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신-정전자(God of Gamblers, 1989)'를 보고 나서 주윤발이라는 배우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도박의 신'과 머리를 다쳐 아이처럼 되어버린 '초콜릿'을 오가는 그의 연기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이지 '천상 배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영화 '용호풍운(City on Fire, 1987)'은 그보다 2년 전 작품인데, 여기에서 주윤발은 좀 더 풋풋한 느낌의, 나중에 그가 대표할 홍콩 느와르 캐릭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흔히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에 주요한 영감을 준 작품으로 좀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윤발과 홍콩 영화 팬들에게 이 작품은 뭔가 시금석처럼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제목만 검색창에 입력해 봐도 주르르 뜨는 '용호풍운'리뷰들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영화는 번화한 홍콩의 상점가에서 한 남자가 칼에 찔려 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비밀 경찰로 정체가 탄로나면서 살해당했다. 유 경위는 잠정 은퇴한 경찰 가오추(주윤발 분)에게 임무를 주려고 하지만 가오추는 거부한다. 이전의 작전에서 친했던 조직원이 자신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유 경위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된 가오추, 그는 보석 강도단에 잠입해서 조직원 아후(이수현 분)와 친형제처럼 가까워진다. 그러나 가오추의 정체를 모르는 신임 경위 존은 가오추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유 경위와 존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크리스마스에 크게 한탕을 하려는 조직과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경찰, 가오추는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저수지의 개들'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내게는 영화의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하다. 사실 '용호풍운'을 보면서 떠오른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였다. 두 영화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결말을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맺는 유사 부자(父子) 관계도 동일하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가오추는 어떻게든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연인과 결혼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일을 시작한 이유는 유 경위와의 관계 때문이다. 유 경위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가오추는 자신의 아저씨가 신임 경위와 힘겨운 경쟁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죽은 경찰의 장례식에서 울부짖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려는 불타는 신념 때문이 아니라, '아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을 떠맡는다. 가오추와 유 경위의 관계는 '디파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빌리와 퀴넌 경감 사이와도 같다.

  유 경위의 '아들' 가오추는 조직에 들어가서는 아후와 새로운 '형제'가 된다. 아버지는 경찰, 형제는 강도인 가오추에게 조만간 결단의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이미 가오추는 이전의 임무에서 아버지를 위해 동고동락했던 조직원을 배신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가오추는 보석상을 털다가 총에 맞은 아후를 위해 존의 부하 경찰을 쏜다. 그는 자신의 '형제'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 '용호풍운'은 홍콩 느와르를 지탱하는 주된 정서가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리, 또는 신의로 포장된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가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오추가 잠입한 보석 강도단 내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조직의 신임을 얻은 가오추는 교외에 위치한 강도단의 아지트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같이 숙식을 하며 유사 가족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흥미있는 장면은 유 경위가 존의 사무실에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이유는 사무실 한 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관우' 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개인의 방이 아니라, 관공서인 경찰서에 어떻게 관우 상이 자리할 수 있을까? 관우는 중국 민간 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지만, 특히 홍콩 사람들에게 관우는 더욱 각별하다. 경찰서와 파출소에 관우 상을 두는 이유는 무신 관우의 힘을 빌어 악한 범죄자들을 검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가족주의와 함께 도교 신앙의 큰 영향력이 미치는 '홍콩'이라는 지역색은 '용호풍운'을 다채롭게 만든다. 함께 숙식하는 보석 강도단의 주 무기는 식칼이며(그들은 총을 어렵게 구한다), 인구밀도가 조밀하기로 소문난 홍콩의 대로변에서 자동차를 이용한 제대로 된 추격신은 찍기 어려우니 파쿠르(parkour,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이동 방법)가 등장한다. 가오추는 존의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타고 내려오는가 하면, 높은 건물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34년 전에 만든 이 홍콩 느와르 영화는 군데군데 헛점이 있으며, 거친 편집과 촬영이 촌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을 만든 임영동(林嶺東, Ringo Lam) 감독은 이후 제작될 비슷한 이야기의 영화들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강한 정서적 연대로 엮인 남자들의 세계,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밖에 없는 경찰과 범죄자,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 등장인물들, 그 모든 것의 원형이 '용호풍운'에 날것으로 들어 있다. 2년 뒤에 만들어진 오우삼의 '첩혈속집(Hard-Boiled)'에서 주윤발은 범죄자로, 이수현은 경찰로 나와서 '용호풍운'의 배역을 서로 바꾸어 연기한다. 이 징한 느와르 변주곡은 그후로도 계속 이어질 참이었다. 결국에는 닳아진 국그릇 밑바닥처럼 되었지만, 그 영화들과 젊은 시절을 함께 한 관객들에게 '용호풍운'과 같은 영화들은 비평적 텍스트가 아니라 인생의 추억으로 자리한다. 절절한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젊은 날, 그것이 많은 블로거들에게 홍콩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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