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현실 세계가 아니에요. 우린 '거품' 속에서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But it is not the real world. We live in a bubble)." 
 
  플로리다주에는 미국 최대의 은퇴자 마을이 있다. 'The Villages'. 1980년대 초반에 부동산 업자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이곳의 주민은 초창기 800명에서 이제는 약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카메라가 비춰주는 '빌리지'의 풍광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50개가 넘는 골프 코스로 연결된 주거지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를 비롯해 쇼핑몰과 병원,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수많은 클럽까지. 열정적으로 연습하는 할머니 치어리더들이며 휴양지의 옷차림으로 일광욕을 하는 노인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종종 이곳은 '은퇴자들의 디즈니랜드'로 불리기도 한다.

  Lance Oppenheim의 2020년작 다큐 'Some Kind of Heaven'은 관객을 'The Villages'로 안내한다. 노인들이 꿈꾸는 천국처럼 보이는 곳. 과연 빌리지의 삶은 행복할까? 물론 그곳의 주민이 되려면 안정적인 재정은 필수이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온갖 편의시설과 안락함은 '돈'에서 나온다. 빌리지 주민들은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었다. 주로 백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인종적,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구 구조를 갖고 있다.

  랜스 오펜하임은 처음에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 형식으로 빌리지의 삶을 담아내려 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존재는 흥미있는 외지인으로 늘 주목을 끌었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러운 촬영이 쉽지가 않았다. 1년의 시간을 두고 그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결국 그는 인간적인 유대를 맺은 일부 주민들의 이야기를 찍었다(harvard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 인물들을 통해 다큐는 매일매일이 휴양지의 삶 같은 빌리지의 반짝거리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거기에도 숨겨진 이면이 있다.

  결혼 47주년을 맞이하는 Anne과 Reggi 부부는 오랜 세월 소통의 단절로 서먹서먹한 상태이다. 거기에다 남편 Reggi는 약물 남용(마리화나와 마약) 혐의로 기소된 상태이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잘못된 방식을 택했고, 그것이 부부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간절하게 연인을 찾는 과부 Barbara도 있다. 남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집을 팔고 빌리지에 정착한 바바라는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눌러 앉았다. 원래 살았던 곳으로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빌리지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벌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외로움이야말로 바바라가 해결하고 싶은 중요한 문제이다.

  아마도 이 다큐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라면 Dennis일 것이다. 낡은 승합차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빌리지에서 돈 많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꿈이다. 지인들에게 돈 좀 꾸어달라며 호기롭게 전화를 돌려대는 데니스의 모습에서는 번지르르한 말발이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 가진 거라곤 그저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로 들어찬 비좁은 차 한 대 뿐이지만, 데니스는 당당하다. 과연 81세의 노인은 부자 애인을 만나 늘그막의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Some Kind of Heaven'을 보고 있노라면 에롤 모리스의 'Gates of Heaven(1978)'과 'Vernon, Florida (1981)'를 떠올리게 된다. 그 두 개의 초창기 에롤 모리스의 다큐는 장차 독창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될 그에게 흥미로운 습작이었다. 'Gates of Heaven'은 애완 동물 묘지 사업을 하는 특이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진 'Vernon, Florida (1981)'에서는 플로리다의 버논 마을에 사는 기이하고 괴상한 주민들과의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모리스는 원래 그 마을을 횡행하는 신체 절단 보험 사기에 대해 찍으려 했으나, 촬영에 반감을 가진 주민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을 겪은 후 포기했다(그는 정말로 기분 더러운 경험이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1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모리스는 촬영의 방향을 바꾸어서 마을의 '괴짜들' 이야기를 다큐로 찍었다. 그는 미국의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찍는 다큐의 인물들을 일부러 찾거나 조사한 적은 없어요. 대개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들이 나의 눈에 들어옵니다."

  랜스 오펜하임이 포착한 다큐 속 빌리지의 주민들은 그곳을 대표하지도,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들도 아니다.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좀 더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주민들로 선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는 엄밀히 말해서 '빌리지'와 '빌리지 피플'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 인물 다큐로 보는 편이 맞다. 다큐 속 인물들은 독특하고 흥미있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애인을 찾길 바라는 바바라는 골프 카트 판매자 린과의 만남에서 강렬한 연애 감정을 느낀다. 린이 다른 여자와 춤추는 것을 보고 매서운 눈빛으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청춘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비족 영감이라고 할 수 있는 데니스는 또 어떤가? 그의 속보이는 뻔뻔스러운 수작은 애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다큐는 은퇴자들의 천국 '빌리지' 안에 만화경과 같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서적인 어려움을 가진 Reggie가 약물 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는 장면은 빌리지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들의 주거지로만 적합한 곳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열정적인 교회 부흥 설교자들의 강연은 역설적으로 그곳 주민들의 영적인 갈망과 내면의 빈곤을 부각시킨다. 바바라는 돈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자신이 원하는 이전의 인간 관계망을 복원하지 못한다. 바바라에게 빌리지는 즐거운 디즈니랜드가 아니라 외로움을 강제하는 족쇄일 뿐이다.

  과연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큐 속 인물들은 노년에도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유대에 대한 욕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안락한 삶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와의 만남이 단절된 채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제공하는 휴식에 안주하는 삶은 건강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거품처럼 터져버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이다. 'Some Kind of Heaven'은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라는 영화의 성찰(retrospection)적 측면을 제공한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언젠가 다가올 노년의 날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진 출처: variety.com    

부자 애인을 만나는 것이 꿈인 Dennis


노년의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Barb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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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글을 쓰는 잡다한 일자리를 전전했다. '신문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는 했으나 먹고 사는 일은 힘들었다. 매춘부를 소재로 한 첫 번째 소설은 통속적이며 경박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마을 이웃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북 전쟁(Civil War) 이야기였다. 일단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약간의 자료 조사를 해보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으로 떠올랐다. 정돈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그저 군사 학교에 잠깐 다녔을 뿐인 풋내기 작가는 소설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작품으로 근대 영미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Stephen Crane(1871-1900)의 '붉은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 1895)'은 전쟁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설은 전쟁의 외피가 아닌, 철저히 참전 군인의 내적 변화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그려낸 것이 현실의 풍경인지, 주인공 헨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종종 모호하게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내레이터가 영화의 원작자와 소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은 이들은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겁 많은 소년은 전투를 통해 용기 있는 남자로 변모한다'. 과연 그러한가?

  1951년, 존 휴스턴(John Huston) 감독은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제작사는 MGM이었다. 영화에 대한 지독한 상업주의적 관점을 가진 제작사가 장차 자신이 만들 영화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휴스턴은 알지 못했다. 여자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며 제작사는 반대했으나, 휴스턴과의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작을 승인했다. 휴스턴은 원작이 가진 반전(
反戰) 메시지에 깊이 공감했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작업했다. 2시간 가량의 영화는 첫 내부 시사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 MGM은 그것을 69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원본에는 없는 내레이션을 추가했다. 휴스턴은 절망했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누더기가 된 영화는 처참한 개봉 성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소설의 도입부에는 주인공 헨리가 북군에 자원 입대하게 되는 짤막한 과정이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는 헨리의 신병 교육 훈련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잘렸는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다짐을 시킨다. 마음 아픈 어머니와는 다르게 헨리, 이 철딱서니 없는 청년은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붉은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을 가지기를 열렬히 소망한다. 그것은 총상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의미한다.

  영화의 초반부, 오디 머피(Audie Murphy)가 연기하는 헨리는 겁 많고 어리버리한 신병처럼 보인다. 군대라는 낯선 조직,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부대원들, 거친 욕설과 농담, 그 모든 것에 헨리는 적응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처 적응할 시간도 없이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된다. 헨리는 전쟁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대기를 가득 채운 희뿌연 포연(砲煙) 속에서 적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저 너머 남부군이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내는 소리는 야수가 내는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헨리가 맞닥뜨린 전장터를 마치 비현실적이며 불길한 미로처럼 제시한다. 거기에는 전장터 주변의 자연 풍광도 한몫을 한다. 높이 자란 큰 나무 위에서 반사되는 태양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새들은 끊임없이 지저귄다.

  존 휴스턴은 이 영화를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로 가져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는 주인공 헨리의 심리적 변화가 주를 이루는 원작 소설의 본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독창적 구도로 인물들을 찍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로 인물들을 화면에 꽉 채운 구도에서는 불안과 긴장이 느껴진다. 또한 전장터의 잔혹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풍광과 소리를 강조함으로써 전쟁과 마주하는 헨리 내면의 주관적 인식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은 스티븐 크레인이 소설에서 중점을 두고 묘사한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혹독한 두 번째 전투에서 결국 헨리는 부대를 이탈해 도망을 친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헨리는 그 인간적인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군인은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도망쳤고, 패주하는 아군에게 맞은 상처를 적군에게 입은 것이라며 동료들에게 거짓말까지 했다. 자랑스러운 '붉은 훈장'은 헨리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다. 그 수치심과 자괴감이 헨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운다. 이제 그는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넘어서기 위해 전장터의 선두에 나선다.

  영화는 전투의 참혹함을 비교적 온건하게 그려낸다. 아마도 제작사에 의해 삭제된 감독 컷은 좀 더 세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절제된 장면들에서는 응축된 정서적 힘들이 느껴진다. 헨리의 친구 짐이 부상으로 죽는 장면 또한 연극적인 간결함으로 표현되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언급한다면 빌 몰딘(Bill Mauldin)이 연기한 '큰 목소리 군인(The Loud Soldier)' 윌슨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다소 거칠고 시끄러운 인물로 묘사된 윌슨은 영화에서는 감성적이고 따뜻한 군인으로 나온다(그런 부분은 윌슨의 별명인 '큰 목소리'와 맞지 않는다). 그는 헨리를 연기한 오디 머피처럼 2차 대전 참전 군인이었다. 두 사람은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을 때부터 서로 안면이 있었다.  

  주연 배우 오디 머피에게 겁 많은 병사 헨리를 연기하는 일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참전 군인으로 미 육군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훈장을 다 받은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제대 후 경력의 전환을 꾀하면서 들어선 길이 '배우'였다. 존 휴스턴은 시원찮은 연기 실력의 초짜 배우와 작업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배우에게는 연기 말고도 문제가 더 있었다. 제대 군인으로서 머피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촬영 스태프들과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때로 감독의 연출에는 촬영 중인 배우들의 심리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부분도 들어간다. 휴스턴은 인자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머피를 대했다. 그런 그의 인간적인 배려 속에 오디 머피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붉은 훈장'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존 휴스턴에게 이 영화는 평생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다. MGM이 '붉은 훈장'에 저지른 횡포는 그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이후 휴스턴은 모든 영화 계약에서 필름의 감독 사본에 대한 권한을 명시하도록 했다. 비록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나 영화 '붉은 훈장'에는 휴스턴이 의도했던 메시지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이 영화는 결코 겁쟁이 청년이 전쟁에서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평범한 한 인간의 고통스럽고 치열한 내적 여정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이전의 자아를 지워버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붉은 훈장'의 청년 헨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군인'이 된다. 관객은 이 새로운 남성성의 획득이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된 비극으로 이어짐을 깨닫게 된다. 놀랍도록 독창적인 반전(反戰) 소설을 쓴 스티븐 크레인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스물 여덟, 고흐처럼 살아생전에 주어지지 않았던 명예는 그의 사후에 빛나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tcm.com   사진 중앙이 헨리 역의 Audie Murphy, 우측이 윌슨 역의 Bill Mauldin



**전쟁과 군인에 대한 다큐들

다큐 Restrepo(201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restrepo2010.html


다큐 Hell and Back Again(201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hell-and-back-again2011.html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ther-soldier-son2020.html
 
 
***존 휴스턴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misfits-1961.html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크레인의 'The Red Badge of Courage'는 현재 우리말 번역본이 없다. 영문본은 www.gutenberg.org에서 다운받아서 볼 수 있다. 영미문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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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3부:
The Heiress(1949), William Wyler 감독



 "넌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 한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 자수 하나는 잘 놓더군."

  딸은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기에 사윗감이라며 딸이 선보인 남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딸이 나중에 상속으로 받게 될 재산을 보고 들이댄 놈팽이가 분명하다. 남자가 노리는 것이 '돈'이라고 말하지만, 딸은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결국 뼈아픈 독설을 퍼붓는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49년작 'The Heiress'는 Augustus Goetz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희곡의 원작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 1880)'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부유한 저택의 한 아가씨 캐서린을 보게 된다. 그런데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것 같은 아가씨가 생선 장수에게서 생선을 사들고 온다. 들어오는 길에 아버지와 마주친 캐서린은 아버지를 위해 요리할 싱싱한 생선을 샀다고 말한다. 그런 딸을 대하는 아버지는 다소 거리감이 있고 냉담하게 느껴진다. 아버지 슬로퍼 박사는 그런 건 직접 할 게 아니라 배달을 시키고, 제발 밖에 나가서 사람 좀 만나라고 말한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 장면은 캐서린이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적이고, 그 애정을 갈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영화에서 캐서린 역을 맡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는 헐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다. 그런데 영화 속 캐서린은 큰 이모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예의상 춤 신청을 했던 남자는 곧 캐서린을 내버려 두고 다른 아가씨와 춤을 춘다. 뭔가 좀 이상하다. 아니, 저 미녀 아가씨를 왜 외면하는 거지?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원작의 캐서린은 키가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아무런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런 캐서린을 미녀 배우가 연기하는 데에서 오는 간극을 주연 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잘 극복해낸다.

  그 파티에서 아주 잘 생긴 청년 모리스 타운젠트가 캐서린에게 접근한다. 조각 같은 얼굴을 가진 미남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연기한 모리스는 소설 속에서도 수려한 외모를 지닌 인물로 나온다. 그가 못생긴 캐서린(관객은 하빌랜드를 그렇게 억지로 생각해야만 한다)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다 속내가 있다. 캐서린은 장차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슬로퍼 박사가 가진 재산은 물론이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모친이 남긴 돈은 온전히 캐서린의 것이다. 별 다른 직업도 없이, 그나마 조금 받은 유산마저 탕진한 이 남자는 무엇보다 '돈'이 절실하다. 그에게 캐서린은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는 은행 계좌처럼 보인다. 타고난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그는 곧 캐서린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에서 모리스는 캐서린의 집 응접실에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프랑스 작곡가 Martini의 '사랑의 기쁨(Plaisir d' amour)'. 이 가곡의 제목이 모순적인 이유는 노래의 내용에 있다. 사랑의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만이 영원히 남아있네... 노래는 이후 캐서린이 맞닥뜨릴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을 예견한다. 모리스가 낭만적으로 캐서린에게 구애하는 이 장면 또한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처럼 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용을 가공하고 변형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상속녀'에는 원작의 본질적인 부분이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바로 캐서린과 아버지 슬로퍼 박사의 대립과 갈등이다.

  순종적이고 착한 딸이었던 캐서린은 모리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캐서린은 슬로퍼 박사가 바라보는 것처럼 둔하고 합리적인 판단 능력도 없는 딸이 아니다. 슬로퍼 박사는 모리스를 돈만 밝히는 속물로 취급하며 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캐서린의 결심은 굳건하다. 소설에서 슬로퍼 박사가 딸에게 보이는 경멸과 조롱, 무시는 그가 얼마나 편협하며 냉담한 인물인지를 드러낸다. 슬로퍼 박사를 연기한 랠프 리차드슨(Ralph Richardson)은 비교적 온건하게 그 부분을 표현했음에도 관객은 그가 모리스를 반대하는 이유가 진심으로 딸을 위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는 자신이 물려줄 유산을 가지고 캐서린을 압박한다. 딸에 대한 온전한 통제력을 갖는 것, 그것이 박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캐서린은 모리스와 결별하게 된다.

  소설에서 캐서린은 모리스와의 결별 이후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모리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고 옳았다는 박사의 자부심을 더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스의 거짓된 사랑,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모멸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캐서린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17년이란 시간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박사의 임종을 앞두고 영화 속 캐서린이 아버지와 극렬히 대립하는 장면은 그 변화를 압축시켜서 보여준다. 박사는 캐서린에게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모리스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말한다. 캐서린은 그 약속을 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박사는 이전에도 그랬듯 '유산'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캐서린은 종이와 펜을 들고 온다. 유언장을 뜻대로 작성하시지요, 하며 아버지를 압박하는 캐서린의 결기는 이전과는 달리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장면도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캐서린이란 캐릭터가 아버지 슬로퍼 박사가 보는 것처럼 그저 순진하기만 하고, 합리적 판단력이 부족한 여성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캐서린은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는 모리스의 구애를 진정한 사랑으로 여기며, 아버지의 유산 없이도 모리스가 자신과 결혼해줄 것이라 믿었다. 과연 캐서린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아가씨였을까? 영화의 초반부에 캐서린이 주문한 의상을 입어보는 장면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 의상은 매우 화려한 크리놀린 스타일(Crinoline Style, 19세기 중반에 유행한 밑단이 넓게 펼쳐지는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소설에서는 '진홍색(crimson)' 드레스로 묘사되는데, 흑백 영화에서는 눈에 띄는 그 색을 표현할 수 없으니 크게 부풀리고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로 대체했다. 과감한 색상의 드레스로 남들의 주목을 끌고 싶어하는 캐서린은 드레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비아냥에도 굴하지 않는다. 진홍색 드레스는 어떤 면에서 캐서린이 자아를 찾는 여정의 시작점에 자리한다.

  영화 '상속녀'가 1960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을 때의 제목은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였다. 그때 지어진 제목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영화는 좌절된 사랑의 상처와 슬픔을 그려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헨리 제임스의 'Washington Square'에는 그러한 표면적 내러티브와는 달리 다채로운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던 여성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여정, 그리고 계급의식에 대한 성찰까지 들어있다.

  소설의 제목 '워싱턴 스퀘어'는 캐서린과 슬로퍼 박사가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으로, 1850년대 당시 뉴욕의 상류층 거주지였다. 변변찮은 집안 배경을 가진 슬로퍼 박사는 '의사'라는 전문직을 가진 이후에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써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가 캐서린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업도 돈도 없는 모리스가 중산층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크다. 아마도 그는 모리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더욱 싫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그러한 슬로퍼 박사의 계층적 인식을 비롯해 모리스의 출신 배경이 삭제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캐서린의 집 밖에서는 다시 나타난 모리스가 캐서린의 이름을 부르며 맹렬히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캐서린은 들리지 않은 것처럼 등불을 들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돌처럼 냉담한, 어쩌면 지친 표정의 이 상속녀는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가질 수는 없는 운명이었다. 아버지 슬로퍼 박사는 평생동안 딸을 아둔한 아이로 여기고 경멸했다. 모리스는 그를 계층 상승과 부를 위한 발판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이 보여주는 얼굴의 표정에는 그 지난한 세월을 견디게 만든 의지와 독립심이 드러난다. 외롭지만 비참하지는 않다. 영화 '상속녀'는 원작을 압축시키고 생략한 영화적 변용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을 잘 살려내고 있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헨리 제임스 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henry-james-1-wings-of-dove-1997.html
 

  헨리 제임스 문학의 영화적 변용 2부 'The Last Moment(194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lost-moment1947.html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주연의 영화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lady-in-cage.html
 

****소설에서 캐서린이 받기로 되어 있는 유산의 액수는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약 백만 달러에 달한다. 슬로퍼 박사는 캐서린이 모리스와 결혼하면 자신의 재산을 남겨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모리스가 캐서린과 결혼할 경우, 캐서린의 모친이 남긴 유산을 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모리스는 더 많은 유산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 결혼 약속을 파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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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2부
The Lost Moment(1947), Martin Gabel



*이 글에는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Rebecca, 1940)'.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었던 젊은 아가씨는 부자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남편의 대저택에 입성하는데, 그곳에서 위압적인 여집사 댄버스 부인과 마주한다.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주인공 출판업자 루이스 베너블은 줄리아나 보데로의 집에서 줄리아나의 조카 티나와 마주한다. 수잔 헤이워드가 연기한 티나는 마치 그 댄버스 부인을 연상케 한다. 뻣뻣하고 오만한 태도로 티나가 요구하는 저택의 하숙비는 터무니없이 높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물론 그에게는 나름의 속셈이 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유명 작가 제프리 애스펀의 숨겨진 연애 편지를 찾으려 한다. 애스펀의 편지를 받았던 주인공 줄리아나는 이제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다.

  영화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 1888)'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Leonardo Bercovici가 맡은 각색은 제임스 소설의 기이한 변용을 보여준다. 백발의 노파 줄리아나 역을 맡은 아그네스 무어헤드(Agnes Moorehead)는 5시간이 넘는 특수분장을 한 후에 연기를 했다. 거의 살아있는 해골에 가깝게 늙어버린 줄리아나는 마치 사악한 마귀 할멈처럼 비춰진다. 줄리아나의 대저택은 고딕 소설의 음산한 건축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곳에 편지를 찾기 위해 잠입한 용사 루이스는 곧 자신이 구해야할 대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루이스는 저택의 버려진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티나를 발견한다. 루이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티나는 스스로를 젊은 날의 이모 줄리아나로 여긴다.

  '애스펀의 러브레터'는 헨리 제임스가 아끼는 작품이었다. 잊혀진 러브레터에 대한 집념으로 출판업자(소설 속에서는 이름이 없다)는 미국에서 베니스까지 여행을 한다. 편지를 꼭꼭 숨기고 내놓지 않는 줄리아나 대신 그는 조카 티타(영화 속 이름 티나)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영화 속 티나와는 달리 소설의 티타는 아무 매력도 없는 노처녀이다. 곧 티타는 그의 친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모의 뜻을 존중한다며 편지를 찾는 일에는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화는 애스펀의 편지를 찾고자 하는 출판업자의 집착과 열망을 로맨스와 스릴러 장르에 이식시킨다. 루이스는 티나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줄리아나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 조카 티나는 젊은 날의 줄리아나에 빙의되어 있으며, 루이스는 줄리아나가 갖고 있는 애스펀의 편지에 매혹되어 있다. 사악한 마녀로 여겨지는 줄리아나로부터 어떻게 달아날 것인가?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 그 해법은 '화재'이다. 마치 마녀가 불에 화형되는 것을 연상케 하는데, 줄리아나의 실화(失火)로 인한 그 화재로 편지는 모두 불에 타 없어진다. 

  원작 소설은 값나가는 편지에 대한 어느 출판업자의 욕망과 윤리적 당위성 사이의 고민이 주된 테마를 이룬다. 편지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신분과 의도를 철저히 숨긴다. 티타의 환심을 사서 편지를 찾는 것도 여의칠 않자, 줄리아나의 방에 침입해서 뒤지기까지 한다. 티타는 그런 그의 기만과 거짓을 드러내며, 편지를 얻고 싶으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줄리아나가 죽은 후 편지는 자신이 물려받았고,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면 편지 또한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편지들 때문에 못생긴 노처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고 그는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겠어. 청혼을 거절당한 티타는 편지들을 모두 불에 태운다. 티타는 자신의 상심을 남자에게 그렇게 되돌려 준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지독한 욕망과 상실의 변주는 'The Lost Moment'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음산한 대저택, 백발의 흉측한 노파, 귀신 들린 미녀, 그 모든 것의 원흉이 되는 노파와 대저택을 불사르는 화재, 그리고 사랑의 완성.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고딕 스릴러 로맨스 영화는 당시 흥행에도 실패했고 비평가들에게도 외면받았다.

  과연 이 영화는 버림받아 마땅한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원작자 헨리 제임스는 기막힌 각색을 못마땅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이 그려낸 인간 내면의 어둡고 축축한 욕망을 영화는 다른 장르적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영화 속 줄리아나는 애스펀이 떠나갈 것이 두려워 자신이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줄리아나의 고통받는 자아를 대변하는 조카 티나의 정신병적 징후는 줄리아나와 그 젊은 날을 상징하는 편지가 불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치유된다. 이 영화의 감독 Martin Gabel은 오손 웰스와 연극을 함께 했던 동료로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했다. 그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은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 문학의 기이한 영화적 변용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hristinawehner.wordpress.com   영화 속 줄리아나로 분장한 Agnes Moorehead가 자신의 사진을 들고 있다.



***영화의 원작 소설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는 2000년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다. 저작권이 풀린 작품(Public Domain)이므로 영문본은 www.gutenberg.org에서 다운받아서 볼 수 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henry-james-1-wings-of-dove-19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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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Iain Softley 감독
 


  "밀리는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

  여자는 남자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케이트와 머튼은 연인 사이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미룬 둘은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주변을 속인다(영화에서는 약혼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돈 때문이다. 가난한 케이트는 부유한 이모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이모는 케이트를 부자 귀족과 맺어주려고 한다. 머튼은 가진 것 없는 글쟁이 기자라서 이모 눈에는 들지도 않는다. 그런 케이트 앞에 미국인 상속녀 밀리가 나타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밀리는 죽을 병에 걸려 있다. 그런데 밀리는 케이트의 연인 머튼에게 마음을 뺏긴다. 밀리와 친구가 된 케이트는 속내가 복잡해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밀리와 머튼을 결혼시키고 유산을 받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자신이 머튼과 결혼하면 되지 않은가?

  과연 케이트는 악녀인가? 케이트를 사랑하는 머튼은 정직한 인물로 거짓말을 혐오한다. 그런 그에게 연인 케이트는 다른 여자에 대한 '거짓 사랑'을 강요한다. 그것도 죽어가는 여자를 상대로 유산을 얻어내라고 말이다. 밀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냐고 남자를 구슬린다. 남자는 연인에 대한 집착과 환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자가 된다.

  헨리 제임스(1843-1916)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였다.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나 유럽을 동경했고, 결국 영국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에 소설과 희곡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동시대에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그즈음 미국 출판계에서 선집 형태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헨리 제임스는 새롭게 부각되었다. 연극과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 1902)'는 무려 9번이나 각색되었다. 1997년에 Miramax에서 제작한 이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거치는 과정은 '압축'과 '생략'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헨리 제임스의 문체는 부연 설명이 많고 장황한 만연체에 가깝다. 영문본을 읽다 보면 다시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가서 읽게 될 때가 많다. 영화로 만들어진 '비둘기의 날개'에서는 그런 제임스의 흔적을 기술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서 시간은 1910년으로 건너뛴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등장인물들은 내쳐졌으며, 밀리가 미국 특파원으로 온 머튼을 만나서 반했다는 소설 속 설정도 바꾸었다. 영화에서 밀리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머튼을 보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케이트와 머튼의 육체적 끌림에 좀 더 비중을 둔다. 점잖은 빅토리아 시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영화의 선정성에 꽤나 놀랄 것이다. 헐리우드의 뻔한 장삿속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지닌 본질을 망가뜨린 걸까?

  러닝타임 1시간 42분이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1910년대를 충실히 재현한 세트와 의상, 베니스에서 찍은 로케이션 장면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늘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베니스에서 어떻게 인파를 통제하고 영화를 찍었는지 내내 궁금해질 정도이다. 영화 '비둘기의 날개'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생기와 광채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케이트를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매혹적이다. 소설 속에서 케이트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묘사되는데, 카터는 존재 그 자체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부에 대한 거칠고 들끓는 욕망으로 연인 머튼을 자신의 계획에 동조하게 만드는 케이트. 꽤나 주도면밀하고 냉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밀어내는 속내가 편할 리가 없다. 머튼이 진짜 밀리를 사랑할까봐 두려워진 케이트는 흔들린다. 밀리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원하는 마크 경을 부추겨 머튼과 자신의 관계를 밀리에게 알리도록 한 것이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밀리. 머튼의 사랑으로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던 밀리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밀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재산을 머튼과 케이트에게 남긴다.

  "우린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We shall never be again as we were!)"

  원하는 돈을 얻게 된 케이트는 행복했을까? 소설은 케이트가 머튼을 향해 외치는 그 말과 함께 끝난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순전하게 빛나는 한 마리 비둘기로 묘사되는 밀리는 자신이 남긴 돈이 두 연인에게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음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밀리는 사랑을, 머튼은 평생 간직할 아픈 추억을, 케이트는 돈을 얻었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이 서늘한 사랑의 초상에서는 깊은 슬픔이 베어져 나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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