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KBS에서 방영된 자연 다큐멘터리 '완벽한 행성, 지구'를 보는데, 내레이션이 감성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들렸다. 다큐 중간에 해설자의 이름이 떠서 보니 배우 김승우였다. 대개 그런 자연 다큐멘터리들의 해설은 성우나 아나운서들의 몫이지만, 가끔은 배우들이 할 때가 있다. EBS에서 했던 3부작 자연 다큐 '천국의 새'에서는 배우 이혜영이 내레이션을 했다. 정말로 멋지고 완벽한 내레이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배우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발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성 영화 시절의 배우들은 그런 발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자막과 음악으로 처리되는 화면에서 배우들은 무성 영화에 특화된 표정과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은 무성 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였다. 스완슨은 자신의 영화사까지 차려서 영화를 찍을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유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전 시기 배우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천하의 스완슨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이후로 잠정 은퇴 상태였던 스완슨을 다시 불러낸 것은 빌리 와일더였다.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는 잊혀진 배우 스완슨을 완벽하게 복귀시켰다. 빌리 와일더는 이 영화에서 헐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자신만의 음울하고 통렬한 성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의 B급 시나리오 작가인 조(윌리엄 홀덴 분)는 살던 집의 집세가 밀리고 차까지 압류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떻게든 글을 써서 먹고 살 방도를 찾으려 하지만, 정글같은 헐리우드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압류 회사 직원을 피해 차를 몰다가 우연히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그는 황량한 외관의 대저택을 발견한다. 차만 숨기고 나오려던 그는 얼떨결에 집사(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분)의 안내로 주인과 만나게 된다. 조는 키우던 원숭이의 죽음으로 애통해하는 중년의 여자가 은퇴한 무성 영화 배우 노마 데스먼드임을 알아차린다. 여주인은 조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을 듣고 복귀작으로 집필중인 시나리오 원고를 맡긴다. 마지못해 일을 시작한 조는 점차 노마가 제공하는 돈과 안락한 삶에 익숙해진다. 현실과 담을 쌓고 과거의 영광에 도취해 살아가는 노마는 조에게 구애하고, 조는 그런 당혹스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시나리오 집필에 착수한다. 영화사 시나리오 담당인 베티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나가는 조, 노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조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영화는 풀장에 뜬 시신과 함께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조는 이미 죽었고, 영화는 죽은 자인 조의 시점에서 회고하는 6개월 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흔히 필름 느와르로 분류되는데, 과연 그렇게 보는 것은 타당할까?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는 으스스하고 기괴하다. 노마가 살고 있는 대저택의 외관은 거의 버려진 폐가처럼 보인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격리된 장소, 그곳의 주인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박제해놓은 집에서 살고 있다. 거실은 배우 시절의 사진 액자가 잔뜩 들어차 있고, 그곳에서 노마는 무성 영화 시절의 영화계 친구들과 가끔씩 카드놀이를 한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를 틀어놓고 보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이 은퇴한 여배우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단 한 가지, 젊음만이 없을 뿐이다. 자신이 늙었고, 다시는 영화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노마는 마치 화석처럼 살아가고 있다.

  빌리 와일더가 글로리아 스완슨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노마 역에 스완슨이 아닌 다른 배우를 쓸 수 있었을까?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후, 단절된 경력 속에서 잊혀진 배우 스완슨, 그리고 그의 집사 맥스로 나온 이는 무성 영화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이다. 대표작 'Greed(1924)'로 잘 알려진 이 감독은 실제로 스완슨이 만든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도 했다. 노마가 집에서 감상하는 자신의 영화 'Queen Kelly(1932)'는 스트로하임이 연출한 작품이다. 스트로하임은 그 영화를 찍다가 제작비를 너무 많이 써서 스완슨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있다. 빌리 와일더는 이전 무성 영화 시대의 쟁쟁한 인물들을 한데 그러모은다. 노마의 카드 놀이 친구로 등장하는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은 무성 영화 시절의 감독 겸 배우였고, 노마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 만나는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은 무성 영화 시절에 스완슨과 함께 했고 유성 영화시절에도 명성을 날렸던 감독이었다.

  비극은 노마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에 안주하지 못하고 현실로 틈입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돈으로 굴복시킨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의 젊음과 사랑은 결코 노마의 것이 될 수 없다. 영화사에서는 늙어버린 여배우가 아닌 소품으로 쓰려는 노마의 비싼 클래식 자동차에 관심을 둘 뿐이다. 시들고 낡은 것은 버림받는다. 빌리 와일더는 영화 산업이 어떻게 자신의 영역 속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며 그것을 바탕으로 번영하는지를 노마와 그 주변인물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선셋 대로'는 빌리 와일더가 바라보는 헐리우드의 냉혹한 속성, 은막 뒤의 감춰진 것들에 대한 처절한 초상이며 성찰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MGM의 제작자 메이어는 와일더가 영화 산업과 그 종사자들을 모독했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노마의 애완 동물로 살다가 죽은 원숭이가 비싼 관에 감싸여 정원에 매장된 것처럼, 원숭이를 대체하는 노리개감인 조 또한 풀장에 엎어진 시신으로 발견된다.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배우의 병적인 집착은 스스로를 살인범으로 만들며, 체포의 순간조차도 복귀 영화 '살로메'의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노마가 보여주는 과장된 표정과 손짓, 연기는 이 여배우가 새로운 시대에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자체로 입증한다. 썩은 고기를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몰려들고, 영화계 가십을 전문으로 쓰는 칼럼니스트는 넋나간 여배우의 옆에서 신나게 기사를 전송한다. 그 칼럼니스트는 영화 '트럼보(Trumbo, 2015)'의 헬렌 미렌이 연기한 헤다 호퍼(Hedda Hopper) 본인이 맞다. 호퍼 자신도 무성 영화 시절에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배우였다. 호퍼는 무성 영화 경력을 마감하면서 영화계 주변에 떠도는 온갖 소문과 잡담을 쓰는 칼럼니스트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빌리 와일더가 그려낸 이 메타 영화(Meta-cinema)는 느와르와 로맨스, 심리 스릴러를 넘나들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인생을 재현(retrospection)하고 모방하는 영화는 결코 시들고 추한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늘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흡혈귀처럼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글로리아 스완슨이 연기한 퇴락한 배우 노마와 영화 속 과거의 무성 영화 배우들, 영화계의 작은 소모 부품으로 존재하다 사라지는 조와 베티 같은 인물들은 거대한 영화 산업에서 생기는 부산물과도 같다. 이러한 영화 속 영화 이야기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 같은 영화들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빌리 와일더는 자신이 직접 겪은 영화계와 그 경험담을 토대로 무성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한 헐리우드 격변기에 대한 탐구를 '선셋 대로'로 풀어냈다. 결국 그가 파내어 팔아먹은 영화계 이야기는 빌리 와일더에게 경력의 전성기를 이어가게 했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지 못하고 주춤했던 윌리엄 홀덴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영화로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 성공은 이어지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스완슨에게 비춰지던 낙조(落照)였던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부와 명성을 가진 이 여배우에게 아쉬움은 없었을 것이다. '선셋 대로'에는 그렇게 영화와 그것과 함께한 이들의 인생,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사진 출처: framerated.co.uk



** 연휴 잘 보내고, 수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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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신-정전자(God of Gamblers, 1989)'를 보고 나서 주윤발이라는 배우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도박의 신'과 머리를 다쳐 아이처럼 되어버린 '초콜릿'을 오가는 그의 연기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이지 '천상 배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영화 '용호풍운(City on Fire, 1987)'은 그보다 2년 전 작품인데, 여기에서 주윤발은 좀 더 풋풋한 느낌의, 나중에 그가 대표할 홍콩 느와르 캐릭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흔히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에 주요한 영감을 준 작품으로 좀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윤발과 홍콩 영화 팬들에게 이 작품은 뭔가 시금석처럼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제목만 검색창에 입력해 봐도 주르르 뜨는 '용호풍운'리뷰들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영화는 번화한 홍콩의 상점가에서 한 남자가 칼에 찔려 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비밀 경찰로 정체가 탄로나면서 살해당했다. 유 경위는 잠정 은퇴한 경찰 가오추(주윤발 분)에게 임무를 주려고 하지만 가오추는 거부한다. 이전의 작전에서 친했던 조직원이 자신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유 경위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된 가오추, 그는 보석 강도단에 잠입해서 조직원 아후(이수현 분)와 친형제처럼 가까워진다. 그러나 가오추의 정체를 모르는 신임 경위 존은 가오추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유 경위와 존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크리스마스에 크게 한탕을 하려는 조직과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경찰, 가오추는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저수지의 개들'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내게는 영화의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하다. 사실 '용호풍운'을 보면서 떠오른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였다. 두 영화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결말을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맺는 유사 부자(父子) 관계도 동일하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가오추는 어떻게든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연인과 결혼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일을 시작한 이유는 유 경위와의 관계 때문이다. 유 경위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가오추는 자신의 아저씨가 신임 경위와 힘겨운 경쟁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죽은 경찰의 장례식에서 울부짖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려는 불타는 신념 때문이 아니라, '아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을 떠맡는다. 가오추와 유 경위의 관계는 '디파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빌리와 퀴넌 경감 사이와도 같다.

  유 경위의 '아들' 가오추는 조직에 들어가서는 아후와 새로운 '형제'가 된다. 아버지는 경찰, 형제는 강도인 가오추에게 조만간 결단의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이미 가오추는 이전의 임무에서 아버지를 위해 동고동락했던 조직원을 배신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가오추는 보석상을 털다가 총에 맞은 아후를 위해 존의 부하 경찰을 쏜다. 그는 자신의 '형제'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 '용호풍운'은 홍콩 느와르를 지탱하는 주된 정서가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리, 또는 신의로 포장된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가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오추가 잠입한 보석 강도단 내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조직의 신임을 얻은 가오추는 교외에 위치한 강도단의 아지트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같이 숙식을 하며 유사 가족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흥미있는 장면은 유 경위가 존의 사무실에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이유는 사무실 한 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관우' 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개인의 방이 아니라, 관공서인 경찰서에 어떻게 관우 상이 자리할 수 있을까? 관우는 중국 민간 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지만, 특히 홍콩 사람들에게 관우는 더욱 각별하다. 경찰서와 파출소에 관우 상을 두는 이유는 무신 관우의 힘을 빌어 악한 범죄자들을 검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가족주의와 함께 도교 신앙의 큰 영향력이 미치는 '홍콩'이라는 지역색은 '용호풍운'을 다채롭게 만든다. 함께 숙식하는 보석 강도단의 주 무기는 식칼이며(그들은 총을 어렵게 구한다), 인구밀도가 조밀하기로 소문난 홍콩의 대로변에서 자동차를 이용한 제대로 된 추격신은 찍기 어려우니 파쿠르(parkour,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이동 방법)가 등장한다. 가오추는 존의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타고 내려오는가 하면, 높은 건물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34년 전에 만든 이 홍콩 느와르 영화는 군데군데 헛점이 있으며, 거친 편집과 촬영이 촌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을 만든 임영동(林嶺東, Ringo Lam) 감독은 이후 제작될 비슷한 이야기의 영화들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강한 정서적 연대로 엮인 남자들의 세계,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밖에 없는 경찰과 범죄자,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 등장인물들, 그 모든 것의 원형이 '용호풍운'에 날것으로 들어 있다. 2년 뒤에 만들어진 오우삼의 '첩혈속집(Hard-Boiled)'에서 주윤발은 범죄자로, 이수현은 경찰로 나와서 '용호풍운'의 배역을 서로 바꾸어 연기한다. 이 징한 느와르 변주곡은 그후로도 계속 이어질 참이었다. 결국에는 닳아진 국그릇 밑바닥처럼 되었지만, 그 영화들과 젊은 시절을 함께 한 관객들에게 '용호풍운'과 같은 영화들은 비평적 텍스트가 아니라 인생의 추억으로 자리한다. 절절한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젊은 날, 그것이 많은 블로거들에게 홍콩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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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가끔 영화를 본다는 것이 권투 선수가 링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상대편 선수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무작정 링에 올라서 시합해야 하는 느낌. 어떨 때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경기를 끝내지만, 때론 상대방의 강타에 휘청거리다 링을 나오는 때도 있다. 나에게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은 선수로 치자면 상대편을 무척 진이 빠지고 힘들게 만드는 무척 까다로운 대전 상대다.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 2001)', 히든(Hidden, Caché, 2005)을 보면서 그 암울하고 출구 없는 세계관이 참 싫었더랬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양반 영화는 그냥 안보고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오늘은, 그동안 좀 쉬운 선수들을 만났으니 약간은 좀 긴장 좀 해보자 싶었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Fragments of a Chronology of Chance, 1994)'을 그렇게 영화 감상의 링 위에서 만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Short Cuts, 1993)'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다. 솔직히 '어, 좀 약한데?'라고 슬쩍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하네케만의 디스토피아적 관점은 관객을 진흙탕으로 무작정 끌고 들어간다. 영화는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진다.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방송 뉴스 화면이 흘러 나온다. 뉴스들의 내용은 당시 분쟁 지역들과 관련된 소식이다. 보스니아와 소말리아, 아이티의 내전 소식, IRA와 쿠르드 반군의 전투, 유럽의 이민자들 문제며 유고슬라비아의 인종 청소,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소식까지 망라한다.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의 일상은 암전(blackout)화면에 이어 연결된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루마니아 소년, 고아원 아이를 입양하려는 중년의 부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보안회사 직원과 그 아내, 가족의 무관심 속에 홀로 지내는 외로운 노인, 불만이 가득한 대학생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끌어간다.

  1993년 10월에서 12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은행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엮인다. 1시간 35분의 러닝타임에 마지막 15분 가량의 결정적 순간을 향해 가기까지 영화는 더디고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시간이 정말로 느리게 간다고 느끼게 된다. 관객은 외롭고 아픈 노인이 냉담한 딸에게 쏟아내는 폭풍같은 불평의 전화와, 대학생이 탁구 연습을 하는 롱테이크를 명상하듯 응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라고 계속 질문을 던질 때마다 뉴스 보도 화면이 딱딱 맞춰 나온다. 전쟁과 참혹한 살상의 소식은 고립된 인물들의 일상과 병치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노인이 딸(은행원)을 만나는 곳은 자신의 연금을 찾는 은행 창구이며,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한 부부는 가벼운 대화나 접촉도 거부하는 아이의 폐쇄성에 좌절한다. 국경을 넘은 소년은 도둑질과 거리 생활에 익숙해지며 부랑아가 된다. 거리를 헤매는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는 하네케의 주요 관심사인 미디어, 인간 사이의 소외와 단절, 폭력에 대한 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뉴스 화면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소식들에 무감각해진다. 그 누구도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폭력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다.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고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단절시키고 고립시킨다. 전화통을 붙들고 딸의 무관심을 꾸짖는 외로운 노인의 옆에는 TV가 켜져있고 계속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용히 통화하려면 TV를 꺼야하지 않을까? 이 노인은 밥 먹을 때도 TV를 켜놓는다(사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노인에게 미디어는 세상과의 소통이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배경 소음으로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흥미있는 장면이 있다. 바로 대학생들이 계속 반복해서 하는 조각 퍼즐 놀이이다. 잘라진 종이 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형태로 완성하는 것인데, 그들은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결국 그 퍼즐을 완성하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영화는 조각난 이야기들을 '우연'이라는 요소로 그러모아 마침내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한다. 고장난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빼내지 못한 대학생은 갑자기 총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 난사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실제 있었던 그 사건에서 범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하네케는 그 사건을 이 영화의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희생자가 된 이들이 무심히 보았던 뉴스는 다시 그들의 비극을 방송으로 송출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 폭력은 일상에 스며들어 빠르게 재생산된다.

  하네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차갑고 건조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이며, 고립과 단절은 인간의 숙명이다. 미디어가 그런 인간을 이어주고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해줄 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은 사태를 제대로 성찰할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방송되었던 뉴스가 똑같이 반복되어서 재생되는 장면은 그 악순환의 틀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돌아오게 되는 하네케 영감님의 암울한 닫힌 세계가 궁금한 이들은 한 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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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데서 이상한 사람들과 있으면 네가 더 나빠질 거야. 좋은 음식 먹고 영양제 같은 것도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니. 그러니 의사한테 말해서 여길 나가자꾸나."

  남자는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는 딸을 그렇게 구슬린다. 딸 건너편 침대에서 이어폰을 꼽고 대화를 못들은 척하는 유스테를 남자는 힐끗 쳐다본다. 그의 눈에는 유스테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딸이 그곳을 나가서 좋은 음식이나 영양제 먹는다고 나아질 수 있을까? 리투아니아의 신예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Marija Kavtaradzė)의 2018년작 '여름 생존자(Išgyventi vasarą)'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심리학과 대학원생인 인드레는 바이오피드백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다. 인드레가 도움을 받길 원하는 빌뉴스 정신 병동의 의사는 조건을 하나 내건다. 다른 정신과 클리닉으로 치료를 의뢰할 병동의 환자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데려다 주고 오라는 것. 꽤 먼거리를 환자들을 데리고 운전해야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만 인드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나마 오랜 경력의 간호사가 동행하는 것에 안심하면서 길을 떠나는 인드레. 파울리우스는 조울증 환자이고, 유스테는 최근에 자살 시도를 했다. 타인과의 소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학원생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이 여정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여름 생존자라... 제목이 특이하다. 마리야 카브타라제 감독은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은 매일매일의 삶이 투쟁이며, 그것에서 생존하는 것이 커다란 화두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출처: 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영화의 구성은 비교적 명료하다. 과제가 주어지고, 주인공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로드 무비에서 그가 함께 할 동행자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는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견고하고 견디기 힘든 것인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인드레가 운전하는 차에는 '빌뉴스 정신 병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파울리우스는 휴게소에서 젊은 커플이 그것을 보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저 차에 탄 미친 인간들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며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은 그는 임시방편으로 차에 박스를 뜯어붙여 글씨를 가린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인드레와 파울리우스, 유스테는 서로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조금씩 친해진다. 인드레는 5년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는 파울리우스의 절망도 공감하고,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유스테의 아픔도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특이하고 이상한 모습이 아닌, 그 나이 또래 젊은이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물론 그것은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과 약물과 치료의 도움으로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생존자(survivor)라는 제목 그대로,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는 매 순간 마음 속 고통과 전쟁을 치룬다.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서 두려움에 떠는 유스테를 돕는 것은 파울리우스이다. 그는 유스테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 지나가, 너도 알잖아. 지나갈 거라구'라고 말해준다.

  인드레는 아무는 팔목 상처를 가려워하는 유스테를 위해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서 소독을 해준다. 붕대를 풀자 길게 꿰맨 유스테의 자해 상처가 보인다. 그것은 타인이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유스테의 내적 고통의 흔적이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파울리우스도 마찬가지. 휴게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파울리우스. '난 다시 노래할 거야(I'll sing again)'라고 목놓아 부르는 파울리우스의 바람은 언젠가 돌아가고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간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리투아니아의 이 신예 감독은 훈계나 설교가 아닌 따뜻한 감성으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맞선다. 여행 도중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사물들은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신의 영화가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과 그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카브타라제 감독.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가진 견고한 편견의 벽이 조금은 낮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빌뉴스 병동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유스테는 침대에 누워 웃는 연습을 한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 연습이 자신의 오늘을, 내일을 견딜 수 있게, 그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할 거라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리투아니아어 원제목의 뜻은 '여름을 견디다'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꽂히는 여름날을 견뎌내는 것처럼,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이들에게 '여름의 생존자'는 작은 위로를 건넨다. 
   


*사진 출처: filmproducers.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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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구 소련 시절의 영화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별로 재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무슨 구닥다리 영화를 저렇게 보나,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들이 정말로 재미있다. 재미가 없는데도 억지로 보고 과제처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영화가 시작할 때 모스 필름(Mosfilm)의 로고가 뜨는 것만 봐도 정겹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러시아 영화를 접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도 있다. 무엇보다 그 영화들이 나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거기에 소련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삶이 영화 속에 다채롭게 펼쳐진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아포냐(Afonya, 1975)'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모범적 시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등장한다. 배관공 아파나시(애칭 아포냐)는 '인민의 적'까지는 아니지만, '인민의 골칫덩이'임에는 분명하다. 영화는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포냐가 행복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배관공으로 일하는 아포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대충 하고, 고객들에게 수리비를 더 뜯어내기도 한다. 아포냐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보드카를 가지고 다닐 정도다. 늘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포냐에게 질려서 동거하던 여자 친구도 떠나버린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알게 된 미장공 콜랴와 함께 지내게 된 아포냐, 콜랴는 대책없이 살아가는 아포냐를 걱정한다. 그러나 아포냐는 술에 취해 연못에 빠져 음주 단속 경찰에 체포되는가 하면, 클럽에서 싸움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런 아포냐를 예전부터 짝사랑한 어여쁜 간호사 카챠는 아포냐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아포냐는 무관심하다. 수리하러 갔다가 알게 된 미모의 고객 엘레나에게 마음을 뺏긴 아포냐는 엘레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 남의 집 새 싱크대까지 뜯어 바꿔주기까지 한다. 과연 아포냐의 인생에도 볕들 날이 있을까...

  "자넨 결혼을 해야 해. 가정은 국가의 기초를 이루지."

  아포냐처럼 술을 좋아해서 아내에게 쫓겨난 신세이면서도 콜랴는 아포냐에게 그렇게 충고한다. 이젠 젊은 나이도 아니고 중년을 향해 가는 아포냐에게는 삶의 즐거움이나 목적이 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그저 대충 때우면서 살아갈 뿐이다. 자신이 맡은 구역이 아니면 아파트 배관이 터져서 주민들이 고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상사는 작업장에 견습 온 학생들도 배정해주지 않는다. 상사에게 따져서 억지로 견습생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데, 그 견습생들은 결국 배울 게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배정해달라고 하소연한다. 술 문제로 사고칠 때마다 지역 위원회에 불려가서 자아비판 당하는 것도 여러 번이다. 반복되는 경고 처분에도 소용이 없자, 집으로 찾아온 회사 간부는 아포냐에게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네 문제가 뭔지 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거야. 그건 범죄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와 같다구."

  그는 아포냐 같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직 사회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체제의 오물로 취급한다. 확실히 이 영화 속 주인공 아포냐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이상으로 삼는 바람직한 인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뭔가 삐딱선을 탄, 목표도 없이 부유하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배관공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대체 뭘까? 어릴 때 어머니를, 아버지는 전쟁통에 잃은 아포냐는 고모의 손에 자라면서 고아 신세는 면했지만, 아포냐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 같은 것이 있다. 아포냐는 고향 마을에서 엘레나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아포냐는 배관공일 뿐이다.

  1975년, '아포냐'는 그 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무려 6200만 명이 관람하며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했다. 사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이 영화는 그다지 큰 재미는 없다. 영화는 당시 소련에서 유행했던 여러 노래들이 흘러 나오는데, 다넬리야 감독은 자신의 영화들에서 특히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마도 소련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공감대가 흥행의 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포냐가 보여주는 체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순응성이야말로 당시의 관객들이 열광한 부분이었다. 그즈음 소련은 기계적 규율과 엄혹한 통치로 인민의 삶을 강제하는 것에 서서히 부하가 걸리는 징후를 보인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 침체와 수구적인 사회 분위기에 소련 사람들은 염증을 느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보드카 소비량(음주 단속 전담 경찰이 생길 정도였다), 코미디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에는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있다.

  이도 저도 되는 일도 없이 좌절만 하는 아포냐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넬리야 감독은 공산주의 사회의 표류자, 경계인인 아포냐를 어떤 식으로든 구제해야만 했다. 마치 구원의 여신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카챠가 아포냐를 찾아 온다. 카챠 역을 연기한 에프게니아 시모노바는 이 영화로 단번에 인기 스타가 되었다. 뭔가 중년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진무구하고 앳된 아가씨 역은 시모노바에게 배우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이후에 이어진 역들이 대부분 청순가련형의 캐릭터들이어서 배우 자신은 이 영화를 아쉽게 생각했다.

  다넬리야 감독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미도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Walking the Streets of Moscow, 1964)'와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 1979)'에서 보여준 그만의 영화적 감수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아포냐'는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소련의 체제와 그 속에서 방향을 잃은 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넬리야 감독은 소련의 컬트 SF영화라고 할 수 있는 'Kin-dza-dza!(1986)'에서도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검열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시대와 공명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낸 이 감독의 영화적 여정에는 그렇게 소련이란 나라와 그곳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사진 출처: filmpr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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