시장만 바라보고 정신 못 차리면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불리는 것들에 의해 사람들이 피폐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를 통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빠르게 빈곤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몇일 전 신문에 보니 빌 게이츠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언급 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말을 하고 있던데 이를 통해 빌 게이츠는 기업들이 빈곤 퇴치에 앞장 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인류의 빈곤 퇴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수많은 자본주의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전체적으로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앨빈 토플러의 낙관적인 시각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낙관론 앞에 앞으로 미래사회는 어떠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느점에서 미래사회에는 무수한 잠재적인 위협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위협으로 인해 미래 사회는 무시무시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그러한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도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앨빈 토플러의 시각이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농업의 미래에 있어 바이오 경제학을 제시하고 있다. 미래에는 농업 분야가 석유 분야와 같은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석유를 대신해 유전자가 많은 원자재와 제품의 핵심 원천이 되는 바이오 기반 경제체제로 나아갈 것을 시사한다. 팀 스미트는 "우리가 식물을 통해 철근이나 케블라보다 강한, 새로운 합성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모든 나라가 각국의 고유한 식물로부터 진보된 물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이오 정유소는 원자재 출처와 가까운 곳에 지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농촌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배 중에 유전육종학을 전공 하는 선배가 있는데 장난 삼아 앞으로의 식량산업의 미래가 선배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식량산업의 미래는 그가 짊어져야 할 미래의 일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식량 뿐만이 아니라 산업 원자재 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물질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유전자의 다양성이 가진 잠재적인 가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참 매력적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는 부의 혁명에 따른 사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혁신이 필요하다. 이는 기업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기술 진보와 경제 발전 속에서 사회 제도는 어떠한가. 사회 제도는 발전하는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을 이루어 내고 기술의 진보를 이루어 낸다. 기업가들은 빠르게 그 기술들을 적용시켜 새로운 제품, 서비스 등을 내어 놓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각 기관은? 학교는? 사회 제도는? 이러한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가. 그리고 적절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가. 앞으로의 미래 사회는 과학자나 기업가 뿐만이 아니라 사회학자 등 각 분야에 있어서의 창의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 제도에도 창조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나는 이 부분을 주목했다. 어쩌면 내가 그러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떠한 기술을 개발해 낼 수는 없지만 그 기술이 사회에 적용되고 사회가 그에 따라 변해 갈 때, 사회의 각각의 제도들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좀 더 유용한 제도가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생각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준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 한권 읽고서 당장 내 길을 찾았어! 이렇게 해야겠어! 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내가 공부를 해 나가고 직업을 가지게 되고 무엇이든 활동을 해 나감에 있어 늘 염두에는 둘 것 같다. 미래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감명 깊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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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정원에서 - 죄악과 매혹으로 가득 찬 금기 음식의 역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정미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작년, 아니 재작년부터? 어쩌면 훨씬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벼루고 벼루던 터라 엄청 재밌을 것이라 기대했었지만 읽고 난 소감은 그다지..재밌지 않았다고 할까.

재미라기 보다는 뭔가 경악, 어처구니 이런 단어가 더 생각났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대 죄악과 동일한 항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브가 따 먹었다는 선악과에서부터 시작한다. 선악과라고 하면 언뜻 사과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애초에 선악과라고 해서 딱히 정해진 과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과일이라고 언급했던 것을 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과에 그 누명을 씌웠다고나 할까. 이 책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추적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사과가 애초에 선악과라는 개념이 있었고 그 개념에다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 과일 저 과일을 끼어 맞추는 과정에서 선악과의 누명을 쓰게 됐다면 초콜렛이나 핫초코 등은 사람들이 무지했던 탓에 이런 저런 누명을 쓰게 되기도 하고 금지 당하기도 하고 선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식가들이 즐겨 먹던 음식들이 나올 땐 정말 기겁할 지경이었다. 별의 별 음식이 다 있었다. 그 음식들은 음식 그 자체 보다는 그 음식의 재료와 조리방법 먹는 방법 등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그저 재미로 읽을 수도 있고 이 책을 통해 음식에 얽힌 이런 저런 역사, 에피소드 등을 알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음식 속의 권력에 대해 눈길이 갔다. 일찍이 지도와 권력을 읽어서일까?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힘의 우위에 위치해 있던 민족이 다른 민족의 음식에 의도적으로 불경한 혐의를 씌우거나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지배와 억압을 목적으로 특정 음식을 제한, 권장하기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빵 폭동?에 관한 것인데 이는 마리앙뜨와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그래요?라는 말 때문에 더 유명한 일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나는 시민들의 혁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빵에 대한, 그야말로 빵 그 자체에 대한 투쟁이었다고 나와 있었다. 우리에게도 지배층이 먹는 것과 같이 희고 속이 말랑말랑한 맛있는 빵을 적정한 가격에 팔아라,가 그들의 요구였다니 말이다. 후에 평등한 빵을 만들자는 노력까지 있었다고 하니, 프랑스 국민들 정말 빵에 목숨거는 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은 나는 정말 요리를 싫어하는 구나 하는 것이었다.

음식에 얽힌 역사랄까 에피소드 등이 나오면 관심있게 보면서도 음식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나 조리법 등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나 지루하게 느껴지던지...책 속에 실려 있는 조리법은 단 한개도 읽지 않았다. 내가 이거 만들 일 있겠어?이러면서 그냥 패스~굳이 만들지 않더라도 레시피를 보면서 재밌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 그 레시피 읽는 게 시간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 이정도면 좀 심각하지 않을까. 어찌됐건, 오래도록 읽고 싶던 책을 읽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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